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9:14-29)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2. 9. 19. 12:39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9:14-29

 

우리는 지난 말씀에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일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으로 임하셔서 아들 예수님을 존귀와 영광으로 높이셨습니다. 그곳은 죽음너머의 세계이며 오직 빛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신입 사원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로 설악산 대청봉을 등반한 적이 있습니다. 날씨는 덥고 흐린데 축축하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것이 여간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구름을 뚫고 올라 정상이 가까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구름 위의 세상은 구름 아래의 세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구름 없이 맑은 하늘에 햇빛이 화사하게 비치고, 바람이 솔솔 부는데다 기온도 서늘했습니다. 정상까지의 길은 이상 경사지지 않았고, 작은 관목들 사이로 오솔길이 산책길처럼 아주 걷기가 편했습니다. 아래로는 하얀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서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와야 했기 때문에 오래 머물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높은 산에 올라 신기한 경험을 다시 세상에 내려왔을 , 그들을 맞이한 것은 그대로 세상이었습니다.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뒤에 남아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둘러서서 이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으며, 귀신 들린 아이를 가진 아버지는 도움을 받으러 왔으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황망해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설악산을 오르면서 구름 아래의 세상과 구름 위의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나 다름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른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또한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 아래의 세상 벗어나 죽음 위의 세상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그들이 경험한 죽음 위의 세상 죽음 아래의 세상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곳에는 영광스러운 몸이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살며,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통해 보이시는 진리의 ,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구름 위의 세상 뒤로 하고 다시 그들이 원래 살던 구름 아래의 세상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곳은 여전이 귀신들이 역사하고 있으며, 죽음의 그림자가 어둡게 깔려 있으며, 거짓 교사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곳입니다. 이런 세상으로 돌아온 제자들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실망감과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고,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에 제자들을 남겨둔 떠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께는 구름 위의 세상이나 구름 아래의 세상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는 죽음 위의 세상이 죽음 아래의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이것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는 그들이 아직 영적으로 어리며, 성장해야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부지런히 제자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비록 아래 살고 있지만 매일 구름 위로 높이 솟은 거룩한 에서 능력 있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고 기억해야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2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2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런 주님께서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에게서 쫓아내신 더러운 귀신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기억해야 하는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매우 강한 (원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매우 강력한 무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기초로 가지를 추가한다면, 우리의 생명에 대한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진리를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에 기초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영적인 진리가 그의 속에 충분히 반영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있습니다. 투명한 유리창을 닦을 자주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가 끼었는데 이것이 유리창의 안쪽에 것인지 바깥쪽에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때가 안쪽에 끼었는데 바깥쪽을 열심히 닦으면 것입니다. 만일 쪽이 완전히 깨끗하다면, 다른 쪽의 때를 확인하고 닦아내기가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을 사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진리 명확하게 있으면, 우리는 더러운 것들, 잘못된 것들을 쉽게 분별하고 그것을 고치거나 깨끗하게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진리 명확하게 있지 않다면, 우리는 세상이 잘못되었는지 또는 내가 잘못되었는지를 모르는 혼돈 속에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강한 (원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원수는 사단 마귀와 더러운 귀신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에 대해 힘들어하며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없느니라.” 말씀은 기도의 능력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아이를 사로잡고 있던 더러운 벙어리 귀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드러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가진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기를 바라며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는 더러운 귀신으로 인해 아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피리하여 가는지라” (18). 22절에서는 말하기를,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합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아이는 어릴 때부터 오랜 세월 이런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귀신은 매우 강하고 끈질깁니다. 나아가 더럽고 악합니다. 그것은 아이를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25). 견딜 없는 고통을 일으키며 생명을 빼앗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무서운 맹수가 입에 먹이를 놓지 않고 죽을 때까지 흔들어 대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꾸짖으시며 쫓아내실 때에도 공손히 나가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거의 죽게 만들었습니다. 악한 마귀와 더러운 귀신들에게는 영혼들에 대한 어떤 긍휼과 자비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영혼을 괴롭히고 죽이려는 살인심만 가득할 뿐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는 마귀나 귀신으로부터 자유롭다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두 사단 마귀의 종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불쌍한 아이처럼 더러운 귀신에 들려서 자주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죽음의 울타리 있습니다. 울타리를 넘어가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죽을 때까지 울타리 안에 머물러 숨을 죽이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에서 사단 마귀가 주는 두려움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애굽 바로를 두려워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셔서 여러 기적들로 바로를 치시고, 이로 인해 바로는 결국 항복하고 그가 종처럼 부려먹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낼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마다,” 몹시 두려워하면서 통곡하여 울고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원망하며 그들의 지도자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4:11, 16:3, 17:3, 민수기 21:5).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이 몹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며 만류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태복음 16:21-23)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순간 그는 바로 예수님의 에서 사단의 으로 넘어졌습니다. 심지어 그는 후에 예수님을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하였습니다.

 

사단 마귀는 정말 강하고 끈질깁니다. 나아가 마귀는 매우 지혜로워서 자신을 천사처럼 변장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 일어나서 택하신 백성을 미혹하게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거짓 사도” (고린도후서 11:13), “거짓 형제” (갈라디아서 2:4)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고 사단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길은 깨어 있는 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매우 강한 (원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파숫군이 밤이 맞도록 망대에 서서 파수를 서듯이, 사단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다른 진리는 우리에게 매우 강력한 무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오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물으셨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아들은 매우 오랫동안 귀신에게 시달렸으며 귀신의 역사는 매우 격심하고 난폭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비록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상태가 좋지 않은 아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있을까 하는 의심 들었습니다. 그는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매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푸라기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를 책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의 가장 강한 원수 사단 마귀도 결박하고 쫓아내는 권능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받으리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21:21-2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능력 절대적입니다. 그것은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의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반드시 믿음대로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 갖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간절하신 기도제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이로부터 더러운 귀신을 능히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심히 탄식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예수님의 탄식과 책망의 말씀을 생각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시며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자가 되는 입니다. 일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셨다 내려오시는 동안 자리를 비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은 동안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무능력함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과 탄식이 일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복음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도, 심지어 세상에 오직 혼자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 것과 같은 권능의 삶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름 위에서 예수님의 권능을 구름 아래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세상에서도  똑같이 보고 기뻐하며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마음 속에서의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이것은 마치 학생들이 시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학생들은 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를 합니다. 하지만 시험장에 들어갈 때는 교과서를 몸에 지닐 없습니다. 그들이 시험장에 들어갈 허락되는 것은 오직 그들의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는 지식들입니다. 학생들은 이제 오직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시험을 봐야 합니다. 심지어 옆에 앉은 친구와도 상의할 없습니다. 완전히 혼자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학생은 교과서에 쓰여져 있는 내용들을 정확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마치 교과서를 앞에 펼쳐놓은 것처럼 보면서 쉽게 문제를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학생은 기억이 가물가물할 것입니다. 분명히 책이 앞에 펼쳐져 있을 때는 아는 것처럼 쉬웠는데, 이제 책을 덮고 머릿속의 기억만을 가지고 문제를 풀려고 하니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 뭐였더라? 뭐였더라?” 끙끙거리는 동안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믿음은 참으로 연습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항상 앞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분의 능력을 의지하며, 분의 뜻을 묻고 이에 순종하며, 분의 영광을 가장 목적으로 삼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두려움 없으며, 따라서 사단 마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1967년에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6 전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은 최신예 소련제 전투기들인 MIG-19기와 MIG-21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국가에서는 첨단 전투기들을 조종할 있는 조종사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전투기들이 이륙도 하기 전에 파괴되고, 이륙한 비행기들도 숙련된 이스라엘 전투기 조종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전투기를 수출한 소련은 전투기 조종사들까지 지원해야 했습니다. “혼자서는아무 것도 없는 아랍 국가들은 당연히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의 영적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2:2절은 예수님을 가리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들은 구절을 “the author and perfector of our faith,” 또는 “the pioneer and finisher of our faith” 우리 믿음을 지으시고 완성하신 또는 우리 믿음을 개척하고 마치신 번역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산다는 것인지, 그리고 결국이 어떠한지를 몸소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같은 믿음의 , 권능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믿음의 능력 전능합니다. 그것은 사단 마귀조차도 당해낼 없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권능을 의지하여 불가능이 없는 , 모든 기도에 응답 받는 삶을 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첨단 전투기가 그것의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조종하는 조종사가 마치 비행기와 몸이 자유롭게 그것을 조종할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믿음 지으시고 완성하셨지만, 내가 그것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혼자서오직 믿음으로 서고,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이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말씀하십니다. “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말을 바꾸어 말하면모든 문제는 실상 믿음 없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셨을 완악한 귀신을 책망하시는 대신 먼저 믿음이 없는 세대여하시며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아버지의 간절한 요청에도 먼저 귀신을 내어쫓으시는 대신 그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말씀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믿음 없음 문제까지도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들고 나갔습니다. 참으로 믿음은 아무 것도 붙들 것이 없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여전히 우리 앞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이글거리는 우리의 생명이며 능력입니다. 그냥 그것을 붙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먼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붙들어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우리의 생명의 주권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명령을 받는 귀신은 소리를 지르며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아이가 죽은 같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악한 마귀와의 싸움은 치열해서 때로 우리의 생명이 끊어질 듯한 고통과 두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절대로 우리의 생명에 손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참새 마리가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29-31).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며 보호하시는지에 대해서 알고 이를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생명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굳게 붙듦으로 털끝만큼의 두려움도 안에 틈타지 못하도록,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감사와 기도로만 가득하도록 영혼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