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그리스도 안에서 (에베소서 1:1-23)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6. 19. 05:49

그리스도 안에서

 

에베소서 1:1-23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제목으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먼저 3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하고, 또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6절, 7절, 9절, 10절, 12절, 13절, 15절 등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이 본문 말씀 뿐 아니라 특히 바울 서신들에서와 복음서들 중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신실하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5:4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가장 함축적으로 설명한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우리는 가장 먼저 신실한 신앙생활을 떠올릴 것입니다. 꾸준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주일 예배를 지키고,믿는 자에 걸맞는 경건한 삶을 사는 것 등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위한 노력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런 노력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도 “내가 무엇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할 때, 더 중요한 포인트는 “거한다”는 행위보다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세계, 곧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그 공간입니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속하여 그 안에서 살고 있으며, 당연히 우리 각자의 삶은 내가 머물고 있는 그 세상에 의해 지배되고 결정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실상 “그리스도 밖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다면 그것처럼 황망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개인들은 그들 각각이 살고 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농부는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 등 나름대로의 철학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에게 자신의 논밭을 떠난 밖의 세계는 그저 “컴컴한 어둠의 공간”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다 넓은 세상에서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좁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개인들은 이렇게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삶을 살아갑니다. 오직 그 안에만 빛이 있고, 그 밖은 어둠이고 죽음입니다. 그래서 좀처럼 그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습성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창세기 12:1-3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브람에게 있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은 그의 삶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세계였습니다. 그 세계는 아브람에게 빛이며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세계를 완전히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이 자신이 살아왔던 그 안전하고 편안한 세계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았겠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을 축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첫번째 조건은 그가 자신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땅은 어디일까요? 그곳은 일차적으로 “가나안 땅”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땅 한 뙈기 없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8-10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또 15-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곳은 “하늘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기초를 닦으시고 세우시고 경영하시는 성”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비록 세상에서 평생 나그네로 살았지만 그는 믿음으로 이 하나님의 성을 멀리서 바라보고 이를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몸은 땅에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아브라함이 사는 세계였습니다. 그가 거하는 “영원한 집”이었습니다. 그의 “더 나은 본향”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참된 구원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골로새서 1:13절 말씀입니다.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또 베드로전서 2: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살아왔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은 그의 삶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편안하고 익숙한 세계였지만 실상 그곳은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는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여호수아 24:2-3절에서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를 우상 숭배의 죄와 어둠속에서 이끌어 내셔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 또한 흑암의 권세 아래 있다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 그 기이한 빛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완전히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우리가 새롭게 정착한 나라요 세상입니다. 그곳은 모든 점에서 우리가 전에 살던 “어두운 데”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어떻게 다른지에 관해 오늘 말씀을 통해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주십니다. 이 복은 땅에 속한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며 신령한 것 곧 영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여전히 땅에 속해 있으며 육체적인 것들만을 찾고 원한다면 우리는 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 것입니다. 그것들의 가치를 모르며 따라서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 (Fall)”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 죄를 지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타락은 “인간이 육체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7:3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또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육체가 된 사람들과 그들이 모여 사는 세상” 자체가 온전히 악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는 어두운 땅입니다.

 

“영적 (spiritual)”이라는 말에 대해 우리는 자주 보이지 않는 영들이나 또는 우리의 깊은 속 마음을 가리키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적 세계는 실재하는 세상이며, 사실을 말하자면 오직 “영적 세계”만이 실재하는 세상입니다. 영적 세계가 본래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인 반면, 우리가 보고 만지며 살고 있는 이 물질 세계는 하나님께서 육체를 가진 사람들과 동식물들을 위해 특별히 설계하여 만드신 “유한한 공간”이며, 영적 세계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63빌딩 안에 물고기들을 위해 특별히 조성된 수족관과 같습니다. 63빌딩 전체를 영적 세계라고 한다면, 그 안에 육체를 가진 사람과 동식물들이 살아가기 위해 특별하게 가꾸어진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 세계입니다. 영적 세계의 본질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계시며 다스리시는 세계가 바로 영적 세계이며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임금이시기 때문에, 이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God-centered) 돌아갑니다. 곧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사단 마귀조차 하나님 앞에 서며 그의 말을 듣습니다 (욥기 1장). 따라서 우리가 “영적이다”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적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는 것은 육적인 것도 영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다스리심 밖에 있는 것은 “영적”으로 보일지라도 육적인 것입니다. 육적이란 간단히 말해서 자기 중심적(self-centered)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질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자랑할 수 있어서 실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이사야서 40:6-8절 말씀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이 말씀에서와 같이 육체와 그 모든 아름다움은 마르고 시들어 사라집니다. 그런데 매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썩지도, 마르지도, 시들지도 않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복들을 다 알고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복”인지를 깨닫기도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동시에 여전히 육체 가운데 있으며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위에 인용한 이사야서 말씀은 이런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위 말씀에 따르면 “여호와의 기운”이 불 때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듦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선다고 말씀합니다. 사실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영적인 삶입니다. 우리 안에 “여호와의 기운” 곧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하시고 운행하십니다. 이 기운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체는 마르고 시들며 대신 우리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나며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요로운”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불기둥/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육신적인 본성은 태워지고 영적인 하나님의 군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개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심겨 있지만 또 세상의 소망도 함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 요한복음 15:7),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 그의 말씀만이 성장하고 세워지며 다른 육체의 욕심들은 점점 마르고 시들어 버립니다. 육체의 소망이 끊어질 때 우리가 잠시 절망할 수 있지만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채우시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축복을 받는 것은 “나의 육체”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그의 아들이요 딸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4-5절). 이것과 비견되는 다른 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복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만 일어나고 발견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본문의 4절 말씀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또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이 두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대해서 가지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시간적 스케일”을 잘 보여줍니다. 이 계획은 창세 전에 시작하여 장차 완전히 이루어지며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이 하나님의 시간적 스케일은 참으로 웅장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 “영원한 계획” 속에 처음부터 내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변함도, 쇠함도, 죽음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진행되고 온전히 이루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비해 육체가 된 사람의 시간은 어떨까요? 사람의 시간은 “순간”이며 “지금”입니다. 시편 90:10절 말씀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또 9절에는 “우리의 평생이 일식(한번의 한숨) 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육체가 된 우리에게 덧없이 짧은 생애가 슬픔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장래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지금”을 위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된 인간은 옛날 일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지도 못합니다. 늘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며, 오직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에만 만족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오직 현재의 삶에 목을 매는 사람 사이에는 늘 메울 수 없는 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일을 마치시고 돌아가실 때가 되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누가복음 19:11),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힘없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시자 이를 본 사람들은 실망하여 예수님을 미워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부활하신 예수님께 채근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사도행전 1:6)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합니다. 이는 우리가 늘 앞뒤가 없는 “현재”에 갇혀있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와는 너무 다르게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시간을 충분히 쓰십니다.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작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데 걸린 시간이 약 100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할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이 약속 또한 3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죽은 듯이 보냈습니다. 시간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렇게 긴 나날들을 마냥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얼마나 많은 인내와 믿음의 씨름을 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진행하십니다. 절대로 서두르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시간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농사짓는 농부에게 계절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씨를 뿌리시고, 키우시고, 영생의 열매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작업장입니다. 예수님 밖에서 육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그저 “늙어서 죽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싫어하며, 젊음과 “동안”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시간이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작업장”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을 보자면, 대부분의 비유들이 오랜 기다림의 시간과 마지막에 있을 일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그렇고, 더하여 가라지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포도원 품꾼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비유들은 공통적으로 장래 일에 대해서 말하며 우리가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한 지혜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앞길을 환히 밝히는 빛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높은 곳에서 밝게 빛을 발하시며 우리를 영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현재”라는 시간에 갇혀서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는 비참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저 멀리 보이는 영원한 영광의 소망을 향해 매일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의미 있는 시간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사는 시간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을 언급하는 말씀들이 자주 나옵니다. 9절에는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다고 하며, 또 이 뜻이 “그의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11절에도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일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고, 그 뜻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고, 또 죽기까지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육체가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여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의 뜻은“악한 육체의 정욕”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모든 계획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조차 십자가를 지시려는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다가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태복음 16:23). 많은 고난과 죽음을 당하실 예수님의 길을 막는 것은 베드로에게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각이 사단과 마찬가지로 악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각한다”에 해당하는 말은 “마음의 중심에 두다,” “즐겁게 음미하다,” “기뻐하다” 등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오롯이 하나님의 뜻만을 그 마음에 두시고 이를 기뻐하셨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안의 세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변화되고, 그 뜻에 민감해지도록 훈련받는 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믿는 자들이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골로새서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 또 로마서 12:2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자신의 정욕을 회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며, 또 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고 섬기지 않으며, 심지어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 세워지고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곳에서 “내 뜻”을 고집하고 그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과 다투게 되며 결국 하나님을 미워하고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마음을 합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원수”가 되어 어둠과 두려움 가운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갖 축복을 누리는 방법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내 삶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사실 내 뜻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셔야 했습니다. 아브라함 또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절대적인 순종”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항상 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부끄러운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지만, 예수님께는 이것이야말로“생명과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하늘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앞에 인용한 로마서 12:2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시다”고 서술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사랑 안에서” (4절), “그 기쁘심을 따라” (9절) 등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그 뜻은 선하며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 됩니다. 또한 그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나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9),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10)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의 제자가 되는 첫째 조건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 또 누가복음 14:26절에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얼마나 철저히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소망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계획은 만물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시며 또 만물을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인 21-23절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로부터 불려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세상으로부터 불려나와 결국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향하여 인도되는 순례의 길을 걷습니다. 이것은 우리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최종 목적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같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곧 예수님을 바라고, 그리워하여, 예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인생의 소망으로 삼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 어떤 “소망”을 품고 삽니다. 그는 늘 이 소망을 멀리서 바라보며, 그것을 향해 나아갑니다. 때로는 그것을 잠시 포기해야 하거나 또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 소망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소망”이야말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며 내 삶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소망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립보서 3:7-9a). 이 고백에서 나오는 바 사도 바울의 예수님께 대한 진심은 참으로 순전하고 간절합니다. 그의 일생은 예수님을 향한 경주였습니다. 예수님을 얻고 또 예수님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고 예수님 안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궁극적인 소망이었습니다. 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소망 때문에 바울은 예수님 밖으로 벗어날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마음 깊은 속에 예수님이 아닌 어떤 다른 소망 곧 “딴 생각”을 품고 있다면, 언젠가 예수님을 떠나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9:27절에서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여쭙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의 말대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베드로가 좇는 궁극적인 소망이 아니며,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다른 무엇을 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보다 더 좋은 무엇이 그의 생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꿈꾸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이것이 또한 베드로의 소망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베드로 또한 예수님의 측근으로서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믿는 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할 것이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12, 요한계시록 5:10 등).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고 왕이 되시는 대신 힘없이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베드로의 소망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다시 예전의 물고기 잡는 어부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잠시이긴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 따르기를 그만두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는 그가 “딴 생각” 곧 세상 소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소망하는 것은 세상의 다른 소망과 어떻게 다를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전자는 “산 소망”이며 후자는 “거짓 소망”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마음에 품었던 꿈은 “세상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는 대신 죽음으로 길로 내려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죽음의 두려움”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을 따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옛날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죽음에서 구원하시며, 사단 마귀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과 사단 마귀를 정복하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믿는 자들은 이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 하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이 “왕노릇”과 관련된 말씀들은 자주 “죽음”과 함께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후서 2:11-1a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요한계시록 5:10-11절에는 “일찍 죽음을 당하신” 어린 양께서 그 피로 사신 사람들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저희로 왕노릇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한 그의 경주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 (빌립보서 3:10-11). 이 말씀들이 공통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대하여 갖는 소망이 “죽음” 너머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죽음을 밟고 일어나 부활하는 소망입니다. 이 점에서 이것이 세상 소망과 다른 “산 소망”입니다. 말 그대로 “세세토록 왕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거기에는 우리를 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담대하게 따라 걷는 것입니다. 이 소망 이외의 다른 소망들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 우리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거짓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 안에”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그 세계를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 안의 세계는 “육체가 된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그 곳은 영적인 세계이며, 영원한 세계이며, 하나님의 뜻이 다스리는 세계이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세계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3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모든” 복이라고 합니다. 모든 면에서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축복하심에 온전하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복을 받아 누려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마태복음 9:17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구분하십니다. 곧 포도주와 그것을 담는 부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포인트는 “포도주”가 아니고 “부대”입니다. 새 포도주는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포도주를 담기 위한 “새 부대”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으면 결국 부대도 터지고 포도주도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를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새 부대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대는 그 축복을 받아 담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따라 이 새로운 축복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선하신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육체가 되어 하루하루를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자연인”은 받을 수도 담을 수도 없으며, 심지어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새로운 축복을 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새 부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 부대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안에 살면서 주님을 따라 예수님 중심의 세계관, 역사관, 인간관, 가치관, 구원관, 행복관 등을 배우는 것입니다.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새 그릇으로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쏟아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내 안에 담기며 그것이 내게 진정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이 복을 누리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