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우리는 왜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가? (창세기 3:1-24)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9. 11. 23. 10:37

우리는 왜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가?

 

창세기 3:1-24

 

창세기 3장은 사람이 뱀 곧 사단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고 타락하는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범하게 되었으며, 또 죄의 결과 곧 죄가 사람의 영혼에 가져오는 해악을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죄를 가장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일 (violation of God’s law)”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만을 놓고 본다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행위 자체가 곧 죄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죄는 어느 순간 갑자기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 가능하게 된 보다 큰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뱀의 거짓말여자의 탐욕입니다. 여자가 뱀의 거짓말을 듣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자 그녀의 마음 속에 탐심이 생겼습니다. 전에는 넘으면 안 되는 선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선을 뭉개고 넘어가는 넓은 길이 생긴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성공과 행복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손을 뻗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이 죄의 시작은 뱀의 거짓말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1) 이 뱀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every) 나무의 실과를 네가 임의로 (freely)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2:16). 뱀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가 되는 말을 여자 앞에 툭 내던진 것입니다. 뱀의 의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흠집을 내고 이를 통해 여자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의심을 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여자는 뱀의 입에서 나온 이 첫 진술을 통해서 뱀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채려야 했습니다. 만일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또 이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녀는 뱀의 말을 단호하게 반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네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야!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자유롭게 먹으라고 말씀하셨어! 난 네가 내게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 꺼져! 내 앞에서 사라지란 말이야!” 하지만 여자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여자의 대답은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습니다. 이 문제점들은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데 있어서 흔하게 경험하는 오류들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고 받아들이지 않고 그 말씀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유형으로, 말씀의 내용 중 일부를 빼거나, 말씀에 없던 것을 더하거나, 말씀의 내용을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하게 하거나, 말씀의 절대성을 약화시켜서 상대화시키는 것입니다. 여자는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를 임의로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제외하면 사실상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자유롭게 먹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는 각종이라는 말과 임의로라는 말을 뺌으로 그녀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을 감사하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또 여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라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애매하고 불분명하게 만들었습니다. 동산 중앙에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뿐 아니라 생명 나무도 함께 있었습니다 (2:9). 하나님께서 이 나무의 실과를 금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이것은 사람이 먹도록 허락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여자의 말은 이 생명 나무를 금지된 것에 포함시킴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왜곡시켰습니다. 여자는 또 하나님께서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하면서 만지지 말라는 말을 더하였습니다. 물론 먹지 말아야 할 것이면 만지지도 않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그녀는 “…… 말고 …… 말고를 반복함으로써 금지하시는하나님께 대한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surely) 죽으리라말씀하셨는데, 여자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 죽음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하지만 여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일로 못박는 대신 죽을 수도 있다는 상대적 가능성으로 생각했습니다. 여자의 말은 얼핏 듣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여러 중대한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뱀의 처음 한 말 곧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을 들었을 때,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그의 말을 반박하고 뱀을 퇴치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붙들어 뱀을 물리치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뱀에게 동조하며 그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뱀은 그녀의 마음과 귀가 그에게 열려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의심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뱀은 이제 더욱 노골적이고 허황된 거짓말들로 여자를 현혹하였습니다. 뱀은 우선 여자 앞에 놓여있는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걷어치웠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4). 그리고 그녀 앞에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 대신 여러 거짓말들로 엮어진 죽음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의 거짓말은 “…… 하나님이 아심이라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뱀은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함으로써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신 자신의 거짓말을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이 그녀 앞에서 제거되고, 또 선하신 하나님이 그녀의 마음 속에서 제거되자 그녀는 뱀의 거짓말을 사실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뱀이 그녀 앞에 열어 놓은 길은 죽음에 이르는 함정이지만 뱀의 공교한 말로 인해 천국의 길처럼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이제 뱀의 거짓말들이 그녀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탐욕스럽게 바뀌었습니다. 이 바뀐 눈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자 그것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또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보였습니다. 뱀의 거짓말과 그녀의 탐욕이 서로 협력하여 새로운 세상을 연 것입니다. 이 뱀의 거짓말과 여자의 탐욕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자리가 없으며, 하나님의 선하심도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오히려 거짓말이 되었으며, 또 이 사랑의 계명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오히려 미워하는 원수가 된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공부하기가 매우 어려운 이유이며, 또한 반대로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음을 다해 열심히 성경 말씀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기준을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가치를 매기며, 취사 여부를 결정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거짓말과 탐욕으로 변해버린 여자의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나무의 실과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입니다. 그녀의 눈에 그것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또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보였습니다. 이 여자의 눈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세상 사람들의 눈입니다. 요한12:16절 말씀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세상의 눈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직 이것들이 좋은 것들이며, 가치 있는 것들이며, 마음을 다해 추구할 것들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경계하면서 사도 요한은 권면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1 2:15). 그리고 말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이 세상과 세상이 있는 것들과 대조시켜 우리 앞에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들은 여자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그녀의 마음 속에서 잃어버렸던 것들입니다. “정욕의 눈으로 보면 아무런 가치도 없고 오히려 두렵고 무서운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바로 우리가 성경책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눈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간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과 그 안에서 사람들이 울고 웃으며 찾고 구하는 것들이 다 헛되고 거짓됨을 말해줍니다. 이것들이 헛되고 거짓된 만큼, 일생 이것들을 좇아 수고하는 인생 또한 헛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아무리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 끝은 허무한 죽음과 영벌입니다. 속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그것은 전혀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 공부의 중요성에 대한 Introduction이 되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태복음 13:1-23, 마가복음 4:1-20, 누가복음 8:4-15)입니다. 이 비유에서 는 사람들의 마음에 뿌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4:14).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 뜻을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근본 목적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4:11-12). 이 말씀을 따라 성경 공부의 목적을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고 돌이켜 죄사함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고 배우는 목적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생명의 씨앗이 되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마음에 심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 수도 없고 우리의 죄악된 삶에서 돌이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고 돌이켜 죄사함을 얻는 것은 마치 짙게 드리운 먹구름 아래 있으면서 하늘에 떠있는 별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 먹구름은 사단의 거짓말과 세상의 철학들과 사람들의 두려움과 욕심이 뒤범벅이 되어 두텁게 세상을 덮고 있어서 하늘의 별빛이 도저히 통과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또 비록 먹구름 아래 갇혀있지만 세상에는 사람들이 켜 놓은 횃불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온갖 반짝이는거짓 유혹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먹구름 위로 비치는 별빛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에덴 동산에서 여자가 걸었던 길을 반대로 가면 됩니다. 뱀의 거짓말과 자신의 탐욕이 여자의 눈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가 탐스럽게보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타락한 눈을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눈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떠 있는 별이 보이며, 그 별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동산의 한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동산에 사는 아담과 하와는 늘 이 나무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 나무의 실과는 다른 나무의 실과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웠을 것이며 또 하와가 먹고 남편에게도 준 것을 보면 맛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 앞에 설 때마다 그것을 따 먹고 싶은 욕심은 그것을 금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제지를 받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앞에 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탐욕을 잠재운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은 늘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눈과 거룩한 마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같은 일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5:2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의 맹렬한 탐욕이 잠잠해집니다. 우리의 욕심이 죽은 자리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살아나시며, 이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입고 또 거룩한 눈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덮고 있는 검은 구름을 뚫고 빛나는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빛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무엇인가의 가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타락한 눈으로 보면, 곧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의미도 없고 쓸 데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고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말씀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말씀을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단순히 그 말 자체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한 사람을 함께 생각하며 이해를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을 극진히 섬겨온 효자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불효자입니다" 하며 한탄을 한다면, 사람들은 "이 사람이 극진히 부모님을 섬기고도 이렇게 아쉬워하니 정말 효자구나!" 할 것입니다. 반면에 늘 교만하고 이기적이던 사람이 겸손한 사랑에 대해서 "감동적인" 설교를 했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위선을 보면서 힘들어할 것입니다.  곧 그 사람의 평소의 어떠함에 비추어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이해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바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기본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성품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 네 가지입니다: 곧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또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과, 전능하심과, 거룩하심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원리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뱀을 가리켜 가장 간교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간교하다는 것은 겉으로는 선해 보이지만 속에 악한 것을 숨기고 있는 모습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결코 숨겨진 악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깊은 골수까지도 오직 순전한 선하심으로만 가득합니다. 또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람의 선함과 다릅니다. 사람의 선함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곧 자신에게 선한 자에게는 선하고, 자신에게 악한 자에게는 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들에게선하십니다. 심지어 죄인들에게도 선하십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특히 죄인들에게 선하십니다. 곧 하나님의 선하심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말씀이 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하고, 어떤 이유로든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직 이 선하심에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일 점 일 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다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5:18).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으며,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며, 반드시 그 명하신 일이 성취됩니다 (이사야 55:11). 사람의 말 속에는 거짓이 많습니다. 칭찬처럼 들리지만 마음을 찌르는 말들도 있고, 축복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악담이기도 하며, 많은 약속들과 맹세들을 하지만 허언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을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며 진실하십니다. 그래서 그 하신 말씀에 거짓이 없으며 또 그 하신 약속이 허언으로 끝나는 일이 없습니다. 심지어 듣는 우리는 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하신 말씀을 잊으시는 일이 없이 반드시 기억하시고 그대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것을 지나가는 말로 들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지는 영원한 말씀으로 아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주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자주 반문합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창세기 18:14, 예레미야 32:17).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일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가 들어 몸이 죽은 자와 같이 된 후에서야 아들 이삭을 주신 것,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썩어 냄새가 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그를 다시 살리신 것 등이 좋은 예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도록 도우시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며 낭패를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 7장에 나오는 한 장관). 반대로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 사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주요한 사건들이 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따라 일어난 것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다면 성경의 한 말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그 하신 말씀의 의미를 축소시키지 말고, 오히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며 주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오해하여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이를 근거로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9:7절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여쭙기를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질문합니다. 이들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아내 버리기를 허락하신 것처럼 말했습니다. 이를 통해 아내를 버리는 자신들의 부정함(unfaithfulness)을 변명하고 합리화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할 수 없이 허락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죄를 용납하시지 않으시며, 그것을 기뻐하시거나 부추기시는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죄악된 민 낯을 드러내고 책망하여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빛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입니다 (디모데후서 3:15-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기까지 변화되고 성장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사람들이 기뻐서 노래하고 춤을 춘 일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거나, 재를 머리에 뒤집어 쓰거나, 입은 옷을 찢거나 하며 괴로워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는 더러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이며 마음입니다. 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담는 그릇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통해 나의 죄악된 삶에 안주하며 위로를 구할 것이 아니라, 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참으시고 용서하심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핑계로 삼아 죄를 짓고 이를 즐기는 일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의 간교한 거짓말과 우리의 난폭한 탐욕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 주인 되신 하나님과 똑같이 진실되고 거룩하며 능력이 있습니다. 사단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는 비슷한 점도 있고 정반대인 점도 있습니다. 비슷한 것은 말의 씨앗을 뿌린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거짓말로 여자를 유혹했듯이,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씨를 우리 마음에 뿌려 구원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정반대인 점은 사단의 거짓말은 처럼 영광스럽게 들리지만 그 결국은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죽음이며,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작고 투박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그 결국이 의와 생명과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단의 거짓말과 사람들의 욕망이 뒤얽힌 거대한 거짓말입니다. 마치 연극을 공연하는 무대와 같습니다. 때가 되면 무대의 조명은 꺼지고, 극장 전체를 환하게 밝히는 불이 켜집니다. 그러면 연극은 끝나고 사람들은 현실로 돌아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감추어져 있던 진짜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마음에 심고 키우던 자들만이 그 날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그 날은 숨겨진 것들이 드러나고, 의와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이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성경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이를 마음에 뿌리며, 믿음으로 이 말씀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사단의 거짓말과 나의 탐욕을 내 속에서 몰아내고 다시금 하나님의 진리와 거룩함이 내 영혼을 다스리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매일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