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 (마태복음 1:18-25)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1. 12. 20. 04:59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

 

마태복음 1:18-25

 

이제 크리스마스가 됩니다. 크리스마스는 참으로 특이한 계절입니다. 한편으로는 들뜬 기분으로 내리는 거리를 쏘다니고 싶은 즐거운 계절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조용히 밖을 내다보며 나만의 생각에 잠기고 싶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고요한 거룩한 찬양이 참으로 어울리는 평화로운 계절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듯 잔잔하고 평화로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일을 싱거울 정도로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8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예수님의 탄생은 성경에 기록된 많은 기적들(miracles) 특히 의미 있고 중요한 기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사실 기적이 일어난 밤은 고요한 거룩한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며,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아기를 낳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편으로는 있을 없는 일이며, 다른 편으로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태어나셨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없이 많은 아기들과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조용하고 평화롭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나심 관한 설명이지만, 우리는 본문에서 사람의 주인공을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본문 말씀에 따르면,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청년이었습니다. 20절에서 주의 사자는 요셉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부릅니다.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이었습니다. 19절에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가 어떤 점에서 의로운 사람일까요? 요셉은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을 알았을 저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했습니다. 요셉은 아마도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진 것으로 생각했던 같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의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여자가 혼자서 아기를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요셉은 일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마리아와의 혼인관계를 끊고자 했습니다. 정혼자에게 배신 당한 아픔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20절에 일을 생각할 때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도 요셉은 며칠 아무것도 하지 못한 끙끙 앓으며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같습니다. 결국 요셉은 자신의 상처보다도 문제가 드러났을 마리아가 겪게 어려움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용서하고 덮어주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숨이 막히는 긴박한 순간이 아닐 없습니다. 만약 요셉이 성급하고, 이기적이고, 성격이 같은 사람이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는 아마도 분을 참지 못하고, 마리아를 끌어다 동네 사람들 앞에 세워 창피를 주고, 그녀와 간음한 남자가 누구인지 이름을 대라고 윽박을 질렀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 찍히고 생명을 보전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의 몸을 통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요셉은 성급하지도, 이기적이지도, 성격이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몹시 아픈 중에도 조용히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점에서 그는 예수님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는 참으로 다윗 왕의 후손다우며, 예수님의 아버지가 될만한 그릇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요셉의 다른 의로움을 있습니다. 이는 그가 천사의 증거를 받고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20 말씀입니다. “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것이라.” 천사는 마리아가 성령으로잉태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나이가 들었거나 태가 닫혀 아기를 갖지 못하다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므로 잉태하게 여자들의 이야기들이 여럿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창세기 21:1-3), 이삭의 아내 리브가 (창세기 25:21), 엘가나의 아내이며 선지자 사무엘의 모친인 한나 (사무엘상 1:20, 2:21), 마노아의 아내이며 삼손의 모친 (사사기 13:24), 사가랴의 아내이며 세례 요한의 모친인 엘리사벳 (1:24) 등입니다. 하지만 처녀 잉태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한 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상과 사람을 지으신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많이, 신비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이해와 지식으로는 담을 없는 믿음의 영역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요셉은 그가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소박한 가정 꿈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시는 일에 자신과 사랑하는 아내의 삶을 드려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주님 저는 창세 이래로 처녀가 잉태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필 저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일에 상관하지 싶지 않으니 저를 혼자 내버려 두세요!” 하면서, 천사의 말을 거부할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나아가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를 데려오고, 천사가 지시한 대로 아기의 이름을 예수 이름하였습니다. “예수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God Is Salvation)” 또는 구원자(Savior)”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해 , 우리가 고요한 거룩한 성탄 찬송을 마음껏 부를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요셉의 덕이 큽니다. 이는 그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착한 마음을 가졌으며, 하나님께 대하여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고 축복된 삶을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신명기 29:29 말씀입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라.” 말씀은 모세가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말씀에서 모세는 오묘한 일이 우리 하나님께 속하였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없는 일들을 많이 하십니다. 일들을 하시는 방법이나 능력도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며, 일들을 하시는 이유 또한 설명할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일도 참으로 하나님의 신비라고 하지 않을 없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탄생하시며,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일들은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서 하신 오묘한 일들이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들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들이 우리에게 계시된 그대로믿고 받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바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오고 아들에게 천사가 이름을 붙인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요셉이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마리아를 통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냥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상상의 존재이며, 그의 삶은 상식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머리로 이해하고 납득할 있는 방식으로 행복을 찾으며 평범한 삶을 꾸려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께 속한 오묘한 일들 그의 삶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들을 편하게 하실 있도록 그의 삶을 내어드렸습니다. 그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평화로이 임하시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를 입게 것입니다.

 

천사의 말에 따르면, 마리아의 몸에서 아기로 인해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23).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육체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예수님께 합당합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이름이 마땅히 주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2절에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라도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확신했습니다. 누가복음 11:20절에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는 자신의 일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말씀들을 통해서 , 예수님의 임마누엘되심은 단순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뜻을 넘어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땅에 임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통해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앞에 인용한 모세의 말을 빌면, 예수님은 나타난 우리가 따라야 말씀 되십니다. 예수님의 삶의 길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인들을 섬기신 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으시고 오롯이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기뻐하시고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수없이 많은 오묘한 일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오묘한 일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모델이 되십니다. 사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요셉의 삶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있습니다. 그는 어쩌다 보니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땅에 보내시는 거대한 역사의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는 조용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내 마리아를 섬기는 걸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행하였을 ,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일이 고요하고 평화롭게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오묘한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들의 오감으로 지각하고, 삶으로 경험하고, 지식으로 이해할 있는 것들만을 인정하고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물론 그가 아내 마리아와 이룰 가정을 위해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마리아를 통해 크고 신비한 일들을 하셨습니다. 짧은 오늘 본문 안에서도 우리는 그런 일들을 많이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신 ,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 아들이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신 ,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등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혼인 예식과 신혼 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남 선녀가 이룬 가정은 참으로 아름답고 복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오묘한 일이 안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복을 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신앙 생활이 오직 우리가 지각하고, 경험하고, 이해할 있는 세계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시는, 우리가 이해할 없는, 오묘한 일들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둠 속에 갇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여기는 상식의 세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 (베드로전서 2:9) 속으로 들어갈 없기 때문입니다.

 

왼쪽 그림은 미국항공우주국 (NASA) 제공한 Hubble Ultra-Deep Field(HUDF)라는 이미지입니다. 이미지는 2004년에 허블 우주 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 이용하여 얻은 것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밝은 점들은 별들이 아니고 각각이 수천억 개의 별들로 이루어진 운하(galaxy)들입니다. 사진 안에 포착된 운하들의 수가 10,000여개가 된다고 합니다. 맑은 밤하늘을 보면 없이 많은 별들을 있습니다. 과거에 천문학자들은 망원경을 이용하여 주로 이렇게 하늘에 있는 별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의 움직임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우주의 깊은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의 사진의 이름에 “Ultra-deep”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은 망원경의 초점을, 보이는 별들에 맞추는 대신, 별이 전혀 떠있지 않은 아주 깊고 어두운 공간에 맞추었습니다. 그것은 방대한 하늘 공간 새끼 손톱으로 가릴 있는 매우 작은 틈새였습니다. 이들은 허블 망원경을 작은 어둠 공간에 고정시키고 수개월 동안 관측하고 데이터를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얻은 이미지가 바로 위에 보이는 것입니다. 작고 어두운 틈으로 10,000여개가 넘는 운하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심지어 후에 좋은 장비를 이용하여 같은 공간에서 많은 운하들을 찾아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둡고 우주 공간도 사실은 헤아릴 없이 많은 별들로 가득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보고 우주의 방대함 크게 놀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에 비해 한없이 작고 미미한 자신들을 보면서 깊은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대하는 태도가 천문학자들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편 19:1). 그는 하늘에 떠서 운행하며 빛을 비추는 해와 달과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신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따라 열심히 일하고, 열매를 즐기며, 행복을 누립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어둠 비밀 초점을 맞춥니다. 이들은 깊은 속을 알기를 원하며, 놀라운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마가복음 8:11).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알면 알수록, 그리고, 보면 볼수록 깊은 어둠과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표적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6: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요나 1:1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오묘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주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오묘한 일을 마음에 담지 않고, 그냥 보이는 상식의 세계에 머물러 살고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보이신 일들을 인하여 영광을 찬양하는 대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비밀 더듬어 찾으며 깊은 지식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앞으로도 좋은 성능의 망원경을 개발하여, 깊은 우주 속을 관찰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을 자랑하며 이름을 높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되고자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지혜롭게 되기는 커녕 오히려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눈을 뜨게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4:5-6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빛이시며 영광이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뻐 찬양하며, 주님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빛을 찾아 어둠 속을 헤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기이한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은 되신 예수님의 종이 되어 죄의 어둠 속에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에게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를 이웃과 함께 나누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