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복 있는 처녀 (누가복음 1:26-3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9. 12. 2. 04:48

복 있는 처녀

 

누가복음 1:26-38

 

성경은 성모 마리아를 가리켜 복 있는 여자라고 부릅니다 (누가복음 1:42, 1:45). 물론 그것은 그녀가 구주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고 기른 어머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단순히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사실로 복 있는 여자라고 불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27절에 한 여자가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높여 외쳤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이 여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의 뛰어나심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자의 말인즉 당신과 같이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니 당신의 어머니는 참 복도 많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머니에게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을 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 아들이 세상의 구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면 마리아는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도 더 복 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 여자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누가복음 11:28).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다른 조건들도 붙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서 성공한 자라든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서 구원받은 자라든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그것으로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온 천사 가브리엘과 시골 처녀 마리아 사이에 오고 간 짧은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리아

천사 가브리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대화는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로 시작해서, 마리아의 두 가지 의문과 이 각각에 대한 천사의 대답,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리아의 헌신의 고백으로 끝났습니다. 이 대화를 통해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마리아는 그 말씀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 놀라운 소식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의문 또는 질문 또한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천사의 첫 인사는 이렇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 인사에 대해 마리아는 놀라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인사가 어찜이뇨?” 하나님의 천사가 그 앞에 나타났다는 자체는 놀라운 사실이겠지만, 사실 천사가 전하는 인사말 자체는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우리가 흔히 주고 받는 인사 아닙니까? 특히 약혼자 요셉과의 혼인 예식을 앞두고 있는 처녀 마리아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런 인사를 거의 매일같이 받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유대인 사회에서 주님의 은혜, 주님의 평안, 주님의 함께 하심은 오늘날 우리가 나누는 “Good Morning,” “God bless you!”처럼 흔한 인사말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이 인사를 매우 특별하게 들었습니다. 그것을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인사가 어찜이뇨?” 마리아의 다음 질문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마리아의 의문에 대해서 천사는 그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들이 장차 다윗의 위에 올라 영원히 왕노릇을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의 말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이미 요셉과의 혼인을 앞두고 있으며 당연히 요셉으로부터 아기를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셉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런 정황들을 생각하면 천사의 말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이것이 가까운 장래에 그녀의 새 가정에 일어날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우리 집안과 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엉뚱하게도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천사의 말을 듣고 자신이 처녀인 상태에서 아기를 갖게 될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엉뚱한 생각이 또 있을까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닷물이 갈라지기도 하고, 해와 달이 하늘에서 멈추기도 하고,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하고, 늙어 죽은 자 같은 몸이 아기를 수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처녀가 수태하고 아기를 낳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처녀가 아기를 낳는 그런 전무후무하고 황당무계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이 말에 반응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참으로 경이롭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면서, 이 세상의 상황(context)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이 세상의 상황 (context)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또한 이런 세상 속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시골 마을에 사는 처녀였으며, 그녀에게는 요셉이라는 정혼자가 있었으며, 그녀는 엄격한 유대교 율법에 따라 운영되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여인네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 상황 (context) 안에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는 이미 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축복이란 무엇이며, 또 그 축복이 어떻게이루어질 것인지도 이미 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의 상황 (context) 안에서 한 남자의 좋은 아내가 되어 최대한 행복하고 순탄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훌륭한 아들이나 딸을 갖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 또한 이 세상의 상황 속에서 순응(adapt)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축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제(trouble)”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매우 특이한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 말씀을 자신이 처한 상황(context) 안에서 듣고, 생각하고, 추측하지 않고, 그냥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상황 안에 끼워 맞추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자신에게 자유롭게 말씀하시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리아는 처녀(virgin)였습니다. 처녀란 남자를 경험하지 않은 여자를 의미하지만, 순수함(purity)과 순진함(inexperience)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리아의 가장 깊은 곳은 비어있었고 아무도 다녀간 흔적이 없이 깨끗했습니다. 그곳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녀만의 비밀 공간이었습니다. 그녀의 약혼자인 요셉도, 그녀의 부모도,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 은밀하고 깊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처음으로 이 깊은 성소(sanctuary)의 문을 열고 그 말씀을 그곳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참으로 순수한 처녀였던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녀의 깊은 성소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맞아들였습니다. 29절 말씀입니다.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마리아는 천사의 인사 말씀을 듣고 놀라며 그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곰곰이 숙고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마리아의 이런 모습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서 천사들이 자신들에게 전한 소식을 전합니다. 이에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2:19). 또 누가복음 2:51절에는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시면서 하시는 모든 말씀들을 그 모친이 마음이 두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마음에 두고 기억하며 이를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마치 생명의 씨가 여자의 몸에 착상을 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녀의 마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말하자면 마리아는 말씀을 잉태한 것입니다. John of Damascus라는 7세기 시리아 수도사는 마리아가 귀를 통해 잉태했다 (Mary conceived through the ear)”고 말합니다. 천사가 전한 말씀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마치 하나님을 맞이하듯 그 말씀을 받고 이를 소중한 보배처럼 그녀의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 한 글자 한 글자를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하고, 등불을 켜서 밝히고, 그 앞에서 서서 그 뜻을 음미했을 것입니다. 비록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리지는 못해도, 비록 시골 처녀가 감당하기에 너무 크고 두렵게 느껴져도,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녀의 깊은 성소에 그 말씀을 모시고는 고하였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녀는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맡겼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소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31-33절 말씀입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낳을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큰 자가 되시며 또 35절에는 거룩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그 몸을 통해 태어난다는 것이 마리아에게 축복이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의 일을 위해 마리아의 몸을 이용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을 마냥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18 이하를 보면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은 마리아가 동거 전에 아기를 밴 것을 알고는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갈릴리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 더구나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이라도 찍힌다면 연약한 여자로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마리아가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것은 왕후 에스더가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규례를 어기면서 왕 앞에 나아가면서 죽으면 죽으리라 (If I perish, I will perish)” 한 것과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마리아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실상은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고 키우는 자체가 마리아에게 축복인 것입니다. Thomas Torrance라는 신학자는 그의 책 Incarnation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참여하는 것이 곧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Our birth in Christ is a participation in his birth)” (p. 91). 이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잉태하고 낳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직 예수님만이 그녀의 삶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연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생명이 되시고, 빛이 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안에서 그녀는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새 생명을 가진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천사가 전하는 바 태어나실 아기가 어떤 분이신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또한 예수님 안에서 새로 창조된 우리의 모습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큰 자이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큰 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자이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왕이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깊은 성소에 받아들이며,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믿고 기도하며, 이를 위해 나의 몸과 나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 안에서 나의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를 가리켜 은혜를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은혜란 무엇일까요?  Karl Barth는 은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왕으로서의 주권적 권한을 가지시며, 하나님의 처분에 나 자신의 존재 전체를 맡기므로,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뜻대로 내게 행하실 수 있는 자유를 가지시는 것이다. (“Grace is the royal sovereign power of God, the existential presentation of men to God for his disposal, and the real freedom of the will of God in men.”). 곧 은혜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권한만이 역사하며, 이 하나님의 처분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고 싶은 일들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리아가 나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할 때, 그녀가 바로 이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은혜에 들어가기 위해서 마리아처럼 처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성소를 준비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이 곳에 모셔 들이며, 그리스도 예수님을 잉태하고 해산하기까지 또 주님께서 내 영혼을 잉태하시고 해산하기까지 그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