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에스더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2. 11. 29. 14:34

마리아, 에스더야!

아빠가 이번 주에는 너희들과 별로 전화 통화를 못했구나.
그래도 늘 너희들이 아빠 마음속에 있고
아빠는 쉴 새 없이 너희들과 얘기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동인(driver)이 있단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과 "힘"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구절이 있단다.
요한복음 18:10절 말씀이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나쁜 사람들에게 붙들려가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칼을 빼어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베어버렸다.
베드로는 두려운 나머지 칼을 쓴 것이다.

예수님 보시기에 베드로의 행동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있어서 방해가 될 수 있는
위험하고 경솔한 짓이었다.

마리아, 에스더야.
혹시 "바벨"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 내용 자체는 너희들이 좋아할 지 모르겠지만 메시지가 있는 영화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요약 시작 ===

미국인 부부 리처드(Brad Pitt)와 수잔(Cate Blanchett)이 아프리카 국가인 모로코를 여행한다.

한 편 모로코의 한 농부는 무기상으로부터 총 한자루를 산다.
들판에서 자신의 염소들을 돌보는 두 아들들(나이가 12-14세쯤 된)이
늑대나 들짐승들을 쫓아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총은 원래 사냥 여행을 위해 모로코를 방문했던 한 일본인 사업가로부터 사들인 것이다.

리처드, 수잔 부부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다.
이들 부부가 여행하는 동안 아이들은 미국에 있으며 멕시코인 유모가 돌보고 있다.

사건은 모로코 농부의 두 아들이 멀리 보이는 관광버스를 겨냥하여
총 쏘기 시합을 하면서 시작된다.
작은 아들이 쏜 총알에 버스를 타고 여행중이던 수잔이 맞아 부상을 입는다.
버스는 가까이에 있는 모로코의 외딴 마을에 정차한다.
미국의 언론들은 테러리스트가 미국인을 공격한 것으로 보도하며 난리가 난다.

한편 리처드 부부가 미국에 돌아가는 것이 늦어지면서 유모에게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멕시코에서 아들의 결혼식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대신 맡길 곳을 찾지 못한 유모는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로 건너가 결혼식에 참석한다.

일본에서는 총기의 출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형사가 그 총기의 원래 주인이었던 일본인의 집을 방문한다.
그 일본인 사업가에게는 귀가 들리지 않는 치에코라는 여고생 딸이 있다.
치에코는 형사가 방문한 것이 얼마 전에 일어났던 엄마의 자살과 관련하여
아빠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모로코의 외딴 마을에서 리처드 부부는 미국 대사관과 접촉하면서 구조를 기다린다.
미국 정부는 외교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두려워 빨리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
그 사이 관광버스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더운 날씨와 낮선 곳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인내심을 잃고 이들 부부를 남겨두고 떠나 버린다.

모로코 경찰은 수사망을 좁혀
마침내 그 모로코 농부가 그 총을 구입했음을 알아내고 그의 집으로 향한다.
농부는 두려움에 두 아들을 데리고 도망을 하지만
중간에 경찰들과 맞닥뜨려 총격전을 벌이고 이 과정에서 큰 아들이 죽는다.

멕시코를 방문했던 유모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검문소에서 문제가 생겨 도주하다가
아이들과 함께 사막에서 고생한다.

=== 요약 끝 ===

보다시피 스토리가 좀 뒤죽박죽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반복되는 한 가지 주제가 있다.
곧 "두려움"이 "소통(communication)"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벨"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것 같다.

만일 아이들이 자신들이 한 짓을 곧 아버지에게 알리고 아버지가 이를 경찰에 알렸으면
조금 혼나기는 했겠지만 이렇게 큰 일로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혼날 것이 두려워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감추고
이를 나중에 발견한 아버지 또한 신고하지 않고 처벌이 두려워 도망을 한다.

유모 또한 리처드 몰래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로 건너가며
돌아올 때도 문제를 드러내놓고 해결하지 못하고 도주하다가 사막에서 헤맨다.

리처드는 죽어가고 있는 아내로 인한 걱정에 버스가 떠나는 것을 막지만
다른 승객들은 더위와 두려움으로 바삐 그곳을 떠나버린다.

치에코는 엄마의 죽음에 아빠가 관련되어있을까 의심하고
아빠가 잘못되는 것이 두려워서
찾아오는 형사에게 거짓말을 한다.

communication이 잘 되었으면 쉽게 끝날 일들이
두려움으로 인해 더 큰 문제들로 증폭(amplify)되고
이를 해결하게 위해 힘(force)를 쓰면서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큰 사건이 되고 만다.

단 한 발의 총알이 온 세상을 뒤흔든 것이다.
어떻게 한 발의 총알이 온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까?
그 원리는 무엇이냐 하면 바로 "두려움"과 "힘"의 원리다.

작은 일이 "두려움"을 낳으면서 큰 일로 증폭되고 큰 반응을 일으킨다.
이 큰 반응은 더 큰 두려움을 낳고 더 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핵반응"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성경에도 비슷한 예가 있단다.
사무엘하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암몬 왕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왕이 되었다.
다윗왕은 나하스가 그에게 베푼 은혜를 기억하고
이 은혜를 갚고 또 나하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그의 아들 하눈에게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하눈의 신하들은 이런 다윗왕의 친절을 오해하고
다윗의 사신들이 그 땅을 정탐하러 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하눈은 다윗의 신하들의 수염을 깎고 그 옷을 찢어 돌려보냈다.

암몬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윗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한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사과하기는 커녕 다윗의 보복이 두려워 이번에는 큰 전쟁을 준비했다.
이스라엘과 암몬 및 주변 나라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두려움으로 시작된 작은 오해가
점차 큰 일로 발전하여 결국은 큰 전쟁이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은 나라들 간의 일 뿐 아니라
우리 생활의 주변에서도 거의 매일같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너희들이 가끔 서로 싸우는데
아빠가 보기에는 "작은 일"을 갖고 그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너희에게는 "작은 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 속의 두려움이 "작은 일"을 "큰 문제"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생기면 어떻게 소통(communication)을 할까?
바로 힘(force)를 의지하는 것이다.

차근차근 설명을 하거나 이해해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두른다 (베드로가 칼을 휘두른 것과 같이)
일어나서 고함을 치거나,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거나,
협박을 하거나 등등..

우리는 일상에서 항상 친절한 말들을 주고 받으며
"두려움"과 "힘"의 원리와 상관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의 깊은 곳에는 이 원리가 뿌리 깊이 내려져 있단다.
그리고 베드로와 같이 언제든지 칼을 빼어들 준비가 되어 있단다.

베드로와 참으로 대조가 되는 분이 계시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베었을 때
예수님은 "잘 했다"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베드로를 꾸짖으시고
얼른 그 귀를 만져 치료해 주셨다.

예수님은 붙잡히고 못박혀 고통을 당하실 당사자이셨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호할 "힘"을 갖고 계셨다.
마태복음 26:53절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이렇게 큰 힘이 있으시지만 예수님은 그 힘을 쓰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삶의 원리는 "두려움"과 "힘"이 아니다.
예수님의 삶의 원리는 "사랑"과 "진리"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인들을 사랑하심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예수님과 세상 사람들의 차이를 알겠니?
그 차이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겠니?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두려워하는 인생들의 연약함을 아주 잘 이해하신단다.
심지어 두려운 나머지 예수님께 무력을 쓰는 악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으로 품어 주신단다.
그들이 놀랄까봐 저항하지도 않으시고 묵묵히 자신을 맡기신단다.

아빠가 "사랑"과 "진리"라는 말을 쓰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예수님의 마음을 다 이해하고 쓰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죄인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순종"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우리가 평생 생각하고, 사모하고,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과 진리의 원리를 따라 살면
두려움이 증폭되거나 작은 일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단다.
또한 "힘"을 쓰지 않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다.

세상의 방법대로라면
예수님은 천사들을 불러서 악한 자들을 벌하고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을 협박하여 두려움을 심고
세상의 왕이 되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방법을 쓰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이다.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실은 승리한 것이었다.
"사랑"과 "진리"의 하나님의 법이
"두려움"과 "힘"의 세상의 법을 이긴 것이다.

마리아, 에스더야!
아빠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니?
될 것이라고 믿는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이로 인해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을 때
우리에게 "힘"을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야겠다.

사무엘상 24장에 있는 말씀이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고 있었다.
피곤했던 그는 엔게디 황무지의 한 굴에 이르러 들어가 잠시 낮잠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그 굴 깊은 곳에는 다윗의 일행이 있었다.
다윗의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기회라고 말했다.
빨리 가서 잠들어 있는 사울왕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왕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벤 후에
이것이 마음에 찔려서 몹시 힘들어 하였다.
다윗은 자기의 원수에 대해 "힘"을 쓸 기회가 있었지만
그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또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사울을 사랑하고 존중했다.
다윗은 예수님을 닮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다.

마리아, 에스더야!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처럼 다윗처럼 "사랑"과 "진리"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아무리 어렵고 무서운 일이 생기더라도
너희들 마음에 "두려움"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또 두려운 나머지 "힘"을 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항상 하나님을 믿어라.
죄인들을 사랑하고 진리에 순종하거라.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러면 잠시는 괴롭고 속상하고 실패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너희도 예수님처럼 승리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약속이다.

부디 "두려움"과 "힘"으로 살지 말고
"사랑"과 "진리"로 살거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살거라.

사랑한다 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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