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참된 축복은 (마가복음 9:2-13)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9. 12. 04:06

 

참된 축복은

 

마가복음 9:2-13

 

오늘은 본문 말씀을 기초로 참된 축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누리기를 바라는 복을 간단히 말하자면 부귀영화 무병장수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돈과 명예가 있고, 건강한 몸으로 오래 산다면 그것보다 받은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매우 다른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복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7절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 내려오셔서 직접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음성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얻을 있는 최고의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대할 있는 최고의 복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입니다. 이것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서의 부귀영화 무병장수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리 받은 인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겨우 철을 피고 지는 풀의 꽃에 불과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시는 사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2절의 엿새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시고 이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대답한 일이 있은지 엿새 후란 말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겪으실 일에 대해서 보다 명확하게 말씀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8:31). 이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없는 수수께끼가 생겼습니다. 편으로 예수님은 그리스도 됩니다. 세상의 왕이시며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편으로는 같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버린 되고, 죽임을 당한다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사실이 서로 모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인할 없이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마음을 매우 무겁게 했습니다. 특히 죽음이라는 말이 그들의 마음을 짙은 어둠으로 덮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매우 특별한 은혜의 보살핌이 필요한 것을 아셨습니다.

 

엿새 예수님께서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명만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산이 가이사랴 빌립보와 가까운 헬몬산이라고 추정합니다. 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지 중요한 사건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입니다. 둘째는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예수님께 대하여 증거하신 것입니다. 가지 사건들은 모두 죽음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죽음이란 더할 없이 무섭고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죽음이란 모든 것을 끝내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영원한 절망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는 그리스도예수님 조차도 죽음 앞에서는 마치 태풍에 휩쓸려 흔적 없이 사라질 조각배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사건들은 이런 제자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날의 일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자라 지극히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전서 1:16b-18). 거룩한 위에서 베드로를 압도한 것은 죽음의 두려움 아니라 예수님의 크신 위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예수님께 친히 존귀와 영광을 베푸심을 보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인생이 완전해 바뀌었습니다.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셔서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없을 만큼 심하게 희어졌습니다. “변형되었다 말은 원어로 “metamorphose”라고 하는데 이것은 형질(nature)”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애벌레가 나비가 되거나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것을 표현할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5:44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장차 겪을 변형(metamorphose)”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곤충의 같은 개체가 애벌레의 몸으로 사는 때가 있고 나비의 몸으로 사는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람도 육의 몸으로 사는 때가 있고 신령한 몸으로 사는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육의 몸을 썩을 ,” “욕된 ,” “약한 이라고 하는 반면, 신령한 몸을 썩지 아니할 ,” “영광스러운 ,” 그리고 강한 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령한 몸은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며, 병들지 않는 강한 몸이며, 더러움이나 추함이나 불완전함이 없는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죽음이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끝나는 영원한 절망이 아닙니다. 사실은 반대입니다. 죽음이란 우리가 육의 욕되고 약하고 썩게 육의 몸을 벗어버리고, 영광스럽고 강하며 영원히 썩지 않는 신령한 몸을 입는 축복된 과정입니다. 죽음은 육의 벗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육의 몸을 가리켜 장막(tent)”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1; 베드로후서 1:13-14). 장막 텐트는 광야에서 야영을 잠시 머물기 위해서 임시로세워놓는 거처입니다. 이것은 나뭇가지를 얼키설키 엮어서 만든 것이어서 비가 오면 물이 새고, 바람과 추위를 제대로 막지도 못합니다. 우리 육체의 몸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으로부터 나서 약함 죽음이라는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결국 낡아서 벗을 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 사는 자들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image)” 입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49).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설명들이 있을 있겠지만, 그것들 분명한 가지는 바로 신령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 안에 이미 씨가 심겨진 신령한 몸을 친히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초막 위에서 언급한 장막(tent) 같습니다. 죽음이 여전히 두려웠던 그는 장차 육체의 장막을 벗고 신령한 몸을 입을 소망을 갖기보다, 반대로, 신령한 몸으로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에게 육체의 장막을 입혀 그들을 땅에 묶어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병장수 복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은 무병장수가 아니라, 육체의 장막을 벗고 예수님과 같이 신령한 몸을 입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가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을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는 예수님보다 훨씬 오래 전에 땅에 살았던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옛날에 이미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이한 점들 있습니다. 가지는 이들이 사는 동안 죽음 같은 고난을 맛보았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에 관해서, 민수기 11:15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가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수없이 많은 백성들을 맡기시고 모세로 하여금 짐을 지게 하심으로 그를 심히 괴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1:11).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께 괴로움을 토로하며 죽기를 원했지만, 이것은 그가 그만큼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성실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는 이미 죽음의 문턱 넘어서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죽도록 충성하는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엘리야에 관해서, 열왕기상 19: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엘리야가)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생명을 취하소서 나를 죽여주십시오하고 기도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죽기를 원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특별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들을 갈멜산에 모으고, 이들과 백성들 앞에서 오직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심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로 입증하고, 결국 거짓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일로 인해 우상 숭배자인 이스라엘의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크게 분노하고, 엘리야의 목숨은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이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삶은 이런 일들의 반복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그를 이런 고난 속으로 몰고 갔습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생명을 취하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한편, 성경에 기록된 모세와 엘리야의 마지막은 매우 특이합니다. 신명기 34: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의 죽을 나이 일백 이십세이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모세가 죽어 장사되었으나 오늘까지 묘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합니다 (신명기 34:6). 모세의 죽음은 마치 일을 마친 사람이 이제 시간이 되어 짐을 싸고 홀연히 떠나는 듯하였습니다. 엘리야의 마지막은 더욱 극적입니다. 열왕기하 2:11 말씀입니다. “ 사람(엘리야와 엘리사)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사람을 격하고 (서로 떨어지게 하고) 엘리야가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야는 아예 죽음을 맛보지 않은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에게 죽음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과 백성들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 충성하고, 죽음보다 더한 고난을 겪으며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10b).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죽도록 충성한 자들을 결코 죽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영생의 면류관을 예비하십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는 죽음을 밟고 조롱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산에서 보인 것처럼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 안에서 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복된 자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물론 말씀을 하신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십니다. 부분을 마태복음에서는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5).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십니다. 세상에 이보다 복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생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이 되십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27절에 여자가 예수님의 뛰어나심 보고 그에게 소리쳐 말했습니다. “당신을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다!” 말인즉슨, “당신 같이 훌륭한 아들을 당신의 어머니는 받은 사람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관한 영원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도,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게도 예외가 없이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키지 않는 자는 단연코 복이 없는 입니다. 히브리서 5:8-9절은 말씀하기를 (예수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의 클라이맥스는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고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온전하게 되셨다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 되셨다는 말입니다. “영광스럽게 되셨다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 죽음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말씀하기를 예수님께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온전하게 되신 것처럼, 예수님을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생명과 영광의 영접하고 따라 걷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십니다.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순종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또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상의 복은 부귀영화 무병장수입니다. 복은 세상을 사는 동안 고난을 피하고 죽음을 멀리 함으로써 얻어지는 복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죽음을 피하는 복이 아니라, 죽음을 짓밟고 조롱하고 집어삼키는 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와 엘리야의 삶이었으며, 예수님의 삶이며, 또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그런 삶을 있었을까요? 이는 그들이 죽음의 두려움 사로잡혀 사는 대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열심 사로잡혀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오히려 죽음은 복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종말에 연약한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신령한 몸을 얻는 것이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우리들이 진리를 알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말끔히 떨쳐내고, 오직 영광의 하나님을 믿고 바라며 주님을 따라 죽도록 충성하는참된 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