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삶
사무엘상 18-20
크리스천의 삶을 여러가지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 중 하나는 “세상을 이기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 중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b).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이기셨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요한1서 5:4-5절 말씀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는 이 싸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겼을 때 얻는 전리품은 무엇인가? 저는 오늘 설교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이기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두 가지를 얘기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겸손히 행하며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내하며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둘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과 다윗은 세상을 이기는 삶의 두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겸손히 행하며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인내하며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반대로 사울은 교만히 행하여 모든 일에 자기를 앞세웠으며, 분노와 미움의 종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악을 행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성경의 본문인 사무엘상 18-20장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과 또 새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 사이에 일어난 여러가지 일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고 그 명령을 순종하는 대신 자신의 욕심과 두려움에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인 (사무엘상 13:14) 다윗을 새 왕으로 부르셨습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바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여전히 사울이었으며, 다윗은 이런 사울 왕의 신하들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사울의 권세에 비하면 다윗은 그 앞에서 “죽은 개”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사울이 전혀 넘을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6:13). 하지만 사울에게서는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대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신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16:14). 쉽게 말해서, 다윗은 성령이 충만한 자였으며, 사울은 악령의 괴롭힘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습니다.
다윗과 사울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지만, 사실 다윗이 싸우는 싸움과 사울이 싸우는 싸움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적”으로 여기고 그를 죽이기 위한 육적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싸운 싸움은 무엇일까요? 다윗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이기는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여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등불처럼 빛나시며,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도록 애쓰는 싸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의 싸움의 대상은 “다윗”이었지만, 다윗의 싸움의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고 그를 죽이는 싸움을 싸웠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삶 속에 살아계시도록 “죽기까지” 싸웠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이것은 매우 어려운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싸움은 “사랑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싸움에서 사울에 대해서 사용할 수 있는 아무런 “육체의 무기”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 대항하여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사울 앞에서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과 같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사무엘상 24:14).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손쉽게 쓰러뜨린 용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아무런 육체의 힘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은 이런 세상 사람들과 그들의 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사울 왕을 “나쁜 사람”으로 치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의 “거울”과 같은 존재입니다. 곧 사울 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속에 감추어진 세상적인 본성을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에게는 그의 인생이 어려움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두 번의 결정적인 계기(turning points)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아말렉의 모든 생명들 곧 사람들과 짐승들을 다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중에 아말렉 왕 아각과 또 “양과 소의 좋은 것들”을 남겨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떠나셨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사울 왕과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 여자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심히 불쾌하여 노하며 말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그리고 이 날 이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8:6-9).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다”는 말을 어떤 성경 번역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시기의 눈으로 보았다”고 말합니다. 사울의 시기심으로 인해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다윗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그의 대적이 되고, 사울의 마음은 다윗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욕심을 따라 행하다가 하나님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기심 때문에 다윗을 잃었습니다. 사울로 대표되는 세상의 죄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욕심과 시기심”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같은 왕으로 높이고, 자기 외에는 어떤 왕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죄입니다. 우리는 같은 죄를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심으로”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에게서, 그리고 “시기심으로”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크든 작든, 그리고 밝히 드러나든 은밀하게 숨어있든, 이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다른 죄들이 이것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왕”이었지만, 오늘 본문에 그려지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비참해서 오히려 불쌍할 지경입니다. 이런 사울의 모습은 가려진 세상의 “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심과 시기심을 따라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세상 사람들은 그만큼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매우 불행합니다. 그들은 불행한 삶을 살 뿐 아니라 더욱 비참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사울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욕심과 시기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불행한 모습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늘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했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18:12절에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그를 두려워한지라” 합니다. 또 15절에는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사울이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하며, 28-29절에는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다윗이 사울 왕을 두렵게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누리며, 사람들 가운데 지혜롭게 행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사울에게 큰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이사야 31:3절 말씀입니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고 그 영이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자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모든 권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부하에 불과한 다윗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입니다. 사울의 두려움은 영적 싸움의 실체를 잘 보여줍니다. 사울은 모든 권력을 가졌지만, 악령의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아무런 권력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사울은 늘 다윗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은 분노와 미움과 살인심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제 사울에게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의 마음은 다윗에 대한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푸는 유일한 길은 다윗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충성된 신하가 그의 “평생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수를 제거하는 것이 사울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여러 번 눈 앞에 있는 다윗에게 창을 던져 그를 직접 자기 손으로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런 일을 할 때는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릴 때였습니다 (사무엘상 18:10-11; 19:9-10). 심지어 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다윗을 사랑하며 변호하는 아들 요나단을 “패역 부도한 계집의 소생아!” 하며 모독하고 (20:30), 그에게 창을 던져 죽이려고 들었습니다 (20:33). 또 다윗을 죽이기 위한 계략에 자신의 딸들을 이용했습니다. 18:17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으로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사울은 맏딸 메랍을 다윗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그를 다른 남자의 아내로 준 후, 다시 둘째 딸 미갈을 이용하여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죽일 덫을 놓았습니다. 시기심이라는 작은 불씨로 시작한 사울의 죄는 이제 그의 영혼 전체를 집어삼키며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미움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악한 영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죄한 다윗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그를 쫓아다니는 데 자신의 평생을 허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2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애매히 사울의 분노와 미움의 대상이 된 다윗은 자신의 형편을 가리켜 “나와 사망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고 한탄합니다 (20:3). 다윗은 자신을 이런 어려움에 빠뜨린 사울에 대해 분노하고 미워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이미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 선지자 사무엘의 이름을 들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사울 앞에 겸손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일 계략으로 그에게 사위가 되기를 제안할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족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18:18)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로다” 하였습니다 (18:23). 사울 왕의 교만함에 대한 다윗의 겸손함은 마치 물에 대한 기름과 같아서, 서로 섞이는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겸손은 다윗을 헛된 야심으로부터 멀리하게 하고 또 마귀의 괘계로부터 그를 보호하였습니다. 그의 겸손은 다윗을 늘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도우심을 구하도록 했습니다. 야고보서 4:6-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이것이 영원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악을 이기는 최선을 길은 그것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또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한 사울 왕에게 충성스러웠으며, 그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지혜롭고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18:13-14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그(다윗)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 왕은,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할 속셈으로, 다윗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하기 위한 조건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100개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양피 200개를 베어 왕에게로 가져왔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모든 일에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에게는 두 배로 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38-44). 사도 바울 또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21). 매일 세상의 악에 둘러싸여 도전을 받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모든 면에서 오직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8-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 세상의 도덕은 상대적입니다. 그것은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울은 또 다른 사울을 만들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사울이 나옵니다. 끝이 없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사슬을 끊었습니다. 그는 사울을 대적하여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대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죄를 그의 사랑으로 덮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유일한 길”이 되셨습니다. 이 세상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바울이 말한 바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한” 바로 그 분입니다. 이 예수님 위에, 우리는 세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그리고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으실 만한 그런 새로운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늘 예수님께만 고정하게 하시고, 주님을 믿는 믿음에서 온전케 되는 이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힘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평안을 누리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선하심을 배우고 행함으로, 오는 세상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