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4:27-3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4. 2. 22. 03:55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4:27-31

 

성경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이야기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자주 사람은 인도함을 받는 으로, 그리고 하나님은 양을 인도하는 목자 비유됩니다. 시편 78:5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떼 같이 지도하셨다 합니다. 시편 23:1절에서 다윗은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 각자는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항상 기억해야 가장 중요한 명제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그들의 삶에 길잡이가 만한 신조같은 것을 정하고 이를 붙들고 삽니다. 교훈, 급훈, 사훈 등과 같이 어떤 그룹이 지향하는 가치들도 있으며, 개인들은 인생의 좌우명(座右銘)” 정하고 이를 따르기도 합니다. 좌우명이라는 말의 뜻이 재미있습니다. “ 앉은 자리의 오른편에 두고 보고 기억하고 명심하는 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좌우명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 것입니다. 말씀을 명심하고 지킴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르며, 반대로 말씀을 잊으면 우리는 길을 잃고 결국 생명도 잃게 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을 대리하는 인간 목자 지도자를 세우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양들을 인도하도록 하십니다. 성경에는 모범이 만한 인간 목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모세, 사무엘, 다윗과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에게도 연약한 면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음으로 목자의 무거운 짐을 충성스럽게 끝까지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범적인 몇몇 지도자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인간 목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그들에게 주어진 지도자의 권세를 이용하여 양들을 억누르고, 그릇 인도하며, 오직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 아래서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데는 커다란 난관이 있습니다. 어려움의 근원은 첫째로 양들이며, 둘째로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들입니다. 누가복음 6:39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있느냐 둘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릇된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인도하는 형국은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같습니다. 실족할 밖에 없습니다. 문제들 중에 위중한 것은 물론 그릇된 지도자들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바를 알지 못하는 소경과 같습니다. 양들의 소경됨은 그들의 당연한 형질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는 다릅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자가 소경이 되었을 ,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게 됩니다. 이와 함께 양들도 함께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종류의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두 자신을 버릴 것을 예언하시면서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하는 스가랴서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스가랴서 11장에는 양과 목자에 관한 말씀들이 나오는데 1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동안 내가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말씀에 나오는 목자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이끄는 그룹의 지도자들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의미한다고 해석됩니다. 스가랴 11:5절에는 이들이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양들에게 어떻게 했음을 말합니다. “ 자들(buyers)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자들(sellers)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로다 하고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양들은 사고 파는 물건 불과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양들을 거래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이렇게 하여 부요함을 얻었을 이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는 축복으로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런 목자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빛이 양들에게 결코 닿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러 지도자들 아래서 백성들은 아무런 빛도 소망도 없는 컴컴한 절망만을 경험할 뿐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며 은혜의 빛으로 나아오는 양들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양들에게는 선한 목자 악한 삯꾼 목자 구분할 있는 안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주 선한 목자의 인도를 거부하고 사기꾼들의 말에 속아넘어갑니다. 심지어 악한 지도자들의 거짓 선동에 휘말려 선한 목자를 핍박하고 죽입니다. 그래서 여러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고 죽었으며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도 같은 길을 걸으셨습니다.

 

선한 목자와 악한 삯꾼 목자는 양들을 인도함에 있어서 어떻게 다를까요?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차이는 인도함의 목적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의 생명을 위해 그들을 인도합니다. 요한복음 10:1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양들을 인도하시는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아니라 생명을 더욱 풍성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선한 목자의 목적은 자체입니다. 양의 생명이며 양의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마음은 오직 목적을 위해 헌신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들이 혹은 자기 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3, 4, 14). 반면 악한 지도자들은 양들의 생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같은 10:1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이라고 하십니다. 더하여 12절에서는,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헤치느니라하십니다. 말씀에서 예수님은 악한 지도자들을 삯군 도적이라고 하십니다. 이들에게 양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울 수단에 불과합니다. 삯군은 고용된 사람(hired man)” 돈을 받고 받은 만큼만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양에 대한 심정이나 책임감은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도적은 양들의 생명을 빼앗아 고기로 자신을 먹이고 살찌웁니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양의 행복에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어떻게 양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배를 채울 것인지에만 골몰합니다.

 

양들을 인도함에 있어서 선한 목자와 악한 삯꾼 목자 사이에 하나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어떻게 인도하는가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인자와 진리 혹은 은혜와 진리 인도합니다. 반면 악한 목자는 양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 양들을 은혜와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소경 양들은 앞을 없으며 그래서 자주 길을 잃거나 구덩이에 빠집니다. 이런 양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일은 지극한 인내와 사랑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의 주님이십니다. 순간도 양들을 인도하심에 있어서 성품의 본체가 되는 은혜와 진리 벗어나신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은혜와 진리 서로 부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적인 은혜와 진리는은혜이거나 혹은 진리이거나입니다. 어떤 지도자는 너그러워서양들을 방관하거나, 혹은 엄격해서양들을 단속합니다. 이래저래 양들은 고통을 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인도하심은 은혜와 진리입니다. 안에는 없는 자유와 평화가 있으며, 동시에 밝게 빛나며 양들을 인도하는 진리의 빛이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 안에서는 은혜와 진리가 동시에 함께 있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는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때문입니다. 잠언 16:6 말씀입니다.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보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8:11). 예수님께서는 나도 …”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나도 …” 심지어 나도 … (even I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자를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무도 여자를 향해 감히 돌은 던지지 못했습니다. 같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람만 그녀에게 돌을 던질 있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 되십니다. 심지어 그런 예수님께서도 그녀를 용서하십니다. 여자의 죄가 진리의 되신 예수님 앞에 온전히 드러났으며, 동시에 주님의 인자하신 사랑으로 온전히 씻겨졌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덫에 걸렸던 양을 풀어주듯 여자를 보내시며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말씀하십니다. 이제 죄를 떠나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안전하고, 행복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은혜와 진리로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선한 목자가 양들을 은혜와 진리로 인도하는 반면, 악한 목자는 양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움직입니다. 당근과 채찍이란 다시 말해서 유혹과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유혹과 두려움 정확히 은혜와 진리 반대말입니다. 악한 지도자들은 달콤한 거짓말로 진리를 거스르며 양들을 유혹하고,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용하여 양들을 협박하고 움직입니다. 양들은 본성적으로 쉽게 미혹되고 쉽게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래서 당근과 채찍은 양들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있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이로 인해 양들은 자주 은혜와 진리로 인도하는 참된 목자들보다도 당근과 채찍을 활용하는 수완 좋은 거짓 목자를 신뢰하고 따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움직이는 동인(動因) 모두 당근이거나 채찍입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들과 두렵게 하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세상은 길도 없고 빛도 없는 컴컴한 광야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욕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음성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광야에서 길을 잃게 됩니다. 히브리서 3:10-11절에 인용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하시며 탄식하십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혹된다 말은 진리에서 혹은 바르고 안전한 길에서 벗어난다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양들을 위해 광야 같은 세상에 닦아 놓으신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 하십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님 이외에 양들을 위한 다른 길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27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말씀은 스가랴 13:7절에서 것입니다. 스가랴 13:7-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목자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손을 드리우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삼분지 일을 가운데 던져 같이 연단하며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백성이라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리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하심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싫어해서 그를 버리고 떠난다는 말이 아니라 목자 되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실족(stumble)”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믿고 의지하며 따르던 목자가 갑자기 그들의 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말씀을 강하게 부인하며 말했습니다. “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베드로가 어떻게 넘어질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있게 부인했지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자를 치시고 양들을 흩으셨을까요? 스가랴 말씀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목자를 가리켜 목자라고 하시며 짝된 (my fellow)”라고 부르십니다.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칼로 치셨습니다. 그러셨을까요? 이는 가짜 목자 따르는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에게나 주님을 따르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나 동일하게 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인도하는 삯꾼 목자를 따릅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은혜와 진리 그들을 인도하시는 목자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이는 그들이 진리를 떠나서 욕심과 불신 가운데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보는 앞에서 목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를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더 굳어졌습니다. 욕심과 두려움을 따라 사는 그들에게 벌거벗은 채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예수라는 사람의 이름은 이제 축복이 아니라 저주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이들은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믿고 따랐습니다. 주님과 동고동락하며 가르치심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목자 예수님"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자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실 것이라고 믿어지는 가짜 목자였습니다. 목자 예수님을 따르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헛된 소망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마음으로 따르고 있는 것은 목자 예수님이 아니라 그들의 헛된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으로 즉위하시는 소망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예수님은 죄인처럼 체포 당하시고, 심문 받으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그렇게 돌아가시고, 제자들의 꿈도 산산이 깨어졌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무력 구데타를 일으킬 것으로 생각했던 같습니다. 그는 칼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최후의 결전을 앞둔 결사대처럼 저는 끝까지 주님 곁에 남아서 죽도록 싸우겠습니다!” 하는 심정이었던 같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올인(all-in)했던 예수님이 한번 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를 베드로는 넘어졌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겪는 심판은 세상 사람들이 겪는 심판과는 전혀 다릅니다. 앞서 인용한 스가랴서 말씀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손을 드리우리라하십니다. 더하여 말씀하시기를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삼분지 일을 가운데 던져 같이 연단하며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백성이라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같이 연단하시고 같이 시험하셨습니다. 모든 과정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께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을 위한 고난입니다. 이는 그들 속에 숨겨져 있는 헛된 소망들을 드러내고, 깨뜨리고, 깨끗하게 하는 시험과 연단의 과정입니다. 위에 인용한 , “작은 자들에게는 내가 손을 드리우리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영어 번역들은 “I will turn my hand upon the little ones”이라고 하며 (KJV, ASV), 어떤 것들은 “I will turn my hand against the little ones”이라고 합니다 (CSB, NKJV, NIV ). 앞의 번역은 하나님께서 작은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신다는 의미이지만, 후자의 번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스른다는 뜻입니다. 저는 번역이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양들을 보호하시며 동시에 훈련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목자로 따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푸른 초장과 만한 물가 인도하시지만 동시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다니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길을 통과해야만 그가 영원히 거할 여호와의 도달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론 험한 여정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보호하심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바로 은혜이며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베드로의 연약함을 아시고 마음 깊은 곳에 숨은 헛된 소망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드러내시고 용서하십니다. 주님은 항상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목자이십니다. 본문의 2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그곳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제자들이 따라야 목자 예수님입니다. 이전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를 없이 당근과 채찍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가장 당근과 가장 강한 채찍 가지신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단 마귀는 예수님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천사 모습을 하고 나타나 때로는 헛된 소망으로 때로는 두려움으로 양들을 미혹합니다. 소경 양들은 이런 마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그들의 죄를 드러내시고 씻으시며, 그들의 소경 눈을 진리의 빛으로 밝히실 있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다시 만나게 예수님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제자들 또한 세상 소망에 대해 죽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양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따르는 예수님은 이전의 가짜 목자 아니라 그들을 구원으로, 생명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목자 되시는 것입니다. 목자 예수님의 인도하심은 참으로 신비하고 경이롭습니다. 주님의 순결하심과 같이 주님의 인도하심은 점도 흠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오직 은혜와 진리로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귀하신 목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