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 (마가복음 14:1-1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11. 11. 23:24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

 

마가복음 14:1-11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마태복음 26:1-13절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누가복음 7:36-50절과 요한복음 12:1-8절에도 내용이 약간 다르지만 역시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여자에 관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9절에,  여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십니다. 저는 성경의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한  이렇게 높여 말씀하신 것을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함께  세상에 전파되고 기념될 만큼  여자가 예수님께 행한 것이 좋은 일이며  깊은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필요가 있습니다.  여자가 행한 일의 의미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8 말씀입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몸에 향유를 부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말씀을 기초로 저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사랑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여러가지 점에서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다른 만큼, 각자에 대해 사용하는 언어 또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명이라는 말에 대하여, 사람들은 이를 신체의 기관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생물학적 생명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생명은 마치 성냥개비의 불꽃이 꺼져가듯이 그렇게 쉽게 사그라집니다.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평생을 죽음의 두려움에 쫓겨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는 생명은  의미가 오히려 죽음  가깝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강한 생명, 죽음이 삼키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 그리고 영과 육의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완전히 행복한 생명입니다. 모든 한계와 상함과 연약함과 죽음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생명입니다.  생명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시며, 생명을 주시며,  나아가 생명을 풍요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는 죽음도 죽음이 아니며, 심지어 죽음조차 생명이며,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있을까요? 사랑이란 어떤 대상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대상을 기뻐하며, 그리고  대상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헌신하는 것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사랑의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대상입니다.  무엇을 또는 누구를 사랑하는가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한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5 말씀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원어 성경을 보면  말씀 안에 사랑(philo-)”라는 뜻의 어근이 다섯  사용됩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의 사랑의 대상 무엇이며,  그들이 사랑해야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대상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사랑하며, “ 사랑하며, “쾌락 사랑합니다. 반대로, “선한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의 본질은 자기 사랑이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과 쾌락은  자기 사랑 욕구를 만족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들입니다. 따라서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도 결국 자기 사랑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사실 사랑 아닙니다. 이것은  외에 사랑의 대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외의 것들은 미움과 시기와 경쟁과 무정함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으로부터 모든 다른 악한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것들이 바로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거룩하지 않으며, …… 등등 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며  선하신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 사랑이기는 커녕 오히려  반대로 미움이며,  자체가   뿌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사람들도 자기  아니라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가지며, 따라서 사람들의 사랑이 오직 자기 사랑만은 아니라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닮은 구석이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의 사랑 아닙니다. 사랑을  비유한다면,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뒤덮고 있는 바닷물이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사랑은 어떨까요? 아프리카 초원에 비가내리지 않는 건기가 찾아오면 흐르던 강물이  흐름을 멈추고 곳곳에 물웅덩이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물웅덩이들에 물고기들이 갇히고 물이 적은 웅덩이들부터 천천히 말라들어갑니다. 물고기들은 말라 죽거나 악어와 같은 포식자들의 먹이가 됩니다. 물은 더욱 말라서 흙탕물이 되고 진흙 구덩이가 됩니다. 사람의 사랑이 바로  진흙 구덩이와 같습니다.  좁은 구덩이 안에서도 약간 남은 물기를 의지하여 거칠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물고기가 살아있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흙 구덩이가 바다가 아닌 것처럼 사람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구덩이의 남은 물기가 바닷물이 아닌 것처럼 사람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구덩이에서 말라 죽어가는 물고기의 생명이 무한한 바닷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돌고래의 생명과 같지 않은 것처럼 사람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와 비슷하게 설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어부가 그물로 물고기를 잡은  그것을 살아있는 상태로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즉시  물고기를 물에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고기는  질식하여 죽게 됩니다.  물고기를 물에 넣어야 합니까? 이는 물이 물고기의 생명을 위한 필수 요소(element)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그것들의 생명의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들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떨까요? 사랑의 필수 요소(element)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한함(infinitude), 고갈되지 않음(inexhaustibility), 측량 불가함(immeasurability)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사랑이  필수 요소에 머물러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시들고 죽어버릴 것입니다  서서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즉시 말입니다. “무한함 사랑의 완전함을 보여주는 표시이며, 사랑은 오직  필수 요소 안에서만 생존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에 따르면, 살아있는 참사랑은 무한하여 고갈되지 않으며 측량할  없이 깊고 넓고 높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조건이나 장애물로 인해 사랑에 한계가 지어지는 순간  사랑은 사랑으로서의 생명을 잃게 되고  이상 사랑이라고 불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함을  이렇게 칭송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 (시편 25:6), “나의 평생에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 (시편 23:6),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역대상 16:34),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편 103:11).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쏟아부어  세상을 덮고도 남는 깊고 넓은 바다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말라가는 진흙 구덩이를 벗어나 깨끗하고 풍부한  속을 마음껏 유영하는 생명과 자유를 누리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사람들을 위해 하신 일을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물꼬를 세상의 영혼들을 향해  놓은 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측량할  없이 무한한 사랑이 세상에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사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을 향하여 흐르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사랑 완전히 포기하셨습니다. “자기 사랑 화신인 우리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죽음 의미합니다. 예수님 자신을 마치 깨진 그릇처럼 완전히 깨뜨려  안에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흘려 보내는 생명수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있어서 가장  시험은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 그리고 사람들의 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도전들을 이겨내시고 극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돌들이 떵덩이가 되게 하라 하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것이라” (마태복음4:1-4).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시험하여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조롱했습니다 (마태복음 27:40).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머물러 계신 예수님을 보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의기양양하여  심한 말로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에 구원하실지라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마태복음 27:42-43). 비록 조롱의 말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곁에서 지켜본 예수님의 삶을 간단명료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없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번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남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쏟아부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고난과 죽음까지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에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 되셨습니다.  제사를 드리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에베소서 5:2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순전한 나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여자가  일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저가 힘을 다하여  몸에 향유를 부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행동을 자신의 죽음 연관시켜 이해하십니다.  여자가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실 것과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행동은 예수님의 희생과 여러모로 닮았습니다. 그녀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깨뜨려 향기로운 제물이 되신 것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5절에  향유 옥합의 가치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이라고 합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일반적인 하루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0:2). 그러니  향유 옥합은  년치 월급과 맞먹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향유를 모으기 위해 많은 정성을 드렸을 것입니다. 돈과 시간을 들이고, 하고 싶은 것들과 갖고 싶은것들을 참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모아진  향유 옥합은 그녀의 삶의 결정체이며 가장 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녀의 생명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 향유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께 대하여 아무것도 아낄 것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옥합이 깨어짐 같이 자기 사랑 한계가 깨어지고 자신을 예수님께 쏟아부은 것입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을 제한할 아무런 장애물도 없습니다. 사랑의 생명은  사랑의 무한함 있습니다.  점에서  여자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그녀의 향기로운 헌신은 자신의 몸을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시는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데 쓰임받기에 합당합니다.

 

사람의 사랑은 자기 사랑입니다.  사랑의 특징은 모으고, 담고, 소유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돈이든, 사람이든, 높은 지위이든, 세상 영광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으로 모으며, 마치  웅덩이의 주위에 담을 쌓고  안에 자신만을 위해 물을 모으듯 평생을 그렇게 모아 담고 소유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믿습니다.예레미야 2:13-14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백성이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말씀에서우리는 자기 사랑  자신을 위해 웅덩이를 파고  웅덩이에 물을 모으는 삶은 반드시 실패하며 불행할  밖에 없음을 설명합니다.  이유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며, 스스로  웅덩이가 결코 물을 담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비싸고 좋은 것들을  소유하며,  안에서  없이 여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실상은 아프리카에흐르는 물이 멈추고 말라가는 진흙 구덩이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물고기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으고 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반대로 깨뜨리고 쏟아부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오직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솟아나 흐르는 생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없는 흐르는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사랑  한계가 없이 자유롭고 생명이 넘치는 사랑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회복하는데 있어서 가장  장애물은 바로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을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자기 사랑을   우리가 비로소 바다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가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며, 예수님의 사랑 안에 담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5:5 말씀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됨이니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님을 주심으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셨습니다. 성령께서 어떤 자에게 임하십니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자입니다 (사도행전 2:38). 이것은 다름이 아니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사랑하는 자기 사랑 웅덩이를 무너뜨리고 예수님을 통해 무한히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그릇에 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내가 담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릇 깨뜨리는 회개 또는 죽음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과정이 없이는 성령님도 하나님의 사랑도 사람의 마음에 임하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무한함이며  사랑은 절대로  그릇 담겨 제한될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려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에 담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버려  사랑이 나를 통해 자유롭게 세상으로 흐를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그들의 그릇에 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그리스도 아니라 나만의 혹은 우리만의 그리스도 되시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자신을 깨뜨려  세상의 구주가 되심으로, 제자들의 이기적인 소망도  깨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뜨려진 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이들은 하루 아침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32말씀입니다. “믿는 무리가  마음과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물을 조금이라도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자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곳간 문을 열고 그들이 가진 것들을 아낌 없이 이웃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들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참여하게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빛과 에너지가 하늘에  있는 태양으로부터 오듯이, 사랑의 원천도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만이  사랑 알고, 누리며, 또한 행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34절에 예수님께서말씀하십니다. “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14:10-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예수님의 제자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사랑입니다.  사랑을 받고 배워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릇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아닙니다. 사랑은  그릇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담기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 포기하고 이에 대해 죽으며,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기뻐하며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이며 생명입니다. 오직 이로써 우리는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이를  있습니다.  사랑은 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에 담기며 오직  사랑으로만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