메시지

돌아온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11-3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0. 1. 20. 14:24

돌아온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11-32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유명한 비유들 중 하나인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들이 적혀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 (15:3-7),”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8-10)”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 (11-32)”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들은 내용은 다르지만 사실 같은 주제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도로 찾았을 때의 기쁨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다른 세 가지 비유들을 이용해서 이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 이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도로 찾았을 때의 기쁨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은 자들를 찾기 위한 하나님의 간절하신 뜻을 섬기시고자 이 땅에 오셨으며, 그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이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드렸던 기도를 기억해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오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5 1-2절에 따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다고 하며, 이를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며 예수님을 힐난했습니다. 이들의 눈에 세리와 죄인들은 상종해서는 안 될 나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 이들은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들을 얼마나 온유하게 대하셨는지는 1절 말씀이 잘 드러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다고 합니다. 마치 양들이 그들의 목자를 둘러싸고 따라다니듯이, 온 동네의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을 에워싸고 앉아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즐거워하고 또 주님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며 쉴 새 없이 재잘거립니다. 상상만 해도 입가에 아버지의 미소가 감도는 참으로 천국과도 같은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를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싫어하고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섬기라고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잃어버린 자들을 하나님의 온유한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는 대신 그들을 더러운 죄인으로 정죄하며 배척하고 멀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는커녕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가로막고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도로 찾았을 때의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도 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한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둘째가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재산 중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그들의 분깃을 각각 나누어주었습니다. 자기의 몫을 받은 둘째 아들은 그것을 모두 현금으로 바꾸어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 가져온 재산을 모두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서 끼니조차 채울 수 없는 매우 궁핍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사람들이 자주 하는 두 가지 질문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왜 아버지가 이 둘째 아들에게 그가 원하는 대로 재산을 나누어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아들이 이렇게 된 것은 일부 아버지의 탓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아들이 먼 나라에서 가서 거기서 잘 살고 성공을 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물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고, 그의 두 아들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비유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들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는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와는 많이 다른 매우 독특한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우선 자유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곧 아버지는 아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며 완전한 사랑을 주십니다. 동시에 이 관계는 불가분의 연합의 관계입니다. 곧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는 결코 생존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으며, 또 아버지는 그 아들을 도로 찾을 때까지는 결코 쉴 수도 없고 평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완전한 자유완전한 연합의 관계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 된 우리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징입니다. 이 자유로 인해 아버지는 아들을 붙잡아둘 수 없으며, 이 연합으로 인해 아들은 결코 아버지를 떠나서 성공할 수도 또 행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자녀들 사이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두 질문이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자녀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면서 동시에 그 자녀와 완전히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늘 극진한 사랑으로 떠나간 아들을 기다리십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아들이 마음을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5: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하시고, 10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32)에서도,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싫어하는 맏아들을 붙들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회개야 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누가복음 5:32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회개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뇌우치고 올바른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개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방탕한 생활로 모든 재물을 허비한 둘째 아들은 아 내가 이렇게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되겠다.. 앞으로는 돈도 절약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지! 무엇인가를 이루기 전에는 절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회개이고 또 나름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눈으로 보면 회개가 아닙니다. 심지어 아버지와 더욱 멀어지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나의 실패와 부끄러움과 자존심과 미련을 모두 뒤로 한 채 즉시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 사단의 거짓(falsehood)에 속아 일어난 것이라면, “회개는 예수님의 진리(truth)를 통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진리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하시며 풍요로우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영광스러우신가 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우리가 얼마나 궁핍하고 비참하고 두려운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서 참된 회개 곧 하나님께 돌이키는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돼지가 먹는 사료조차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가 된 둘째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고 탄식합니다. (17).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제 정신이 돌아와서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들은 이 부분을 “When he came to his sense” 또는 “When he came to himself”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제 진리라는 거울을 통해 아버지를 떠나 비참해진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탄식에는 아버지의 풍요로움자신의 가난함이 대조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이제 사단 마귀의 거짓에서 깨어나 밝은 눈으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자기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이 회개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4:6절 말씀입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한 둘째 아들은 곧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이전에는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하고 당당하게 요구했지만, 이제 그는 완전히 겸손해졌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지만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전혀 그러실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직 멀리 보이는 아들을 금방 알아보고는 그를 측은이 여기며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종들에게 일러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더 나아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함께 먹고 마시며 기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옆에 앉히고 어루만지며 동네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의 이 말은 그의 기쁨이 얼마나 큰 지를 잘 드러냅니다. 아버지에게는 사실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그에게는 또 다른 착한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오직 이 잃어버린 아들에게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의 첫째 비유 곧 잃은 양의 비유에서 더욱 절실하게 드러납니다. 양 백 마리를 가진 목자가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그는 나머지 99마리의 양들을 들에 두고 그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도록 찾아 다닙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의 착한양들보다도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한 마리의 뿔난양을 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뿔난 양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십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이 사랑의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의 귀환을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생을 가리켜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적이 있었나요?” 하며 아버지에게 불평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 보다는 이 첫째 아들의 마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첫째 아들이 자신과 같은 마음을 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달래며 말했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버지는 이것을 마땅하다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명을 어김이 없이 아버지를 섬겨왔지만, 어떤 점에서 보면 그도 사실은 아버지를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을 자유롭게 누리지 못했으며, 또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은혜 밖에 거하면서, 노예처럼 두려움에 떨며 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생명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때 내 영혼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죄인들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섬기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작은 목자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묵상함으로, 그 은혜 속으로 들어가며 또 그 마음에 합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