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 5:15-6:6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임박한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입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그 백성 이스라엘의 관계를 주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호세아 2:7b절은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하며, 2:16절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주인)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그런데 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편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내에 대해 매우 신실하시며 사랑이 넘치시는 반면, 아내 되는 이스라엘은 음란하여 늘 그들의 하나님을 떠나서 행음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의 음란함을 나타내는 아주 적절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6:3절은 “새벽 빛과 같이, 그리고 시절을 따라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일정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애정은 마치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의 음란함과 우상숭배를 고치시기 위해서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그들을 통해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음란함을 고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히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여호와를 알라”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알다(know)” 또는 “지식(knowledge)”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3절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하며, 또 6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하십니다. 이 외에도 4:6절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시며, 5:4절에는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하시고, 또 4:1b은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을 아는 것” 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매우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 또는 “지식”이란 무엇일까요? 오늘날을 “지식의 시대” 또는 “정보의 시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식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에 한 설교에서 “진리 (truth)”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와 연관시켜 “지식”을 설명한다면, 지식이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저는 자주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두 권의 성경책을 갖고 있습니다. 한 권은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성경책이며, 다른 한 권은 내 마음 속에 펼쳐져 있는 성경책입니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성경책을 “진리”라고 한다면, 내 마음 속에 펼쳐져 있는 성경책은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를 따라 살지 않고, “지식”을 따라 살아갑니다. 곧 내 마음 속의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이 두 성경책이 서로 똑같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데, 내가 경험하고 얻은 지식은 “돈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데, 내가 경험하고 얻은 지식은 “시기하고, 질투하며, 경쟁하고, 이겨라”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성경책에 쓰여 있는 진리의 말씀을 많이 읽고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내 속 깊은 곳에 거하며 나의 삶을 다스리고 있는 “지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은 내 마음 속에 닦여져 있는 길(way)입니다. 어떤 사람의 지식이란 그 사람의 생활 속에서 배움과 경험을 통해 얻은 바 익숙하고 편한 길입니다. “아는 길”입니다.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길”입니다.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은 이렇게 “아는 길”을 새로 닦거나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 속에 있는 이 지식들 곧 닦여진 길들을 따라 걸으며, 살며, 그에 따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밤늦게까지 놀다가 늦잠을 자는 습관에 젖어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전자의 사람이 후자의 사람보다는 더 건강하고 건전한 생활을 할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지식을 “아는 길”로 표현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시편 1:1-2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기서 두 가지 “지식”이 대비되어 제시됩니다. 하나는 “악인의 꾀”이며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율법”입니다. 둘 다 지식 또는 지혜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악인의 꾀”를 “죄인의 길” 그리고 “오만한 자의 자리”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이 가끔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속에 아주 뿌리깊게 생활화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곧 그 사람의 “아는 길”이며, 그 사람에게 “편하고 즐거운 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지식”입니다. 물론 이 사람도 주일날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어려울 때는 성경책을 뒤적거리며 힘과 위로가 될만한 말씀도 읽고, YouTube에서 유명하다는 목사님들의 설교도 찾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 여호와의 율법은 “지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가 매일 걷는 “아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세 명의 형제가 있었습니다. 세 명은 모두 훌륭한 의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셋 중 특히 둘째와 셋째는 어려운 병을 잘 고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이 둘째와 셋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 세 형제 중 누가 가장 뛰어난 의사입니까? 그러자 둘째와 셋째는 이구동성으로 첫째 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첫째 형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들은 어려운 병을 잘 고치기로 유명한 반면, 당신들의 형한테는 그런 명성이 없지 않나요? 그러자 이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형이 돌보는 사람들은 아예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첫째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기 않게 건강한 생활을 하도록 잘 도와주었던 것 같습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함의가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전에 경영학의 “품질관리”에 관한 논문을 번역하면서 읽었던 이야기입니다. 품질관리가 아주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한 회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회사의 사장님이 그 회사의 물건을 구입하기를 원하는 중요한 고객을 만났습니다. 사장님은 자신의 회사가 얼마나 품질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생산품을 하나하나 철저히 검사해서 절대로 불량품이 납품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객은 이 철저한 검사과정을 별로 탐탁지 않아했습니다. 그리고는 사장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검사과정을 없애버리세요!” 사장님은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검사과정을 없애면 불량품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나요?” 그러자 고객이 말했습니다. “아예 불량품이 생기지 않도록 생산과정을 완전히 뜯어고치세요! 전혀 검사가 필요 없을 만큼 모든 점이 완벽해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 회사의 제품을 구입하겠습니다.”
위 두 이야기는 “지식”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그 지식을 바꾸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의사는 병을 치료하기에 앞서서 먼저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의사의 목적은 “치료”가 아니라 “건강”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건강한 삶을 위해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여러가지 “지식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이 그런 지식들을 배우고 연습하고 실천하여 그들에게 “아는 길,” “편하고 즐거운 길”이 되기까지 잘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실 의사로서 이런 일을 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으면 용한 의사로서의 명성도 누리지 못할 것이고 수입도 많이 줄어들 것이니까요. 더군다나 병을 치료하는 것은 그냥 진료실에 앉아서 오는 (병에 걸려 겸손해진) 환자들을 진료하고 보내면 되지만, “건강을 위한 지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돕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야 하며, 먹고 입고 자고 일하는 것을 포함하여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다 관찰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또 많은 (아직 병에 걸리지 않아 교만한) 사람들은 의사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건강하지 않은 생활습관을 고집할 것입니다. 이 모든 희생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건강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그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는 정말 사람들을 사랑하는 의사이며, 가장 훌륭한 의사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훌륭한 의사는 “건강의 지식”이 사람들의 일상의 삶 속에 “아는 길”로 깊이 자리를 잡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품질관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회사 사장님은 엄격한 검사과정을 자랑했지만 사실 생산품의 품질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재료 자체를 포함하여, 그 재료를 준비하고 투입하여 완제품이 나오기까지 거치는 수많은 공정들과 작업자들의 손길 하나하나가 모여서 그 제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검사과정에서 아무런 결함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떤 결함은 보이지 않게 숨어있을 수 있으며, 어떤 결함은 1년 후에나 나타날 수 있고, 어떤 결함은 “결함”은 아니지만 마음에 쏙 들지 않는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결함들은 물건을 다 만든 후 마지막 검사를 철저히 한다고 해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공정 전체가 완벽해야 하며 작업자들의 손길에 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품질의 지식”이 모든 과정과 사람 속에 깊이 스며들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서 3:5,6절 말씀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 말씀은 “모든 일에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라 (acknowledge)”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인정하다”라는 말은 오늘 본문의 “여호와를 알자”에 나오는 “알다”와 같은 동사(‘Yada’)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라”는 말은 “모든 일에 여호와를 알라” 또는 “모든 일을 네 생각대로 하지 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어려울 때는 성경책을 뒤적거리며 힘과 위로가 될만한 말씀도 읽고, 또 YouTube에서 유명하다는 목사님들의 설교도 찾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전혀 유익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떤 면에서 보면, 평소에는 건강의 지식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용한 의사를 찾아 다니는 병자와 같습니다. 또 생산 공정에서는 품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물건을 함부로 만든 후 맨 나중에서야 불량품을 찾아내기에 급급한 공장과 같습니다. 실상 용한 의사는 건강에 독이 될 수 있고, 철저한 품질검사는 오히려 품질에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셨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성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과 함께 사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친히 “생명의 길과 지식”이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음란”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마음 밖에 세워두고,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우상을 좇고 음행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과 거룩한 성전이 자신들을 늘 보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음란한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혀 낯설고 불편한 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5:4).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만가지 율법이 그들에게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8:12). 하나님께서는 하는 수 없이 이들이 병이 들고 상처가 나기까지, 그래서 고통 중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신실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3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증거하지만 반대로 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어려운지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심은 마치 아침에 해가 떠오르듯이, 계절을 따라 비가 내리듯이 그렇게 일정하며 변함이 없습니다. 의사 형제들 중 둘째와 셋째는 어려운 병을 고치는 명성이 있었지만, 첫째는 그런 명성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평소에 사람들의 건강을 너무나 신실하게 챙겨서 그들이 병들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늘 건강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 의사가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를 잘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신실한 사랑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곧 잊어버리고, 모르게 되며, 심지어 다른 사랑을 좇아 연애하며 음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보시며 심히 절망하시며 외치셨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신실하신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며, 그 안에 항상 거하는 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남편”이라고 소개하시며, 다시는 바알(주인)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을 “바알(주인)”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위에 군림하며, 명령하며, 책망하는 무서운 지배자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아침 햇살처럼 따스하시고, 시절을 좇아 내리는 단 비와 같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곧 우리가 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떠나 음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 주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율법들이 이해가 됩니다. 그것들이 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들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 말씀들이 우리의 매일의 삶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생명의 지식”이 됩니다.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며,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합니다. 심지어 주님을 더 깊이 알고자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빌립보서 3:8). 내 생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 하나님의 진리가 스며들기까지 우리가 그 사랑의 말씀에 푸~욱 잠기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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