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4:32-4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4. 3. 13. 06:01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4:32-42

 

접붙이기 또는 접목(接木) 서로 다른 종의 식물 조직을 접붙여 하나의 개체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옆의 그림에서와 같이, 뿌리를 가진 대목 상처를 내고 그곳에 씨눈을 포함하고 있는 접순 붙여 고정시킵니다. 접목을 통해서 얻을 있는 이점은 개체의 장점을 모두 가진 새로운 개체를 만들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장이 빠른 나무를 대목으로 사용하여 여기에 열매의 형질이 좋은 순을 접붙이면, 성장도 왕성하고 열매도 좋은 새로운 나무 개체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믿는 자의 구원을 접붙이기로 비유한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1:16절은 뿌리가 룩한 가지도 그러하니라하며, 17절에서는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입는 되었다 말씀합니다. 24절은 네가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다 합니다. 여기서 감람나무,” “좋은 감람나무 예수님이시며, “돌감람나무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른 로마 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 말씀들에 따르면, 믿는 자의 접붙임은 앞에서 언급한 농부들이 사용하는 접붙임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농부들의 접붙임에서는 뿌리와 줄기가 되어 왕성한 생장 능력을 제공하는 대목과, 가지가 되어 좋은 형질의 열매를 맺는 접순이 각각 장점 갖고 있으며, 장점들이 합쳐져서 새로운 품종의 좋은 나무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접붙임에서 돌감람나무 자체로는 아무런 장점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앞에 인용한 말씀에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다 합니다. 돌감람나무는 본성 악하여 먹을 없는 딱딱한 열매를 겨우 맺을 뿐입니다. 이런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 흡수하여 비로소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돌감람나무가 자기 본성을 거스려 좋은 열매를 맺으며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오직 참감람나무로부터 오는 좋은 형질과 왕성한 생명력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라는 이름은 기름을 짜는 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그곳에 기름 짜는 틀이 있어서 이렇게 불린다고 합니다. 겟세마네는 감람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22:39절에는 겟세마네라는 이름 대신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1:37절에는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다 합니다. 말씀들로 미루어 ,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기슭의 겟세마네 동산에 자주 가셔서 그곳에서 쉬시며 기도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의 36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신 목적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뜻에 순종할 힘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힘을 얻어 뜻에 자신을 헌신하기 위함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아들이 완전히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마시지 않고 고통의 시간을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기도하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한하나님께 당연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실 있는 능력 있음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가장 완벽한 기도의 모델이라고 있습니다. 특히 육체를 가진 우리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를 위해 완벽한 기도의 모델이 되는 것은 예수님 자신도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5:7 말씀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주로 나의 원하는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 앞부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하시면서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몸과 생명을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실진대, 우리는 더욱 간절하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하며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간절하게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원하는 나의 형질이 항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농부들의 접붙임에서는 뿌리와 줄기가 되는 대목의 강한 성장력 (능력)” 열매를 맺는 접순의 좋은 형질 ()” 합쳐져서 좋은 나무가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로 비유하여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강한 능력 나의 좋은 성품 합쳐져서 우리 인생에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은 본성이 약하고 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로 이식되는 영적인 접붙임에서 접순 되는 내가 자신의 좋은 형질 갖고 하나님의 능력 덧입어 좋은 열매를 맺을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능력도, 좋은 형질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해야 하는 영적 싸움들 하나입니다.

 

37-38절에 예수님께서는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깨우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동안도 깨어 있을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시몬의 상태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설명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영어 성경에서는 “The spirit is ready” (KJV) 또는 “The spirit is willing” (NIV)으로 번역합니다.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다,” “마음에 의지가 있다 뜻입니다. 여기서 원하다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prothumos (πρόθυμος)”인데 이것은 마땅히 해야 일을 하려는 마음의 의지 또는 준비 상태 말합니다. “마땅히 해야 속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밖으로부터 내게 부여되는 것이며, 내가 나를 부인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대하여 원하시는 입니다. 그것을 준비가 되어있으며 그것을 의지가 있다는 말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마음에는 원이로되라는 말의 뜻입니다. 성경 안에서 찾을 있는 다른 예로, 로마서 1:15절에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쓰기를 나는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단어가 쓰였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실 , 여기서 원하다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thelo (θέλω)”인데 이것은 자연적으로 마음이 원하며 끌리는 상태 말합니다. 말은 속의 본성적인 욕구를 표현할 사용됩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며 마음을 준비하는 씨름이 필요 없는,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나를 재촉하고 자연적인 욕망입니다. 성경에서 찾을 있는 다른 예로, 마태복음 12:38절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합니다. 이들이 표적 보기를 원함은 깊은 불신, 교만, 호기심에서 비롯된 그릇된 욕망입니다. 말은 하나님께 또는 예수님께도 사용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8:3절에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십니다. 예수님은 본성이 선하시고,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원하시는 바가 항상 선하고 거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십니다.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만 육신이 약하여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이란 단순히 우리의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 마디로 말해서 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의 원함입니다. 이것은 중심의 (self-centered life)”이며 나를 위한 입니다. 요한1 2:15절에서 사도 요한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합니다. 그리고 16절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모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육체는 세상에 속해 있는 입니다. 육체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통해서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속에 이런 정욕들과 자랑들이 강할수록 나는 세상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약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8). 베드로의 몸이 몹시 피곤하고 졸린 것은 그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그의 마음 속에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무거운 세상의 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짐들을 채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어둡고, 발걸음은 무겁고, 눈은 피곤했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좋은 소원(),” “ 자신을 위한 육체의 소원들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소원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나의 좋은 소원()들을 이루어 주시옵소서하는 것이 베드로의 기도였습니다. 그는 이루어질 없는 기도 드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 오직 하나님의 이루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나의 소원()” 위해 살고 있는 베드로는 피곤하고 졸릴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 접붙임을 받았지만 자신의 좋은 형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목 되시는 예수님(참감람나무)께로부터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능력도 흡수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본성 붙들고 있는 자연인(돌감람나무) 베드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졸고 있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우리가 매일 겪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아버지의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대신 아버지의 택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할 그가 미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나의 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여자를 유혹할 말하기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합니다. 말을 들은 여자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자 그것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만큼 탐스럽게도 보였습니다. 이제 나의 하나님의 앞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신 말씀은 이제 그녀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가물거리고, 자신이 몸으로, 눈으로, 마음으로 원하는 바는 그녀의 바로 앞에서 또렷하고 강렬하게 그녀를 유혹했습니다. 아마도 여자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짜릿한 흥분, 강렬한 욕망, 눈이 밝아옴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잠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그녀의 기억 속에서 빛을 잃고 가물가물 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음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시험 중에 나의 뒤로 하고 아버지의 분별하여 붙들 있을까요? 이것의 열쇠는 겸손입니다. 그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겸손한 믿음이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겸손한 사랑입니다. 마귀는  앞세워 나로 하여금 자기 영광을 구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도록 부추깁니다. 내가 겸손하지 않을 , 이런 마귀의 유혹은 꿀처럼 달콤하고 해처럼 빛나며 첫사랑처럼 흥분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런 유혹을 뿌리치는 겸손 마치 절에서 면벽 수도를 하면서 마음을 비우는스님처럼 되라는 말로 이해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욕망이며,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욕망입니다. 그리고 욕망이 이루어질 , 우리 안에 기쁨이 임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욕망 있을 우리는 시험을 이기고 깨어있는 , 낮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예수님의 기도는 뭔가 모순되게 들리기도 합니다. “나의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는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며 기도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결코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는 것이 또한 나의 소원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하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안에 나의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영원하게 나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하나 없는 100세의 늙은 노인입니다. “어린 아니고, 이제 말라비틀어져서 젖가락처럼 앙상한 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들과 열왕들과 나라들을 약속하십니다. 기도는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앙상한 가지 같은 안에 담는 노력이며 싸움입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어려운 영적 싸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앙상한 가지 같은 안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빨아들이는 일은 십자가를 지는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수반합니다. 마치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가 엄마의 살을 찢고 밖으로 나올 엄마가 겪는 고통을 매일 매순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22:43,44절에는 예수님께서 기도의 씨름을 하시는 동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도왔다 하며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진 예수님을 통해,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성령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사단 마귀와 죽음의 권세를 멸하시는 거대한 하나님의 뜻을 단번에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몸으로 감당하시는 예수님께 나의 전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살과 피를 온전히 드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안에 모시는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거룩한 욕망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로 접붙임을 받은 접순 되어, 매일 기도로 앙상한 가지 같은 안에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흡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영혼이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송하는 신령한 열매가 맺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