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마가복음 9:30-3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9. 26. 13:12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마가복음 9:30-37

 

제가 처음 성경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것은 1986년도였습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 인기 있던 책이 있었습니다. 펄시 콜레라는 사람이 내가 천국이라는 천국 여행기였습니다. 저도 책을 읽어봤지만 지금 기억이 나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내용이 매우 생생하고 신기해서 제가 책을 읽은 오랜 동안 천국에 대해 많이 생각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책을 지은 펄시 콜레라는 사람에 대해서나 책의 내용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논란이 있지만, 제게 당시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천국이 우주 너머 어딘가에 존재한다 책의 증언이었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천국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는 같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땅에서의 천국을 꿈꾸는 세대입니다.”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매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런 삶을 벗어나 고통이 없는 천국 들어가기를 꿈꾸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여러 힘든 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땅에서의 천국 대한 가능성을 보게 되고 세상에서 사는 동안 천국을 맛보고 누리려는 꿈을 꾸게 것입니다.

 

천국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아마도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펄시 콜레가 우주 너머에 있는 신비로운 곳인지, 우리가 땅에서 얻기를 원하는 행복한 삶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천국에 관해 얻게 가지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은 원리(principle)”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어떤 장소나 어떤 상태이기에 앞서서 장소나 상태를 다스리는 근본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리는 개인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 원리이며, 생각의 원리이며, 행복의 원리입니다. 천국은 원리이며, 천국이 깃들고 거하는 곳은 개인의 마음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원리가 왕처럼 권세를 얻고 다스리는 상태나 장소가 진정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의 원리가 바로 세워지지 않고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곳은 아무리 천국처럼 보일지라도 지옥 가까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지난 며칠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북쪽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행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면 그곳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며 만에 부활하시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땅에서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지나실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제자들과만의 시간을 가지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특별히 하셔야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31 말씀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예수님께서 재차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32절에 나와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천국은 원리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원리들이 있을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의 원리를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천국 복음입니다. 이것이 천국 복음이 되는 것은 단순히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이 천국 복음이 되는 것은 또한 이것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지키고 따라야 천국의 원리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죽음과 생명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으며, 부끄러움을 참아서 영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하나이며, 부끄러움과 영광이 하나입니다. 세상에서는 생명과 죽음이 서로 모순되며, 결코 함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합니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로 나아가며,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생명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행길에 제자들에게 여러가지 가르침들을 주셨습니다. 가르침들은 모두 천국의 원리들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겪으실 십자가 - 부활 상통(compatible)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하십니다 (35). 세상에서는 첫째와 끝이 서로 반대입니다. 상통할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기 위해서 끝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거듭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에 대해서도 거듭 가르치십니다. 마가복음 10:43-44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그들의 현재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과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 이들의 영혼은 마치 꽁꽁 얼어붙은 땅의 깊고 차갑고 어두운 틈에 갇혀버린 매미와 같았습니다. 옴짝달싹 못하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깨닫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해 묻는 것조차 무서웠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런 무서운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빨리 화제를 바꾸어 다른 밝고 희망찬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얘기는 무엇이었을까요? 33-34 말씀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정말 하고 싶어하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쟁론했다 말은 어떤 것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 세밀하고 철저하게 마음으로 고민했다 말입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 부활에 관한 말씀하실 제자들이 보여준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했던 과는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을 환하고 즐겁고 흥분되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가 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쟁론할 그들은 정말 한여름 가장 왕성한 시절을 보내며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몸을 떨며 소리를 내는 매미와 같았습니다.

 

누가 크냐?” 참으로 세상의 원리입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누가 크냐?” 따집니다. 누가 힘이 세냐? 누가 공부를 잘하냐? 누가 부자냐? 누가 성공했냐? 심지어 누가 착하냐 묻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보다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경쟁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 있는데 노랑 애벌레 나비가 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뭔가 새롭고 흥분이 되는 일을 찾아 길을 나선 노랑 애벌레는 많은 다른 애벌레들이 줄을 지어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을 따라 한참을 가니 멀리 아주 높이 솟아오른 기둥이 보였습니다. 기둥이 너무 높아서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노랑 애벌레가 가까이 가서 보니 거대한 기둥이 모두 애벌레들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애벌레들이 모여서 하나같이 높은 곳으로 오르려고 서로 뒤엉켜 꿈틀거리면서 그렇게 높은 기둥을 만든 것입니다. 다음은 책의 내용의 일부를 인용한 것입니다:

 

기둥 더미 속에서는 이제 친구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의 위협이요 장애물일 뿐이며 동료들을 발판으로 삼고 기회로 이용하여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라가야겠다 일념이 도움이 되었는지 상당히 높이 올라온 같이 느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자기 자리를 가까스로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사이에도 노랑 애벌레가 보았던 애벌레 기둥 어느덧 조금씩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런 논쟁이 처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천국의 원리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고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첫째가 되고자 하는 마음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들에게 첫째가 되는 방법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천국의 원리가 세상의 원리와 전혀 다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원리를 받아들일 없다면, 그들이 결코 천국을 맛볼 없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첫째가 되는 방법은 가장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경쟁자 여기며, 그들을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의 원리는 이런 세상의 원리와는 정반대입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서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앞에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가지 중요한 점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름으로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영접하라고 하십니다. 그냥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될텐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이름으로라는 조건을 앞에 두십니다. “이름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름은 존재입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가 인정됨을 의미합니다. 옛날에는 종들이나 여자들에게 관명(冠名)” 호적에 등록된 공식 이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냥 일상 생활에서 부르는 돌쇠 언년이같은 천칭(賤稱)”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만큼 이런 개인들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누군가가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기를 원합니다. 이는 사람이 나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을 드러내고 이를 기억시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첫째가 되고자 노력하는 이면에는 이름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듣고 칭송하고 기억해줄 날을 기대하면서 높이 오르고자 분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름 바꾸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되, “ 이름으로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이것을 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말씀이야말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은 지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은 천국입니다. 이름을 위해 산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 기둥의 꼭대기에 오르려는 애벌레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날개도 없고 다리도 몹시 짧은 애벌레가 구름보다 높이 솟아 있는 기둥의 꼭대기를 오르기 위해서 몸을 꿈틀거려가며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고 짓밟히며 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설령 좋은 이름 얻었다고 하더라도, 이름은 잊혀지거나 쉽게 더럽혀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존귀한 이름이며, 영원한 이름입니다. 빌립보서 2:5-11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5 너희 안에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셔서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렇게 높이신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장 낮은 데까지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둥을 올라가는 애벌레는 매일 자신이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 순위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높아졌으면 기뻐하고, 제자리걸음이거나 떨어졌으면 실망하고 힘들어할 것입니다. 하지만 날개를 가진 나비에게는 이런 순위가 의미가 없습니다. 나비는 언제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앉을 수도 있으며 원하면 가장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수도 있습니다. 나비는 이상 자신이 얼마나 높아졌는지에 대해서 신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날개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산다는 것은,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천국의 원리 진심으로 기뻐하고 이를 행하기를 즐거워한다는 것은 바로 영혼에 천국의 날개 달린 것과 같습니다. 그는 이미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날개를 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는 높아지기 위해서 기둥에 달라붙어 올라가던 일을 멈추고, 고치 안에 갇힌 번데기가 되어 나무에 매달려 오랜 시간을 죽은 듯이 보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살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천국의 원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일을 잊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은 오랜 시간 자성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죽고, 예수님께 대해서 그리고 천국에 대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에 날개가 달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혼이 말할 없이 자유롭고 행복함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있음을 보고 보게 됩니다. 이상 애벌레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 안에 다른 사람을 즐거이 영접할 넉넉함이 생깁니다.

 

내가 누군가를 영접한다 것은 사람을 위해서 안에 그가 거할 거처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가 편히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대접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에게 주인의 자리 양보하고 종이 되어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크냐?” 놓고 다투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을 영접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영접할 있는 사람은 오직 입니다. 그들이 높아지는데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만 마음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대통령과 함께 사진을 찍었거나 국회의원과 함께 식사를 것이 자랑이 됩니다. 이것으로 이들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과 같은 자들 자신을 동일시(identify) 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작은 무시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말씀에서 예수님은 가장 작은 예수님 자신과,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시(identify) 하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천국에서 가장 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의 존재 가치 천국에서 가장 되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아들 되신 예수님의 그것과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가장 작은 자보다 작은 자가 되어서, 그의 종이 되기까지 낮아져 그를 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다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를 찾아 섬기기 위해 경쟁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자신을 가장 작은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제 누가 크냐?” 문제로 다툴 생각은 그리고 스스로를 높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그들이 거할 처소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천국의 날개가 달려있는지를 더듬어 살펴볼 , 만져지지가 않습니다.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음대로 훨훨 날아다닐 만큼 크고 강한 날개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욕심을 깨끗이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며 주님의 겸손하신 섬김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 채워진 마음을 회개하고 비워서 그곳에 작은 자들을 영접할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