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마가복음 10:1-12; 요한복음 8:1-11
기독교 신앙의 대표적인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 죄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누리며, 또 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에 합당한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를 없앤다면, 우리에게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죄 가운데 거할 것이며,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의 빛은 한 편으로 우리의 죄를 비추어 드러냅니다. 또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어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빛 안에서 우리는 우리 죄를 보고 회개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보고 그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성장”이 무엇을 향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내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내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소망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나를 살릴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서 그 은혜를 붙드는 것입니다. 오직 그 은혜만을 의지하며, 그 은혜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성장”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지난 주 설교에서 “죄와 관련된 죄들”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었습니다. 그런 죄들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회개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 죄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죄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죄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고 붙였습니다. 이 말은 로마서 1:18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8-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오늘의 주된 본문 말씀은 마가복음 10:1-12절이지만, 말씀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 말씀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요한복음 8:1-11절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두 본문 말씀은 몇 가지 공통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 두 이야기 모두 “간음”이라는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공통점은,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2절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주님을 시험하여 묻기를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였습니다. 또 요한복음 8장 본문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와서 시험하여 묻기를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였습니다. 이런 공통점들이 있는 반면, 이 두 이야기는 또 서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점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말씀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숨은 간음죄”를 드러내시고 정죄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장 말씀에서 예수님은 여자의 “드러난 간음죄”를 용서하시고 덮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지방과 요단강 건너편에 이르시자 다시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바리새인들이 와서 예수님께 “시험 문제”를 던졌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이혼이 쉽고 또 빈번했다고 합니다. 이혼 결정권이 오직 남자에게만 있었으므로, 말이 “이혼”이지 실상 남자가 그의 아내를 버리는 것이었으며, 남자들은 온갖 “사소한” 이유들을 들어 단지 “이혼 증서”에 서명함으로써 간단히 아내를 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혼이 사회 문제가 되면서 유대인 지도자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논쟁들이 많았으며, 유대인 랍비들 사이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민감한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시험 문제에 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대신 반문을 하셨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에 바리새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한 것은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옳지 않다!” 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분명한 뜻에도 불구하고 극구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 보를 양보하셔서 아내를 버릴 것이면 이혼 증서를 써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남자들이 아내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도록 하시며, 동시에 이혼한 여자가 다시 결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혼을 억제하며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아내 내어버리기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락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완악함에 굴복하셔서 자신의 뜻을 거슬러 양보하시고 긍휼을 베푸신 것은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혼할 자유를 주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죄는 성장합니다. 야고보서 1: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창세기 4장에는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에 대한 시기심으로 분노하는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지만 가인은 자신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그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가인이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비록 동생을 죽이는 큰 죄를 범했지만, 자신의 죄로 인해 괴로워하며 두려워하는 가인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아무도 그를 해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의 후반부에는 “라멕”이라는 가인의 후손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들에게 자신이 한 일을 이렇게 자랑합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창세기 4:23-24). 라멕은 사람을 죽이고도 가인처럼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자신을 해하려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벌을 칠십 칠 배나 내릴 것이라고 호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그를 보호하신 것은 다만 그의 “죄인 됨”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표는 “살인 허가증”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라멕의 때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는 “살인 허가증”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살인범의 후견자요 보호자로 변질되었습니다. 죄가 장성한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혼이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종 모세를 통해 허락하신 옳은 일”로 둔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죄를 마음에 품고, 그것을 키워 그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옳은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라고 하십니다. 예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 5:28절에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보이는 행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속마음까지도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의 법은 마치 촘촘히 짠 그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지극히 거룩하고 순결해서 모든 사람들을 죄 속으로 가둬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설 때 가인처럼 드러난 우리의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이들은 회개할 생각이 없습니다.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인”으로 발견되기도 싫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혼을 “하나님의 법”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죄를 짓습니다. 이들은 돌이켜 회개하지 않고, 죄의 소원이 이끄는 대로 끝까지 가고자 합니다. 그들에게 남은 소망은 “죽음”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우리는 한 “간음한 여자”를 봅니다. 이 여자를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따르면 그녀는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앉으셔서 그의 앞에 나온 많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간음을 하다가 바리새인들에게 붙들려 예수님과 많은 사람들 앞에 끌려온 여자의 심정은 참으로 비참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던지는 질문은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일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마치 덫에 걸려 죽을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짐승처럼 떨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의기양양하여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성경 저자는 부연하여 설명하기를 이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도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고 나왔습니다. 앞서 살펴본 마가복음 10장에서 이들은 자신의 간음죄를 가리기 위해 “모세의 율법”을 들고 나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불쌍한 여자의 간음죄를 처벌하기 위해 “모세의 율법”을 들고 나와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는 대신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대답이 없는 예수님을 채근하며 그들의 질문에 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을 하시고는 다시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간음한 여자를 향한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죄인을 향한 태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잔인하고 급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빨리 피를 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3:14-15절은 말씀하기를 “(저희의)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합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입에 올리지만,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은 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고 또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고소하여 죽이기 위한 “덫”에 불과했습니다. 여자를 잡은 이들은, 그 여자를 미끼로 또 예수님을 잡고자 몹시 안달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듣기 원하는 말을 하시도록, 굶주린 들개들이 사냥감을 둘러싸고 짖어대듯이 그렇게 짖어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 대한 긍휼하심이 그 안에 가득하십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시간을 갖고 인내하시면서, 지혜롭게 저 사나운 들개들을 진정시키고, 또 덫에 걸린 이 불쌍한 양을 구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늘 죄인들을 향해 보여주시는 잔잔하고 평안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주님 앞에서라면, 내가 비록 돌에 맞아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그리고 나의 죄가 수많은 사람들의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주님 앞에서라면 그곳은 “푸른 초장”이 되며 “쉴만한 물 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 죄인들에게 푸른 초장이 되시며, 쉴만한 물 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끄럽게 답을 재촉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한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습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처럼 숨막혔던 긴장감은 타이어 바람이 빠지듯 가라앉았습니다.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에 쥐었던 돌을 내려놓았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문득 자신을, 자신의 과거를,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그 여자와 똑같은 죄인이며, 그 여자를 정죄할 자격이 없으며, 오히려 그 여자가 서 있는 그 자리에 자신들이 서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얼굴을 가리며 현장을 빠져나갔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어른들”이 먼저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숙함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숙함”이란 자신의 허물을 알고 이를 부끄러워하며 이로 인해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숙함이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함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그 자리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앞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 없음”을 주장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간음하다 붙잡혀온 이 여자와 그녀를 돌로 치려고 하던 사람들이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용서의 사랑으로 서로를 보듬어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남은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이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고소하고 죽이려는 자들로부터 여자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더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죄 사함”을 베푸셨습니다. 이는 그녀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은 여자는 나가서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어! 당신이 뭔데 나를 욕해! 당신이 깨끗하면 나를 돌로 쳐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 부끄러움을 잊고 보란 듯이 간음죄를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녀를 용서하신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녀를 자유롭게 하신 것은 이제 죄의 정욕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또 하나님은 자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드러난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며 (레위기 11:45), 하나님의 자비하심처럼 자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6:36).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죄를 감추고 합리화하며,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매일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것이 주님의 자비하심과 거룩하심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 앞에 내 죄를 드러내어 씻고 더 높은 거룩함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다다른 그 “거룩함”마저도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인 우리가 “의인”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 각자가 매일 그리고 평생 이 길을 신실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