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전서 5:1-1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4. 2. 5. 21:12

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전서 5:1-11

 

우리는 주변에서 여러가지 종류의 색상들을 봅니다. 인간이 눈으로 구별할 있는 색상의 수는 대략 150-200 정도라고 합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할 있는 색상들은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색들이 있음에도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삼원색(primary colors)이라고 불리는 노랑, 빨강, 파랑 색이 다른 비율로 섞여서 만들어지는 혼합색들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안료(pigment) 삼원색을 섞으면 검정색이 되고, 빛의 삼원색을 섞으면 흰색이 됩니다. 이런 색에 관한 자연계의 상식을 비유로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크게 그룹의 사람들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는 장로들(elders)”이며, 다른 하나는 젊은 자들(young men)”입니다. 장로들에 대한 권면이 주로 어떻게 하나님의 무리를 돌볼 것인가 관한 것임을 생각할 , 젊은 자들은 장로들이 돌보는 하나님의 무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장로들은 양들을 돌보고 인도하는 목자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사역자들을 목사(pastor)”라고 부르는데, 말의 어원은 라틴어로 목자(shepherd)” 뜻하는 “pastor” 그리고 라틴어로 초장으로 인도하여 풀을 뜯게 하다 (lead to pasture, set to grazing, cause to eat)" 뜻을 가진 “pascere”라는 동사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장로들은 모두 양을 돌보는 목자 또는 목사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장로들과 그들이 돌보고 인도하는 무리들을 곰곰이 묵상하다 보면, 옛적에 모세의 인도 하에 가나안 땅을 향해 광야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이 연상됩니다. 광야에는 여러 대적들이 우는 사자 같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광야 길을 걸으면서 백성들은 많은 고난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시며, 모세 여러 장로들을 주님의 지팡이로 쓰셔서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소망 목적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겪는 고난은 의미 없는 고난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코케 하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간 받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며, 굳세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견고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훈련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우리 각자는 세상을 사는 동안 순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항상 맥락에서 보고, 이해하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가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들은 크게 가지로 요약할 있습니다: 첫째,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둘째, 염려하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라; 셋째, 근신하며 깨어 있으라. 저는 베드로의 교훈으로부터 죄의 삼원색 (primary colors of sin)” 그리고 의의 삼원색(primary colors of righteousness)” 봅니다. 죄의 삼원색은 교만과 두려움과 탐욕입니다. 그리고 의의 삼원색은 겸손과 믿음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백성들을 광야길로 인도할 여러 이들과 크게 충돌하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백성들의 죄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가지가 민수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1:4-6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울며 불평하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 있었다 했습니다 (11:18).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신실하게 공급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탐욕 마음에 품자,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가득해졌습니다. 옛날 애굽에서의 삶이 생각나고 먹었던 맛있는 음식들이 그리워졌습니다. 그들은 이상 목자 하나님을 따를 기분이 나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13,14장은 다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두려움문제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 땅을 탐지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족장들 다수가 매우 두려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수기 13:31-33).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밤새도록 울며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14:1-3). 이들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대신, 두려움에 빠져 다시 그들의 목자 되신 하나님을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민수기 16장은 사람들의 교만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의 어떤 자들이 당을 짓고 일어나 그들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를 거스르며 말했습니다.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민수기 16:1-3). 그들을 비난하여 말하기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과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16:13-14). 이들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겸손한 종이 되어 같은 자신들을 돌보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세우신 지도자를 실패한 지도자, 무능한 지도자, 악한 지도자, 심지어 교만하고 폭압적인지도자로 정죄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심히 교만하여, 왕의 자리를 놓고 모세와 경쟁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 삼원색 교만과 탐욕과 두려움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그들만이라면 참으로 원수 마귀에게 당장 삼켜질 위태로운 존재였습니다.

 

교만과 탐욕과 두려움은 죄의 삼원색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이것들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세상에서 교만과 탐욕과 두려움은 사람의 영광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우리가 매일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 바로 높아지는 , 많이 갖는 , 그리고 있는 어렵거나 위험하거나 두려운 것들로부터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러워하거나 자랑하는 영광의 색깔들은 교만이나, 탐욕이나, 안일함이거나 혹은 이것들이 여러 모양으로 섞인 것입니다. 만일 이것들의 원색을 모두 가졌다면 그는 틀림없이 바벨론 왕이나 로마 황제와 같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광야가 영원히 거할만한 천국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고나 교훈의 말도 듣지 않으며, 정착한 자리를 떠나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광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마귀에게 삼켜지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합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믿음을 굳게 하라고 합니다. 근신하며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겸손과 믿음과 근신하는 마음은 조용히 골방에 앉아서 자신의 내면을 단련시키는 마음 수련(mind training)” 아닙니다. 겸손과 믿음과 근신하는 마음이란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고 하나님과 발을 맞추어 함께 걷는 영적 기술(spiritual arts)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의 영광을 좇아 살던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고난 대해 여러 언급합니다. 1절에서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소개하며, 9절에서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한다 하며, 10절에는 너희가 잠간 고난을 당한다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고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우리를 살피시며 간섭하심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견고하게 하심을 배웁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심을 배웁니다. 겸손과 믿음과 근신하는 마음은 우리가 생명을 바쳐 연습하고 얻어야 영적 기술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과 화평한 삶을 살게 됩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도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해야 합니다; 둘째, 양을 돌보되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양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무리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흥미롭게도 장로들에 대한 권면은 모두 하나님의 무리를 돌보는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무리를 돌보는 일이 가장 중요한, 아니 유일하게 중요한 일임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셨을 그에게 가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하나는 양을 치라 것이며 (15,16,17), 다른 하나는 나를 따르라 것입니다 (19,22). 베드로가 장로로서 감당해야 일이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양들을 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목자장(Chief Shepherd)”라고 부릅니다 (4). 베드로가 따르고 배워야 예수님은 다름이 아니라 목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양무리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셨는지를 배우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장로로서 베드로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일은 무리를 돌보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마음을 들여 배워야 예수님은 목자 예수님 것입니다.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전한 말씀들은 사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 예수님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스스로 버리노라하십니다 (요한복음 10:18). 오직 자신의 더러운 이익을 위해 양들을 이용하고 버리고 달아나는 삯군과 달리 (12), 예수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게 하시고자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10,11). 예수님께서는 뒤에서 막대기를 휘두르며 양들을 몰지 않으시고, 대신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시고 그들 앞에 앞서 가시며 인자한 음성으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3,4). 목자장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장로들과 모든 사역자들의 되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배우며 동시에 주님의 무리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오직 양들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던 모세를 통해 있듯이 하나님의 무리를 인도하는 일은 푸른 초장에서 양들이 풀을 뜯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완악한 양들의 죄와 씨름하는 지독하게 어려운 작업입니다. 불평하는 백성들과의 싸움에 지친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하소연을 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민수기 11:11,12). “ 책임이 심히 중하여 혼자는 모든 백성을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민수기 11:15). 모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고난 또한 양들의 죄를 담당하시는 고난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에게 나아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합니다 (요한복음 1:29). 우리에게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범한 작은 실수를 감당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영혼들을 품고 그들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실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 것인지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고난은 정말 일말의 즐거움 없는 순수한 고난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들을 위해 같은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장로의 직업이며, 목회자의 직업입니다. 장로들의 죄는 양들의 죄에 비해 훨씬 위중합니다. 왜냐하면, 장로들의 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따라서 고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의 죄는 자신들을 멸망시킬 아니라 양들의 생명까지도 앗아갑니다. 나아가 장로들이 범죄할 , 하나님께서 양들을 인도하기 위해 세워놓으신 진리의 등대가 오히려 양들을 유혹하고 그릇 인도하는 마귀의 요새가 됩니다.

 

본문의 4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 또한 그가 얻기를 원하는 가지 면류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는 의의 면류관(crown of righteousness)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그를 위해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상입니다 (디모데후서 4:7,8).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의 양들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의 형제들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19,20). 우리는 예수님을 따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무리들을 돌봄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세월을 아껴 예수님을 따르며 그의 양들을 돌보는데 더욱 헌신할 있도록 주께서 도우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