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사람 (II)
마가복음 9:42-50
우리는 지난 주에 영적인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곧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여 마귀와 영적인 싸움을 싸우며, 예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에게 선한 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영적인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기초로 제가 설명하고 싶은 영적인 사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예수님을 의지하여 죄를 극복하는 사람” 또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죄를 이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짧은 비디오를 한 편 보고자 합니다. 유명한 미국 애니메이션 드라마인 “심슨 가족(The Simpsons)”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주인공인 호머 심슨이 자동판매기에서 음료수 캔을 사서 마시고 싶은데 동전이 없었습니다. 그는 음료수 캔이 나오는 구멍으로 손을 넣어서 자동판매기 안에 들어 있는 캔을 하나 꺼내려고 시도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0Ot6jzSsLc
대사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료: 조심해 호머! 언젠가 어떤 사람이 여기서 손을 잃었다는 얘기를 들었어!
호머: 풋~ 그건 헛소리야!
호머: 우웃~ 조금만 더…… 잡았다!!!
호머: 악 내 손이 끼였어! 나 발레 공연에 가야 하는데.
구조원1: 호머 이런 말 하기 정말 힘든데 당신 팔을 잘라야겠어.
호머: 우~ 팔이 다시 자라겠지? 그렇지?
구조원1: 오 그럼!
구조원2: 호머 지금 캔을 붙들고 있는거야?
호머: 무슨 소리야?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
“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명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본 비디오를 가지고 죄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호머 심슨은 “악 내 손이 끼였어! 나 발레 공연 가야 하는데……” 하고 소리칩니다. 그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어떤 것에 끼여서 그 길을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팔을 붙들고 있는 것은 자동판매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손이 자동판매기 안에 들어 있는 음료수 캔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팔을 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도 그 캔을 놓지 않았습니다. 결국 구조대가 와서 그의 팔을 자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캔을 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구조원이 “호머, 지금 캔을 붙들고 있는거야?” 하고 물어볼 때도 그는 “무슨 소리야?” 하며 자신의 부끄러운 “죄”를 숨겼습니다. 캔을 붙들고 있는 손을 놓았다면, 그는 바로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또 아내와 함께 예정했던 발레 공연을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캔을 놓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잃고, 팔을 잘라야 하는 상황에서도 캔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3). 45절과 47절에서는 각각 “발”과 “눈”에 대해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따라서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만일 이 길을 가는 도중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면, 그래서 더 이상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행을 계속할 수 없다면 그것이 바로 “범죄함”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영생과 하나님 나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붙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죄는 얽매이는 것이며 집착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b-2a절에서 저자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천국을 향해 달리는 믿음의 경주(race)입니다. 그리고 “죄”는 이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고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모든 무겁고 얽매이는 것들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랑할 수 있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격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에 해당하는 죄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마태복음 5:21-22),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5:28). 또 “탐내지 말라”고 하시며 (출애굽기 20:17),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정죄하십니다 (골로새서 3:5). 이 말씀들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눈을 뜨자마자 죄를 짓기 시작하여, 하루 종일 죄를 지으며, 죄로 하루를 마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윗은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고백합니다 (시편 51:3b). 우리가 예수님을 가까이 배우고 따를 때,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빛 앞에서 더욱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자신이 더욱 선명한 죄인으로 발견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는 고백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합니다 (디모데전서 1:15). 그리고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며 탄식합니다 (로마서 7:24). 사도 바울이 예수님 앞에서 발견한 자신은 “구원의 소망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절망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절망이 소망의 시작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죄를 이기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 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인 됨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더욱 자세히 읽어보면 “죄를 둘러싼 죄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죄 위의 죄”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먼저는,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는 죄입니다. 요한1서 1:8-10절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죄가 없어요!” “나는 죄인이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헛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둘러싼 또 다른 심각한 죄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일부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마태복음 6:12). 죄인 된 우리가 자신의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는 임금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은혜 받은 자는 자신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친구를 옥에 가둡니다. 임금은 이 자에게 노하여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죄를 둘러싼 또 하나의 죄는 죄 없는 사람을 죄가 있다고 거짓 증거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아홉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하십니다 (출애굽기 20:16). 형제의 있는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허물도 크지만,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죄는 참으로 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증거로 형제를 해하려고 꾀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말고, 그가 형제에게 하려고 했던 그대로 되갚아서 악을 제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19:16-21). 거짓증거로 인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정죄를 당하시고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더할 것은 형제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매우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는 예수님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그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말할 수 없이 무서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위에서 살펴본 “죄와 관련된 죄들”은 모두 우리가 죄를 다루는 태도와 방식에 있어서 잘못된 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나의 죄를 감추고 즐기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고, 조장하고, 심지어 거짓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극복하는 삶이 아니라 죄에 굴복하는 삶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즐기다가 망하고, 동시에 형제를 죄 속에 가두고 방치하여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미워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이킬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죄에 빠진 형제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도우라고 가르치십니다. 죄를 이기는 가장 근본적인 길은 “회개”와 “용서”입니다. 곧 나의 죄를 회개하고,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싸우는 올바른 방식이며, 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옵니다. 이들 또한 죄에 매우 민감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많은 법들과 규정들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법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숨은 죄”를 가리고 마치 죄 없는 거룩한 자들인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극복하기는 커녕 더욱 깊은 죄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채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죄에 삼키운 것입니다.
죄를 이기는 가장 근본적인 길은 “회개”와 “용서”입니다. 나의 죄를 깨닫고, 미워하고, 이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며, 또한 형제를 사랑함으로 그의 죄를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이기는 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42절에 “실족케 하면”이라는 말과, 43, 45, 47절의 “범죄케 하거든”이라는 말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다르게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42, 43, 45, 47절이 모두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영어 성경들은 대부분 이 네 절을 모두 “cause to sin” 곧 “범죄케 하면”이라고 번역합니다. “Scandalizo”라고 하는 이 단어의 본래의 뜻은 “걸려서 넘어지게 하다” 입니다. 곧 길 위에 덫같이 걸리는 것을 놓아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발을 걸어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걷는 길”이 있으며, 또 그 길을 끝까지 걸어서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 목적지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영생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목적지를 향하여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19, 요한복음 21:19).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 여행은 우리가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여행 중 곳곳에서 우리는 “죄”를 만납니다. 곧 우리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거나, 넘어지게 하거나, 심지어 여행을 멈추고 짐을 풀게 하는 것들입니다. 호머 심슨의 팔이 자동판매기에 끼인 것과 같습니다. 이 죄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입니다. “Scandalizo”의 어원이 되는 “Scandal”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대개 유명한 정치인이나 연애인의 명성을 훼손하는 불명예스러운 소문을 말합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예수님께 대하여 마귀가 뿌려 놓은 많은 “나쁜 소문들”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할 때 우리는 매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상처가 납니다. 예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면서 내가 지금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 때 다리에 힘이 빠집니다. 가던 믿음의 길을 멈추고 세상 사람들처럼 “안주하며”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손에 붙들고 매달리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됩니다. 결국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포기하고, 이 땅에서의 행복을 구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이제 “죄”라는 말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천국을 향한 여행길을 걷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세상입니다. “죄”란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여정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직 이 길을 힘써 가려는 사람들에게만 죄가 매우 견디기 힘든 도전이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유혹이기도 하고, 내 안에 살아있는 욕심과 두려움과 욕정이기도 하고,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에 대한 불신이기도 하고, 천국의 소망을 망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믿는 자들은 매일 매순간 이런 죄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죄인”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은혜로 주님을 따라 “의의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포함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죄에 대하여, 예수님의 경고는 매우 단호합니다.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의 믿음의 여정을 훼방하는 일을 하게 된다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물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또 내 자신의 손과 발과 눈이 나의 믿음의 여정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들을 몸에서 제하여 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삶은 내 손과 발과 눈보다, 그리고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나의 소중한 지체들과 나의 생명이 이 여정을 방해하는 가장 어려운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이 믿음의 여정이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하십니다 (요한복음 12:25). 또 히브리서 저자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고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12:4). 영적인 사람은 죄와 싸워 이기고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입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에 자기 생명까지 드리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정에서 양 같은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매일 나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또 이 길에 방해가 되는 “나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회개와 용서“를 통해 죄를 극복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예수님을 의지하여 죄를 이기는 사람”이며 “천국 소망을 향해 매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가 이 점에서 참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모두가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우리가 되기를 참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메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의 집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사무엘하 7:1-29) (0) | 2022.10.31 |
---|---|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마가복음 10:1-12; 요한복음 8:1-11) (0) | 2022.10.24 |
영적인 사람 (I) (마가복음 9:38-41) (0) | 2022.10.10 |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마가복음 9:30-37) (0) | 2022.09.26 |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9:14-29) (0) | 2022.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