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마가복음 14:10-2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12. 16. 22:02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마가복음 14:10-21

 

사람들마다 자신(myself)” 이해하는 독특한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Who/What am I), 나는 어떤 사람인가 (How am I),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What do I do),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For what am I) 등의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의식하든 의식을 하지 않든 나름대로의 대답을 갖고 삽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인식을 기초로 사람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주로 경제적 능력 기초로 사람을 평가하고 인식합니다. 재산, 직업, 경제적 전망 등이 자신과 남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출신 집안이나 외모, 학력 등도 나를 따라다니는 본질적인 구성 요소들 하나입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relationship with God)”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예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소개됩니다 (마가복음 1:1, 마태복음 16:16, 요한복음 20:31, 로마서 1:4 ).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신분이라고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님의 직업이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평생을 하나님의 아들로 사시면서 그리스도의 직무를 수행하시고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발견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개인의 정체성, 사람의 전체의 내용, 그리고 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결정 인자입니다. Michael Casey라는 분이 하나님을 향하여(Toward God)”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라는 특정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과 사이의 독특한 관계입니다 (What makes me specifically myself is a uniqu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e).”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사람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생김새, 성격, 인생 경험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바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오직 이것이 나를 나로 만들며, 오직 이것으로 나의 현재와 미래와 영원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Michael Casey 말하기를 우리 신앙의 합당한 목적은 우리를 덮고 있는 여러 불순물들을 걷어내고 오직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 더욱 밝게 빛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The proper purpose of religion is to scrape off the grime so that the gifts of God can shine with greater clarity)“라고 합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금식하시는 극한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생명을 사실 것을 고집하셨으며,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셨습니다. 이런 고난과 시련으로 우리의 거짓된 불순물들을 제거하시고 우리 깊은 영혼 속에 숨겨져있는 하나님의 선물들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만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세상의 겉치레들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보지 않고 일생을 시험에 빠져 산다면, 그리고 세상을 떠날 비로소 영혼이 텅텅 비어있음을 발견한다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서운 죽음과 영원한 형벌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서 가룟 유다의 행적을 기록한 내용은 많지 않습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 혹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고, 그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도 거의 없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유다 예수를 소개됩니다 (마태복음 10:4, 마가복음 3:19). 그리고 예수님보다는 관련되어 여러 언급되는데, 그가 궤를 맡은 자이며 (요한복음 13:29), 저가 도적으로 궤를 관리하면서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가며 (요한복음 12:6), 돈을 받기로 약속하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로 했다(마가복음 14:11) 합니다. 그는 마귀 함께 언급되기도 합니다. 마귀가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하며 (요한복음 13:2), 사단이 그에게 들어갔다고도 합니다 (누가복음 22:3, 요한복음 13:2). 가룟 유다에 관한 이런 기록들을 생각하면,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하나였지만 그의 영혼은 돈과 사단 마귀를 가까이 따르고 있음을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은 꾀를 내며 돈을 세는 일로 분주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모든 일을 연관시켜 이해했을 것입니다. 금전적으로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 경제적 전망이 어떠한지를 헤아렸을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 바라보는 시각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가치는 삼십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15). 예수님께서는 그와 천국의 비밀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 대하여 마음을 닫고, 마귀와 그리고 마귀의 자식들과 함께 은밀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와 사단 마귀 사이의 은밀한 비밀이며, “믿음 나와 하나님 사이의 은밀한 비밀입니다. 어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우며 긴밀한지를 있는 척도가 있다면 그것은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비밀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어떻게 나만 모를 수가 있어?” “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하면서 친했던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표출하거나, 혹은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고 있어야 하면서 친근함과 신뢰감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8:10).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오직 그들끼리만 공유하며 외부의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구별시키는 가장 중요한 식별자(identifier)입니다. 비밀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영접하고 따르며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써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자주 더욱 은밀한 세계로 초대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회당장의 딸을 다시 살리실 (마가복음 5:37), 높은 산에 오르셔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변화되실 (마가복음 9:2),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따로 나아가 기도하실 (마가복음 14:33),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구별하여 데리고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자라합니다 (베드로후서 1:16). 사도 요한은 자신이 증거하는 예수님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 대해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합니다 (요한1 1:1).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자신의 깊은 비밀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친히 듣고, 보고, 만짐으로써 이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떨까요? 그에게도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의 비밀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 아니라 마귀와 함께 하는 죄의 비밀이었습니다. 돈궤를 관리하면서 속에 있는 돈을 훔쳐가는 것도 물론 은밀하게 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몰래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돈을 받기로 약속하고 예수님을 넘겨줄 약속을 했습니다. 거래가 이렇게 쉽게 이루어진 것을 보면, 아마도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이전부터 은밀한 교류가 있었던 같습니다. 누가복음 22:6절에 보면 유다가 예수를 무리가 없을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지만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유월절 명절을 피하려고 했었습니다 (14:1,2). 이와 마찬가지로, 유다 또한 무리가 없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넘겨주고자 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하나였지만, 그의 속내는 온갖 비밀스러운 죄의 생각들로 가득했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마귀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사람은 마귀니라하십니다 (요한복음 6:70,71). 이는 그의 내면이 온통 마귀의 생각으로 가득하여, 이상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나 자애로운 사랑의 빛이 거할 자리가 전혀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런 자신을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일상은 지극히 평화롭고, 기회를 엿보는 그의 눈빛은 예리하게 반짝거렸으며,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고, 그의 말은 허풍이 없이 간결하고 명료했으며, 그의 손과 발은 민첩하고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라면, 유다는 마귀의 수제자였습니다. “세상의 되시는 예수님 곁에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이렇게 그늘진 삶을 있다는 것은, 그의 내면이 얼마나 깊은 어두움으로 싸여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자체가 통째로 마귀와 함께 하는 은밀한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비교합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본래 악한 생각이 가득했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있겠으나, 자신을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하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번씩이나 부인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배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사람 모두 돌이키기 어려운 잘못을 범했습니다. 사람들은 설명하기를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는 회개 있다고 합니다. 유다는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으며, 베드로는 회개했습니다. 이것으로 사람은 멸망에 이르고 다른 사람은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근본적인 차이를 생각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의 영혼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예수님과의 진짜 관계또는 이들 속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듣는 착한 첫째 아들이며,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탕진한 문제아인 둘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그들의 기억입니다. 둘째 아들이 이방 땅에서 모든 재산을 잃고 돼지만도 못한 신세가 되었을 이렇게 말합니다. “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누가복음 15:17). 둘째 아들은 고난 중에 풍요롭고 자애로운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버지 안에서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던 자신을 기억했습니다. 반면 첫째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 (29). 그에게 아버지는 죽도록 일만 시키고 별로 해주는 것도 없는 엄하고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고생만 하는 자신이 불쌍하고 처량할 뿐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돌이켰다 하며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합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에 대해서는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했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 속에는 풍요롭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오직 불쌍한 자신에 대한 연민과 이로 인한 불평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아버지의 없었습니다. 반대로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아직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돌아갈 아버지의 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기억하고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유다의 마음 속에 마귀가 들어가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역사한 것과 같이, 베드로 또한 마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22:31절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 밀을 까부른다는 것은 (sift) (winnow) 넣고 심하게 흔들어 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알곡만 남고 껍질이나 쭉정이는 날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하시자, 그는 힘있게 부인하며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리 믿고 자랑했습니다. 그는 껍데기 신앙에 속아서 자신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로 까부르듯 하는 심한 까불림 당했습니다. 그리고 껍질이 제거되었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이상 예수님의 수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미래의 소망이셨던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이와 함께 베드로는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옛날의 갈릴리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심한 까불림으로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여전히 그의 안에 남아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와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만 아는 어떤 비밀이 있습니다. 이전의 베드로였다면, 아마도 벌떡 일어나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소리로 예수님, 제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외쳤을 것입니다. 심지어 어떻게 자신에게 그렇게 당연한 질문을 하시냐고 하며 서운해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베드로 안에 계신 예수님은 오직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의 은밀한 비밀 되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말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는 누구인가 (Who Is Peter)?”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답인 것입니다. 비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안에 친히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고, 지키시고, 베드로로 하여금 알게 하신 것입니다.

 

유다에게는 그와 예수님 사이의 은밀한 비밀이 없었습니다. 슬프게도 껍질이 벗겨졌을 그의 안은 비어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쭉정이였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악한 거래를 후회하며 돌이키기를 원할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하며 유다를 쫓아냈습니다. 마귀와의 비밀 달콤하고 매혹적이지만 끝은 언제나 이렇게 비참합니다. 이는 마귀의 속성이 거짓과 배신이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속삭임으로 많은 좋은 것들을 약속하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동행하는 인생은 쭉정이로 끝나며, 고난이 임할 그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실하시며 신실하십니다. 고난 중에도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믿으며, 예수님과 성령으로 교통할 사람의 내면에 알곡 맺힙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쓸데없는 껍질은 제거되고, 안에 비밀스럽게 숨어있는 주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만 남게 됩니다. 세상은 거대한 타작마당이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3:16-17절에서 세례 요한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말세의 역사는 예수님께서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깨끗하게 하시는 과정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까불림의 과정이 끝났을 , 어떤 사람은 알곡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은 쭉정이 발견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던 진짜 입니다. 그리고 진짜 다름이 아니라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자에게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시고 (마태복음 25:21), 어떤 자에게는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하십니다 (마태복음 7:23). 우리가 세상의 반짝거리는 것들에 속아 세월을 허비하지 않고, 예수님과의 은밀한 믿음의 교제를 통해 주님과의 좋은 기억들을 쌓아가며 알곡으로 맺혀지는 매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