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16-2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5. 5. 03:46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16-26

 

오늘은 성령의 열매 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 특히 신약 성경에는 열매 관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마태복음 7:16-2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길지만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요한복음 15: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안에 내가  안에 있으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없음이라.”  말씀들을 보면 열매의 중요성을   있습니다. 과연 나무의 가치는  열매에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라면  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특히  나무를 키우는 농부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5: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 하십니다.  말씀에서처럼 하나님께서는 좋은 열매를 얻고자 일하시는 농부이십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좋은 열매 가치를 더욱 실감할  있습니다. 반대로 나쁜 열매 못된 나무 장차 겪어야  고통도 예감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열매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가 무엇이며,   열매를 어떻게 맺을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 대해 말씀합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육체의 욕심 그리고 육체의  대조시켜 설명합니다. 16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욕심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 그렇게 나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기서 이룬다 말은 영어 성경에는“gratify” 또는 “carry out”으로 번역되어 있고, 성경 원문에는 “teleo”라는 그리스어 동사로 표현됩니다.  단어는 일을 수행하여 끝내다,” “과정의 끝에 이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체의 욕심을 이룬다라는 말은 육체의 소원을 성취하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서  결국에 이르다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결국 성령의 열매 맺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듯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때도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도 열매라면 열매일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멸망이며 죽음입니다. 로마서 7:5 말씀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갈라디아서 6: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죽음을 가져올까요? 육체의 욕심은 암세포 매우 비슷합니다. 암은 세포의 비정상적인 증식으로 인해 생기는 병입니다. 정상 세포와 암세포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가지를 들자면, 첫째로 정상 세포는어느 정도 증식을 하다가 일정한 수에 이르면 증식을 멈추지만, 암세포는 무한하게 증식합니다.  정상 세포는 신체 내에서 자신에게 정해진 특정 부위 안에 머물러 있지만, 암세포는 이런 경계를 무시하고 다른 부위들로 전이됩니다. 정상 세포는 세포에게 주어진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암세포에는 이런 역할이 없습니다. 정상 세포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소멸하지만 암세포는 죽지도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정상 세포는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수를 유지하며, 정해진 기간 동안, 정해진 일을 합니다. 간세포는 간에 머물며 간에게 맡겨진 일을 하고, 폐세포는 폐에 머물며 폐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암세포는 하는 일도 없이  몸을 돌아다니며 무한하게 번식하고 무한하게 생존합니다. 사실 세포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정상 세포보다는 암세포가  성공적이고 행복해 보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과 행복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암세포가 이렇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격렬하게 번식하며 무위도식할   결국은 죽음입니다. 몸도 죽고 세포 자신도 죽게 됩니다. 아무런 열매도 맺을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욕심이 이루어진 입니다. 

 

앞에서 암세포와 정상세포의 다른 점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런 차이들은  생기는 것일까요? 정상 세포는 소통(communication)” 통제(control)” 유지하는 반면, 암세포는 이런 소통과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정상 세포는  안에  세포의 활동을 지휘하는 지휘소가 있어서 그것의 통제 하에 활동하며  다른 세포들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합니다.  세포가 지휘소를 따로 갖고 있지만  지휘소가 운용하는 코드가  전체의 세포들 사이에  똑같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의 지휘소  전체를 통제한다고   있습니다.  지휘소의 명령에 따라서  안에 있는 모든 정상 세포들은 하나의 온전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암세포는 이런 통제를 따르지 않습니다. 암세포는 지휘소의 통일된 지시를 따르는 대신, 변형된 코드를 갖고 독자적으로 행동합니다. 따라서 통제가 되지 않으며 다른 세포들과 유기적으로 협력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의 삶도 정상적인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삶은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삶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본문의 17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둘이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에 따르면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함께   없습니다. 이는 서로 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가지 소욕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를 버리고 저를 택하든지, 저를 버리고 이를 택하든지 해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 관하여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OO하는 것이 죄가 되나요?” 제가 젊었을  다니던 교회에서는 주초 문제  신자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죄인가에 대해서 교회 목사님과 일부 신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습니다.  기억에 목사님이 이런 일들을 문제 삼으신 것은 아닌데  담배를 즐기는 사람들이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면죄부 같은 것을 기대하며 자꾸 질문을 했던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 자체가 그들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OO하는 것이 죄가 되나요?”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마음 속에 “OO하는 것이 죄가 되나요?” 라는 의문이 생긴다는 것은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대신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나의 가는 길이 하나님과 상관 없이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끊임 없이 양심을 마비시키고, 욕심의 한계를 넓히며,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 합니다.  말씀에서 소욕 영어로는“desire,” “passion” 등으로 번역되는데,  본래의 뜻은 “set the heart upon something”  어떤 것을 향하여 마음을 고정시키다입니다.  본래의 의미를 생각하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함께   없는지를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갈구하는 목표를 말하며 우리가 힘써 나아가는 방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  방향으로 또는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서 동시에 나아갈  없습니다. 만일  가지를 동시에 좇고자 한다면  사이에 끼어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며,  곳을 향해서 나아갈 것이면 다른 곳은 포기하고 그것에서 멀어짐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이해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말씀합니다.  로마서 14:23절은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합니다.  말씀들은 우리의  전체와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향으로 힘써 나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지 않은   방향과 목표 하나님과 그의 영광이 아닌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필요가 있습니다.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교는학사 관리가 엄격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학생들의 수업 출석을 항상 체크했는데, 예를 들어, 일주일에 3시간 수업이 있는과목의 경우, 학기  6시간까지 결석을 허용했습니다. 만약 7시간 이상 수업을 빠지는 경우,  학생은 해당 과목에 대해 F학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제도를 만든 목적은 물론 학생들이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것을 달리 생각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 6시간까지는 결석을 해도 되는구나!” 이런 학생들에게  규정은 그것의 원래 목적과는반대로 결석을 장려하는 제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수업에 충실한 학생에게는  규정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번의 결석도  손해로 생각하고,  어쩔  없이 수업을 빠져야  경우 교수님께 죄송한 마음에 미리 찾아가 양해를 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번의 결석을 용서해주는 것에도 고마워할 것입니다. 그에게   의미도 없고 상관도 없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수업을 통해 최선의 열매 맺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도를 틈타서 결석을 즐기는 학생에게는  법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자신이   결석했는지, 앞으로      있는지를 계산할 것입니다. 그래서   법을 의식하고 것입니다.  결석을 눈감아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리로 여기고, 법을 지키고 있는 자신을 자랑할 것입니다. 로마서 7:8절에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 말씀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를 두고  말씀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9:6절에 예수님께서 혼인한 부부에 대해 이제 둘이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자, 이를 들은 바리새인들이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의 목적은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혹시 그런 일이 있더라도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있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의 악한 고집에 하나님께서   양보하셔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법을 하나님의 이혼 허가 생각했습니다. 이혼 증서를 써주기만 하면 언제든지 아내를 버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법을  것이 아니라 육체의 정욕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정욕을 이룰 기회로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실 때에도,  법을 들어  말씀을 반박했습니다. 이들은 법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법으로부터 아주 멀리 벗어나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없습니다.

 

본문의 19-21절에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취함과 방탕함과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사도 바울이 열거하고 있는 육체의 일들은 참담합니다. “어둠 자체입니다. 사도 바울이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도 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육체가  사람이 피할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는 성경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있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는 안토니 가우디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 건축 중에 있습니다.  성당에는 예수 그리스도 타우어(Jesus Christ Tower)라는 높은 탑이 있는데 사람들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바르셀로나 도시를 내려다볼  있다고합니다. 건축 책임자가 인터뷰에서  탑에 관해 말하기를  탑은 바르셀로나 시의 모든 건축물  가장 높으며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느껴보고자  탑을 설계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아마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으로 생각했던  같습니다. 우리들 대부분도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매우 다르게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2:5-8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놀랍게도 높아지는 마음 아니고 낮아지는 마음입니다. 조금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을 비우시고 하나님께 복종하신 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신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삶과 반대되는 삶을 말합니다. “오직 나로 충만하며 하나님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26절의 권고의 말씀이 이런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어다.” 심지어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 이런 육체의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고자 경쟁하고 시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타이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대인들이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러할진대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육신적이고, 악하고, 더럽습니다. 사도 바울이 열거한 육체의 일은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다만 우리가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육체의 욕심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박고 (24),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는 얘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이해하고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앞에서 정상세포와 암세포의 차이점에 관하여 소통과 통제 말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하시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내가  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비유로 얘기하자면, 여기 노트북 컴퓨터가 있습니다 (사람을 컴퓨터로 비유하는것이 내키지 않지만 달리 마땅한 비유가 없네요). 컴퓨터 자체로는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컴퓨터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전력(power) 신호(signal)가 필요합니다. 컴퓨터가 전원에 연결되고  인터넷에 연결되면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수없이 많은 일들을   있습니다. 이러한 연결이 없이 고립된 컴퓨터라면 다만 플라스틱과 쇠와 구리   가지 물질들(육체) 이루어진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못을 박거나 뜨거운 그릇을 올려놓는 받침대로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거의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그저 단백질 덩어리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덩어리를 단련시켜 강하게 하기도 하고 예쁘게 치장도 하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일 뿐입니다. 썩어짐과 죽음을 피할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연결되어야만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며 그런 삶을  수가 있습니다.

 

컴퓨터에는 전원을 연결하고 인터넷을 연결하기 위한 단자들이 있습니다.  단자들은 말하자면 전력과 신호가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는 (door) 같은 것입니다.  문들이 존재하고  열려 있어야만 비로소  컴퓨터 속으로 전기와 신호가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도 하나님의 영과 소통하기 위한 연결 단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과 선한 양심입니다. 디모데전서 1:19절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하며, 디모데전서 3:9절은 감독의 자격으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들고 있습니다. 믿음과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도록 해주는 영적 감각 기관들입니다.  감각 기관이 건강하게 제대로 기능하면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고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나도 함께 미워합니다. 말하자면 믿음과 선한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 쫓겨다니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어느  그에게 원수 사울을 죽일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을 베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기 사람들로부터 사울을 보호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사무엘상 24:6). 그는 하나님의 뜻에 매우 예민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졌습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울을 살려준  다윗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사이에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사무엘상 24:12).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사무엘상 24:15). 다윗은 비록 죽은 처럼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는 신세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기 손으로 피를 흘려 원수를 갚는 대신 선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사람이요 (사도행전 13:22),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한 자요 (사무엘상16:13),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자였습니다 (사무엘상 16:18).

 

사도 바울은 22절에 성령의 열매를 하나하나 열거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보여주신 자신의 모습입니다. 한자 성어로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란 말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악하게 되고 착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열매 맺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의의 열매이며 생명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귀히 여기시며 영생하도록 보전하시는 열매입니다. 농부가 추수 때를 바라며 일하듯이, 우리 매일의 삶은  열매를 기대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몸부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열매 맺는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