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1:26-31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정(睛)은 눈동자를 의미합니다. 화룡점정의 문자적인 뜻은 “용의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넣는다”는 말인데, 어떤 일이나 말을 완성시키고 살아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작업을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이 고사성어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중국 양나라에 장승요란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화백은 안락사라는 절의 주지에게 부탁을 받아 그 절에 용 두 마리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 용들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채 일을 끝냈습니다. 사람들이 왜 용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느냐고 물으니 화가의 말이 눈동자를 그리면 용이 살아나 날아가버릴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주지는 눈동자를 그려 그림을 완성시켜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용의 눈동자를 그려 넣자 곧 그 용이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버리고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다른 한 마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일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화룡점정이란 말을 서두에 꺼낸 것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가 이와 같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의 앞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산천초목을 지으시고, 또 하늘과 바다와 땅을 온갖 동물들로 채우셨습니다. 세상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또 충분히 많은 생명들로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세상은 아직 “벽에 그려진 그림”에 불과했습니다. 이 그림 전체를 살아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시작하신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창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화백 장승요가 용의 눈에 눈동자를 그려 넣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용을 그린 사람은 이 화가지만 그 작품이 너무나 뛰어나서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화가의 손을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은 너무나 뛰어나고 위대한 존재라서 곧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버리고 맙니다. 화백 장승요가 용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그가 그린 두 마리의 용이 모두 여전히 땅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멋있는 그림으로” 잘 보존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쓰여진 하나님의 일들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나의 기원(origin)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크게 둘로 나누자면 구약에 기록된 창조(creation)와 신약에 기록된 재창조(recreation)입니다. 이 둘은 사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안에서 하나의 일로 계획되고 또 진행되어온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나를 알지 못하면, 나를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이해하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땅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우리의 삶은 들짐승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근본을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성경말씀은 아마도 오늘 본문의 26-28절 말씀일 것입니다. 제가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에 관해서,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크게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 “세상의 왕”으로 지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붙들어야 할 “나의 기원”인 것입니다.
인간 창조의 중요성, 그리고 인간의 중요성은 성경 본문의 특이한 서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십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 하자”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누구를 뜻하는지에 대해서 성경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삼위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의견으로는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모든 하늘의 천사들을 포함한 말이라고도 하며, 어떤 학자는 단지 “강조”의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고도 합니다. 그 뜻이 무엇이든 “우리”는 전부 또는 전체를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그 당시에 존재하고 있던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모든 의식과 모든 능력과 모든 기능이 바로 사람을 창조하는 이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느 왕국에서 왕의 자리를 이을 새 왕자가 태어나는 순간에 그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왕궁 안에서, 왕궁 밖에서, 그리고 멀리서 왕궁이 있는 쪽의 하늘을 바라보며 오직 한가지 일 곧 “아기의 탄생”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27절은 또 특이하게 “창조”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한글성경”에는 두 번 나오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원문에는 이 말이 세 번 나오며, 원문에 충실한 다른 한글 성경 번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 성경”에서는 1:27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는 “창조하다”라는 뜻으로 “bara”라는 동사를 쓰는데, 이 말은 오직 하나님께 대해서만 사용된다고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이 말이 세 개의 절, 곧 1절, 21절, 그리고 오늘 본문의 27절에서만 쓰여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 “생명체의 창조,” 그리고 “영혼의 존재인 사람의 창조”를 나타냅니다. 이것들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조차 없는 신비로운 영역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라는 말이 인간 창조의 기록에는 세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에 당신의 모든 지혜와 모든 능력과 모든 정성을 쏟아 부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8:14, 예레미야 32:27, 누가복음 1:37). 하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 없음”이 바로 “인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그대로 증거하는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에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쏟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조차 놀라워하실 만큼 뛰어난 하나님의 신비(wonder)이며 경이로움(marvel)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image)”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여러 권고의 말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 19:2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에베소서 4:24절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말씀하며, 또 요한1서 4:1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말씀합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5:48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을 미루어 생각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닮음은 심지어 하나님의 “신성(divine nature)”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시편 8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리켜 “너희는 신들(gods)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sons of the Most High –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34절에서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시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칭 하나님”이라고 한다면서 참람죄를 이유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이들의 고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gods)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gods)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요한복음 10:34-36).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이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내세우신 이유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들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DNA이며 곧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라면, 그 사람이 누구이든 이미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그리고 예수님의 눈에 “하나님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가 그 아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서 하나님 자신을 보시며 이에 우리를 신(gods)이라고 부르시며 우리를 지존자의 아들로 대접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가 자신의 본래 모습을 깨닫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나의 근원이 되시며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곧 “나의 본래의 어떠함”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면 나 자신에 대해서도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본래 어떤 존재였으며, 또 지금의 내가 그 본래의 내 모습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와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유명한 “탕자의 비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결국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서 그는 남의 밑에 들어가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돼지가 먹는 사료조차 먹을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하며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아버지 집에서는 심지어 품군들조차 먹을 것이 넘쳐날 정도로 모든 것이 풍족하고 부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떠난 그는 지금 돼지보다 더욱 비참한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겨우 제정신을 차린 그에게 아버지께로 돌아갈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버지 집의 품군이 될지언정 이제는 절대로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이는 그가 아버지의 풍요로움과 인자하심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골로새서 3:10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는 자 곧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결코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배우고 이 지식의 씨앗을 내 마음에 뿌려 나도 같은 성품을 가진 새 사람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거룩한 영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 명심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중추와 같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세상을 축복하시고 그 뜻대로 다스리시며, 또 세상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리신 아름다운 그림의 눈동자와 같습니다. 사람을 통해 하나님과 세상이 이어지고 하나가 되며, 그 전체가 하나의 웅장하고 멋있는 생명체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망쳐놓은 자연환경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해로움에 대해 탄식하며 심지어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온 세상이 고통 중에 신음하는 이유는 사람이 자신을 세상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에 팔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왕(王)”이 타락했을 때 그 밑에 있는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착하고 지혜로운 지도자를 목이 빠져라 기다립니다. 로마서 8:19-21절에도 같은 말씀이 쓰여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사람은 본래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하나님의 대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왕의 자리를 잃고 쫓겨나 죄의 노예가 되었을 때, 온 세상도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나가 허무한 썩어짐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왕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입니다. 다시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우리가 회복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결코 “한 개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그리고 어떤 형편에 있든 상관이 없이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며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는 왕(王)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신 삶이며,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삶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세상의 왕입니다. 평생 자기만 생각하며 이기적이고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왔던 우리에게 이 진리는 참으로 이해하고 믿기도 어렵고, 이를 받아들이고 이 진리에 따라 산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신 것은 “참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육체를 입으셨지만, 그 안은 고스란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으신 인간의 본 모습이며 또 우리가 돌아가야 할 모습니다.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4: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새롭게 하시고, 주님의 형상이 내 안에 이루어지기까지 모든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는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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