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산 돌이 되시는 예수님 (베드로전서 2:1-1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4. 1. 8. 01:28

돌이 되시는 예수님

 

베드로전서 2:1-10

 

오늘 말씀의 주제는 돌이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 성경의 여러 이야기들 속에서 중요한 모티브(motif) 등장합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여 그의 축복을 가로챔으로 그는 졸지에 아버지 집을 떠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가는 길에 밤에 길가에 있는 돌을 하나 취하여 그것으로 베개를 삼아 잠을 잤습니다. 속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몹시 놀라고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은 베개로 사용했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곳을 하나님의 베델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창세기 28:15-19).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머물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실 물이 없자 모세를 원망하여 말하기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호렙산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자 과연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 백성들과 짐승들이 마셨습니다. 모세는 그곳 이름을 맛사(‘시험하다라는 뜻의)”라고 이름지었는데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하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7:1-7). 흥미롭게도 돌을 소재로 이야기는 모두 여호와께서 여기 (우리) 함께 계신다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또한 베드로는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거하는 신령한 으로 세워진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녀들과 함께 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징한다고 있습니다. 신실하심은 돌과 같이 변하지 않으며 영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나그네 우리가 영원히 거하며, 의지하며, 안식할 처소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4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사람에게는 버린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돌이신 예수라고 합니다. 7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시편 118:22 말씀을 인용하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버린 바가 되었으며,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었을까요? 같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고 묻히실 만큼 미움을 받으시고, 하나님께는 하늘로 올려져 보좌 우편에 앉히실만큼 높임을 받으셨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들이 있을 있겠지만, 오늘 본문 말씀 안에서 답을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신령함 (being spiritual)”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가지 신령한 것들이 나옵니다. 그것들은 신령한 (spiritual milk)” (2), “신령한 (spiritual house)” (5), 그리고 신령한 제사 (spiritual sacrifice)” (5)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신령한 선물들이며, 동시에 신자가 예수님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령한 젖을 먹고 자라며, 자라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지체(member) 되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집의 식구들을 섬기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을 통해서 신자는 점점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나그네(stranger) 되며, 하나님께 대해서는 택하심을 입은 (elect)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2).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의 신령한 인도하심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하늘의 양식 대신 썩는 양식(food that spoils)” 구했습니다 (요한복음 6:27). 그리고 오직 신령한 양식을 주시려는 예수님께 실망하고 모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며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6:68). 그는 썩을 양식 대신 신령한 선택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그가 이제 예수님께 정착했음을 나타냅니다. 세상 나라를 포기하고, 이제 예수님께서 그가 영원히 거할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집임을 영접한 것입니다.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5-18). 베드로는 예수님께 정착함으로써 신령한 으로 세워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는 그에게 어린 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번이나 반복해서 베드로에게 어린 양을 먹이라 부탁하셨습니다. 젊은 베드로에게는 해야 ,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오직 예수님의 양들을 먹이는 일에 그의 생명을 쏟아붓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드릴 신령한 제사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2:1-3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과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베드로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는 기본적으로 3절에서 언급된 주의 인자하심 말합니다. 우리가 구원과 영생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드러냅니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먹으며 자라는 것처럼,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공급받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비교할 , 세상에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은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입니다. 이것들은 전혀 순수하지 않으며 전혀 신령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고 병들게 하며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태어난 아기에게는 아무리 좋은 음식도 모유를 대신할 없다고 합니다. 모유는 아기에게 가장 좋은 영양분을 제공하며, 아이 안에 강한 면역 시스템을 형성하여 각종 질병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에 모유와 같아서 우리를 살찌게 하며 강하게 합니다. 심지어 아이가 자라면서 바뀌는 필요에 따라 모유의 성분도 같이 바뀐다고 합니다. “신령한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5:13-14 말씀입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말씀에서 저자는 (milk)” 단단한 식물(solid food)” 구분합니다. 하지만, 범주로 보면 단단한 식물 또한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순전하고 신령한 포함된다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영적 성장에 맞게 하나님께서 다른 성분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우리가 평생 먹어야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양식 먹기를 중단했을 , 우리의 영혼은 굶주리고 마르, 세상의 악한 기운들에 의해 압도됩니다.

 

4-5a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 예수님은 (living stone)이시며 보배로운 (precious stone)” 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사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죽기까지 죄인들을 섬기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점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일절 깨끗하고 단단한 보석과 같으셨습니다. 보배로운 하나로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자란다고 합니다. 요즘은 다이아몬드를 실험실에서 인공으로 만드는데 합성 과정은 자연 상태에서 천연 다이아몬드가 생성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조 다이아몬드와 천연 다이아몬드는 품질에서 전문가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인조 다이아몬드를 만들기 위한 기본 재료는 다이아몬드 (diamond seed) 흑연(graphite)입니다. 다이아몬드와 흑연은 보기에 너무나 다릅니다. 하나는 단단하고 투명하고 아름답고 귀한 보석인 반면, 다른 하나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있는, 별로 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시커먼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둘은 모두 기본 구성 원소가 탄소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탄소의 결합 형태가 달라서 흑연은 탄소 원자들이 정육면체의 형태로 결합되어 있는 반면, 다이아몬드는 정사면체의 형태로 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흑연에 고온, 고압이 가해지면 탄소 원자들이 분해되고 다이아몬드의 결정 구조로 재결합되며 (crystalized), 이것들이 다이아몬드 씨에 정착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이아몬드 씨가 조금씩 성장하여 보석이 됩니다. 저는 과정이 우리 신자들이 보배로운 되신 예수님 안에서 주님을 닮은 돌이 되며, 주님과 함께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사람은 흑연과 같이 볼품이 없고 평범합니다. 그런 자연인이 예수님 안에서 신령한 젖을 먹으며 동시에 강도 높은 연단의 과정을 겪을 , 우리 안에 보석과 같은 예수님의 형상이 조금씩 결정화(crystalize)됩니다 (갈라디아서 4:19). 그리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결정화된 우리가 보배로운 되신 주님과 합하여 주님의 교회로 세워집니다.

 

베드로는 권고하기를,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신령한 으로 세워짐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합니다 (4b).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 무엇을 말할까요? 로마서 12:1절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리고 12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릴 것인가에 대해서 여러 말로 설명합니다. 맡은 직분을 성실함과, 즐거움과, 겸손함으로 감당합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항상 힘써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합니다. 12장의 마지막인 22절의 결론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것입니다. 제사장의 기본 직무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세상에 전하고 이를 행하는 일이라고 것입니다. 세상의 악과 사람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몸을 바쳐서 하나님의 선하심 세상에 쏟아부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일생을 요약하여 내가 관제(drink offering) 같이 부음이 되었다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6). 예수님 또한 세상 영혼들을 위해 물과 같이 쏟아지셨습니다 (시편 22:14). 마치 반석에서 샘물이 솟아나듯이, 예수님은 모든 영혼들을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섬기셨으며, 이를 위해 몸을 통째로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자기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막힘이 없이 세상에 물처럼 흐르도록 자신을 또한 물처럼 쏟아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되시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항상 맑은 샘물처럼 솟아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예수님을 따라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지며, 자신을 물처럼 온전히 쏟아부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세상에 자유롭게 흐르도록 제사장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혼들에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양식을 사람들에게 나눠줄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예수님은 보배로운 돌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을 시온에 두시고, 하나님의 집의 모퉁이 머릿돌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시기를 저를 믿는 자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되시는 예수님께서 오히려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 되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더하여 말씀하기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진다 합니다 (8). 로마서 9:30-3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 우리가 무슨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믿음에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말씀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으로부딪힐 돌에 부딪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베푸시는 신령한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들의 선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랑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하루 기도하는 , 금식하는 , 먹기 전에 손을 씻는 , 등등. 이런 자기의로 눈이 멀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성전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으로 세우지 못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강도의 굴혈 만들었습니다 (마태복음 21:13).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쏟아부어 겸손히 죄인들을 섬기는 신령한 제사 드리지 않고, 오히려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정죄하며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이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대신, 자신들의 선함을 자랑하고 자신들의 의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나는 선하다,” “나는 옳다 자랑이 숨어있으면 우리는 즉시로 죄인에게 긍휼의 베푸시는 하나님 싫어하게 되며,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거치는 돌이 되게 됩니다.

 

베드로 선생께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보배로운 되신 예수님께 나아와 너희도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참으로 보배로운 말씀이 아닐 없습니다. 우리의 매일은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누리며,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본받고 연습하여 예수님의 형상으로 자라고 주님과 연합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세상에 전하고 같은 사랑으로 영혼들을 섬기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일을 이루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