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예수님의 살과 피 (마가복음 14:22-25)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4. 2. 1. 21:28

예수님의 살과

 

마가복음 14:22-25

 

오래 전에 어린 딸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습니다. 이민을 간지 얼마 안되어 애가 학교에서 놀다가 다쳐서 병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딸을 하룻밤 병원에서 머물도록 했으며, 아내도 딸과 함께 있으면서 병상을 지켰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병원에 가서 딸과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병원에서 딸을 매우 정성스럽게 돌보았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보호자인 아내를 위해서도 매끼 맛있는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밤중에 환자를 체크하러 간호사는 자고 있는 딸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마치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돌보듯 그렇게 조심스러웠다고 합니다. 다행히 딸은 집에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감사해야 상황이었지만 마음의 한편은 매우 무거웠습니다. “병원비때문이었습니다. 좋은 치료는 고마웠지만 치러야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퇴원 수속을 하면서 치료비에 대해서 물으니 창구의 직원이 싱긋 웃으면서 내야 돈이 없으니 그냥 가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모든 뉴질랜드 국민들의 병원비는 정부가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을 알았을 문득 몸이 두터운 보호막으로 싸여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뉴질랜드의 자동차 보험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개별 자동차 보험의 계약 내용은 대물 보험 대인 보험으로 구성됩니다. 재산상의 손해를 담보하는 부분과, 사람의 부상이나 사망과 같은 인명 손실을 담보하는 부분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뉴질랜드 자동차 보험의 계약 내용은 대인 보험부분이 없습니다. 오직 차량 파손과 같은 재산상의 손해만 담보합니다. 자동차 사고로 인해서 사람이 죽거나 다칠 경우에는 국가가 직접 나서서 보험사 역할을 합니다. 국가가 정부의 예산을 들여서 인명 손실에 대한 보상을 하고, 치료와 재활이 필요하면 그것을 시행합니다. 따라서 자동차 보험에 관련된 보험사와 운전자와 피해자들은 오직 재산상의 손해 해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의 취지 이러합니다: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을 개인들이나 사업자들에게 맡길 없다 것입니다. 실제로 무보험 차량에 사고를 당하거나, 대인 보험 가입액이 턱없이 작을 수도 있습니다. 보험사가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치료보다 자사의 이익을 우선시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상황들을 고려해서, 자동차 사고로 인해 사람이 죽거나 다칠 경우 정부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뉴질랜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자동차 보험에 가입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을 개인들에게 맡길 없다는 뉴질랜드 정부의 취지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는 그들 스스로는 막을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사람의 생명에 관한 입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에 관한 죄와 죽음의 문제를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맡아서 담당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의 24절에서 예수님은 언약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니라.” 언약을 영어로는 “covenant”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계약또는 조약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세워진 계약이라고 이해할 있습니다. 계약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이해 관계로 얽혀있는 당사자 사이에 법률로 강제할 있는 합의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고용자(employer) 피고용자(employee) 사이의 고용 계약이나, 판매자(seller) 구매자(buyer) 사이의 매매 계약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계약 내용에 따라 피고용자는 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에 대한 댓가로 고용자는 지불하며, 판매자는 물건 제공하고 이에 대한 댓가로 구매자는 지불합니다. 이러한 계약들이 으레 포함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계약의 위반에 대한 벌칙입니다. 피고용자가 일을 게을리하거나 판매한 물건에 하자가 있는 경우, 또는 받은 서비스나 물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주요한 계약 위반이 됩니다. 이런 계약 위반에 대해서는 이에 따른 벌칙과 보상책들이 또한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계약이란 이해 당사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책무를 수행함으로써  각자가 추구하는 원하는 것을 얻고 행복에 다다를 있는 평화로운 명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길을 벗어나면 평화 대신 싸움이 일어나고, 대신 벌을 받게 됩니다. 물론 분쟁을 하거나 벌을 주고 받기 위해서 계약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계약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약속입니다. 계약이라는 장치안에서 서로를 위해 선의의 협력을 함으로써 모두가 평화롭게 원하는 것을 얻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계약은 일반적으로 재화나 서비스 그리고 돈과 같은 이해(interest)” 두고 맺어집니다. 하지만 고차원적이고 고상한 계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계약이라고 하기보다는 언약이라고 해야 것입니다. 사무엘상 18:1 말씀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이어서 18:3-4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벋어 다윗에게 주었고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요나단과 다윗이 마음으로 연락되었습니다. “연락되었다는 것은 서로 연결되었다,” “하나가 되었다 (one in spirit)” 말입니다. 이에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맺은 언약은 사랑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언약은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상대방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고 생명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일반적인 계약은 재화나 서비스나 돈을 목적으로 합니다. 하지만 요나단이 다윗과 맺은 언약의 목적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언약을 통해 계속되고 보호되는 것은 서로가 마음으로 하나가 상태이며 상대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맺은 언약을 통해 지키기를 원하는 이러한 가치들은 사람이 생각할 있는 가장 고상한 최고의 가치입니다. 이들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키기를 원하는 이러한 가치들은 자기 생명만큼 사랑스럽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재화나 서비스나 돈의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궁극의 가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을 맺은 ,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자기 생명과 같은 다른 존재 생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약을 통해 누군가와 사랑의 관계 맺는 것은 궁극의 가치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며 기뻐하는 존재가 있으며, 사랑으로 인해 사람과 영원히 몸과 마음으로 하나가 되며, 생명을 드려 사람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보호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참으로 축복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이러한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기도 하며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자기 생명처럼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이 생긴 것은 분명히 기쁨이지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생명 걸어야 하며 혹시 살다 보면 사랑이 식거나 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일상에서 경험하는 훨씬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현실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랑의 관계 궁극의 가치로 여기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혼인 서약을 통해 서로의 배우자가 되었더라도 사이에는 사랑이외에 중요한 것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 직업, 가족, 사생활 등이 모두 자기 생명처럼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위해 쉽게 혼인 서약을 파기하거나, 아니면 이런 것들을 우선시하는 손상된 관계 속에 살면서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요나단과 다윗 사이의 언약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아름답고 고상한 사랑의 언약입니다. 사무엘하 1:26절에서 다윗은 죽은 요나단을 애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다윗이 기억하는 요나단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더한 기이한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이하다 함은 첫째로, 그렇게 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이며, 둘째로, 그것을 이해하기도 매우 어렵다는 말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하기도 어렵고 심지어 이해하기도 어려운 그런 사랑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만일 보통 사람인 우리가 이런 사랑의 언약 묶여 있다면, 그것은 기쁨이기보다는 고통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렇게 자기 생명 기이한 사랑을 실천할 능력도 없고 그런 사랑을 이해할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문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요한1 4:8).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기이한 사랑을 훨씬 능가합니다. 자녀를 향한 사랑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9: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능가합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는 찾아볼 없는 기이한 사랑입니다. 주의 사랑의 친밀함과 신실함에 대해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시편 139:1-6). 실로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하나님의 사랑의 포대기 감싸고 계시며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도 살피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 마치 세상에 오직 사람밖에 다른 이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사랑합니다. “나와 관계입니다. 다른 이가 없습니다. 오직 관계에 헌신하십니다. 실로 기이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누리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 이외에 다른 하나님들(other gods)” 내가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으나 나와 관계에 헌신하시는 하나님께는 몹시 견디시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14).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만큼,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또한 크고 두렵습니다.

 

가화만사성 (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된다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말씀하기를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합니다 (고린도후서 5:20). 이는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성령 안에서 생명을 누리며, 의와 평안과 기쁨과 능력이 충만하며, 세상에서 존귀한 자가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면 우리는 두려움의 종이 되고 생명에서 끊어지며 어둠 속에서 고통하며 방황하는 삶을 살다고 결국 죽음과 영벌에 처해지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사이의 사랑의 관계 감당하고 건사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연약하고 죄악되어서 사랑의 관계에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이의 특별한 관계 오히려 하나님의 질투와 진노를 부르는, 그래서 우리가 벗어나고 싶은 무거운 굴레처럼 느껴집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삶을 영위할 수도 없으며, 행복이라는 것은 꿈조차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의 충만함을 먹고 살도록 그렇게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도 없으며,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한 영적 현실입니다. 같은 사실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들은 애굽왕의 노예로 살면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고역으로 인해 탄식하여 부르짖었고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23).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애굽왕으로부터 구원해내시고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복락원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괴로움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애굽에서의 그것보다 심했다고 해야 것입니다. 사사기 2:13절은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하며, 이어서 15절에는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이 괴로움이 심하였더라합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날 수도, 하나님과 함께 수도 없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의 해결책으로 언약 세우셨습니다. 성경에는 가지 언약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는 언약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언약이며, 이것과 대비되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짐승의 피로 세우신 언약입니다. 출애굽기 24:7-8 말씀입니다.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언약에서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리이다맹세하였습니다. 하지만 며칠이 못되어 이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고 송아지 모양의 금신상을 만들고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너희 신이로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에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며,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어놀았습니다 (출애굽기 32:4-6). 그리고 이렇게 시작한 배반의 역사는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고 멸망할 때까지 쉬지 않고 반복되었습니다. 열왕기하 18:12절은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통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치 아니하고 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의 모세의 모든 명한 것을 거스려 듣지도 아니하며 행치도 아니하였음이더라.”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결말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건사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언약 세우십니다. 언약이 언약과 다른 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예수님께서 언약의 중보 계신다는 것입니다. 언약 때에도 사람들의 다루기 위한 장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짐승의 살과 피로 드리는 속죄 제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속죄 제물은 사람들의 죄를 잠시 가려줄 , 죄를 없애지는 못하고 죄인들을 변화시키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가린 숨이 막히는 긴장 속에 살얼음을 걷는 그런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언약 하에서 죄를 다루는 방법은 속죄(atonement)”입니다. 구약에서 속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כָּפַר - kapar) 기본 뜻은 덮는다(cover)”입니다. 언약 하에서는 죄를 덮음으로써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했습니다. 언약 하에서는 속죄(atonement)”라는 말을 쓰지 않고, 대신 구속(redemption)”이라는 말을 씁니다. (גָּאַל - ga’al) 구약에서도 사용되기는 하지만 죄를 다루는 방법 아니라, 주로 잃어버린 땅과 같은 재산을 돌려받거나 노예가 자유인으로서의 신분을 회복하는 것을 표현할 사용됩니다. “구속한다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다 (be the next of kin)” 혹은 기업을 무를 자가 되다 (act as kinsman-redeemer)”입니다 (룻기 3:12).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심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셔서 우리 본래의 신분과 기업을 회복시킨다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은 오직 언약 하에서만 사용됩니다 (한글 성경의 구약에는 구속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앞에 언급한 “גָּאל (ga’al)”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고, 보다 포괄적인 의미의 구원(deliver)” 지칭하는 다른 히브리어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언약에 관하여 히브리서 9: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를 인하여 (예수님) 언약의 중보니 이는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먼저 언약 때에 범한 범죄 해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그것을 성취하시고 기초 위에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단순히 우리가 지은 죄를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은 양심을 깨끗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갈 담대함을 줍니다. 히브리서 9:14 말씀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없이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더하여 히브리서 10:19-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길이요 휘장은 저의 육체니라 하나님의 다스리는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피로 맺어진 가족(kinsman)” 됩니다. 피가 속에 흐르는 어느 누구도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그들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대해 요한복음 1: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의 살의 어떠함을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충만함입니다.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좋은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사람의 육체 거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육체는 서로 함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이것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몸은 사람이 먹을 있는(edible) 양식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섭취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가 모든 좋은 영양소를 고루 갖춘 엄마의 젖을 빠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도 없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도 불가능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선한 양심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진리를 섭취하며 자랄 있게 되었습니다. 언약에는 우리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리이다라는 부분이 없습니다. 대신 언약은 이루었다 합니다 (요한복음 19:30).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의 중보가 되시는 예수님 사이에 세워진 것입니다. 언약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다만 혜택을 누릴 뿐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혜택이 우리 영혼 속에 임하도록 하는 매개체 바로 예수님의 살과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는 우리에게 생명에 관한 죄와 죽음의 문제를 다룰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친히 맡아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청산하고, 이제 우리로 구원과 생명과 영광으로 나아가며 이에 이르게 하는 이미 완전하게 준비된양식이며 음료입니다. 주의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밝히셔서 주님의 살과 피의 보배로움을 알게 하시고, 매일 신령한 양식을 먹고 마시며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자라가는 축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