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깨어 있으라 (마가복음 13:28-3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10. 4. 21:56

깨어 있으라

 

마가복음 13:28-37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깨어 있으라 하시는 말씀을 주제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33-37절에는 깨어 있으라 말씀이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36절에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하심도 내내 깨어 있으라 말씀입니다. 깨어 있어야 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깨어 있다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가 믿기에  말의 가장 정확한 의미는 “OO 대해서 골똘히 생각한다 것입니다.깨어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위의 자극들을 인지하고 반응하는 감각이 살아 있다 것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깨어 있는 동안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습니다.  미각, 후각, 촉각 등의 다른 감각들도 사용하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각하고 이에 반응합니다. 잠들어 있을 때에는 이런 감각 기관들도 활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적절히 대응할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감각이란 바로 생각입니다.  어떤 중요하고 긴급한 일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고 살피며, 준비하고 대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 있다 말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살던 고향 마을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의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때를 회상하면서  어머니는 이런말을 했습니다. “밤에 자다가 밖에  오는 소리가 들리면 갑자기 정신이 바짝 들고 머리 속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게 된단다. 부엌에 땔감은 충분한지, 물동이에 물은 있는지, 장독대의 뚜껑들은  닫혀 있는지, 말리려고 마당에 널어놓은 것들은없는지 ……” 다른 식구들은 밖의 날씨를 아랑곳 하지 않고 단잠을 자고 있지만, 집안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는 그럴수가 없습니다. 매일 매순간 깨어 있으면서, 주위를 살피고, 상황에 따라 그리고 때에 따라 필요한 일들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어 어원 사전에 따르면 생각(thought)”이라는 말의 어원은 불안(anxiety),” “걱정(solicitude)”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빗소리를 듣고 생각하는 것들은 어머니 자신과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중요한 것들 대한 걱정들입니다. 요즘처럼 모든 것들이  갖추어진 가운데 생활하는 우리는 한밤중에 밖에 빗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이런 걱정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자도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발전하는 방향이라고   있습니다. 걱정거리가 없는 세상,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가는 세상, 모든 근심과 불안을 잊어버리고  잠들  있는 세상!!!아마도 이런 세상이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 아닐까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곡간을 짓고 많은 곡식과 물건을 쌓아  부자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영혼아 여러   물건을 많이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참으로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깨어있으라!”

 

우리는 창고에 먹을 것과  것을 쌓아놓은  부자처럼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살기를 원합니다. 사실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수고하는 것도  소망 향한 노력일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지 않아도 되는  도달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런 우리의 본성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깨어 있으라 하신 말씀은 우리가선뜻 영접하고 순종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골똘히 생각하고, 주의하고, 준비해야  아주 중요한 일들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한편으로 우리에게 평안가져다 줍니다.  평안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늘의 평안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앙은 우리가 감당해야  많은 도전들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도전들은 이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매우 복잡하고, 어렵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그런 일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도전들을 피할  없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위해 이를 계획하시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7:14 말씀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말씀에 따르면, 사람에게 형통한 날이 있고  곤고한 날이 있습니다. 문제는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장래 일을 우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때처럼, 맑고 화창하던 날이 갑자기 흐려지고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형통한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지만, 동시에 곤고한 날을 생각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떤 점에서 깨어 있어야 하는지,  무엇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주의하고 준비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28-29 말씀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앞에 이른 줄을 알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 제시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미래의 중요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수능시험을 보는 날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일상을 영위할 것입니다. 매일 수능시험 날이 며칠이나 남았는지를 헤아릴 것이며, 수능 시험과 상관이 없는 일들은시험 이후로 미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날을 위해 충분히 준비되었는지를 점검하면서,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하여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시험을 준비할 것입니다. 취업이나 결혼도 개개인의 삶에 중요한 이정표들이며 이런 날들을 복되고 성공적이 되도록 우리는 아낌없이 시간과 정성을 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날들과 비교할  없이 중요한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땅에 오시는 날입니다. 수능시험날은 학생이 이제까지 쏟아부은 노력들을 정산하고,  결과를 기초로 새로운 미래의 장을 여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날에 우리 각자는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정산하고,  결과를 기초로 영원한 미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깨어 있으라 하시는 말씀의 가장 중요한핵심은 우리가 매일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하고,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때가 언제일까요? 오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날을 정확히  수는 없습니다. 32절에 그러나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날을 갑작스럽게 맞이하지는 않습니다.  그럴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가 가까웠다는 사인들(signs)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인들은 오직 하나님께 대하여 깨어 있는 자들의 눈에만 보이고 이해됩니다. 이것이 또한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 말씀하신 중요한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하십니다.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이제  여름이구나!” 하며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은 계절이바뀌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옛날처럼 예민하지 않습니다. 농부들처럼 계절을 따라 일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고, 심지어 많은과실과 채소들이 계절과 상관 없이 재배되며 구입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는 계절의 변화가 매우중요합니다. 이는 때를 놓치지 않고 해야  일들을 제대로 해야만 가을에 열매를 수확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때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것이  생존이며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사관(史觀),”  세상의 역사를보는 바른 인식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마지막에 있을 추수  향하여 움직입니다. 마태복음 13:39-40절에, 예수님께서가라지의 비유 말씀하신 ,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그렇습니다. “추수  세상 끝을의미합니다. 우리는  추수 때가 정확히    시인지는   없습니다. 이는 추수하는 주인이 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오직 주인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어 주인이 들판에 있는 곡식들을 추수할 것임은 의심할 여지도 없고변할 수도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은  날을 향하여 움직이는 시대의 사인들(signs) 보고, 깨닫고, 합당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입니다.

 

 혹은 시간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제가 믿기에 시간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들  하나입니다. 시간 자체가 신비로운 것처럼,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는지도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에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생의 날들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시간을 이해할 뿐입니다. 시간  아니라, 이와 같은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도 정의할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생명을누리고  현상들을 경험할 뿐입니다. “우주 얼마나 크고 광대한지 아무도 측량할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공간 속에살면서  경이로움을 감상할 뿐입니다. “물질 본질이 무엇인지도 아직 과학자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혹은 빛이라고도하고, 혹은 에너지라고도 하고, 혹은 양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매일 여러가지 물질들을 만지고 사용하지만 정작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아마도 가장 신비로운 존재는 바로 하나님 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우주 만물을 통해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지고, 체험할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사람의 지식 초월하여 계십니다. 마지막 날에 관해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2).  하나님께서는  날과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시고 감추는 것일까요? 우리가  날과 때를   있다면 훨씬   준비할  있을텐데요. 이것이 적당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부유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물려줄 많은 재산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재산을 언제, 누구에게, 얼마나  것인지를 미리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때를 기다립니다. 자식들에게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 동일체입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믿고 경외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뜻에 순종할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언제, 누구에게, 얼마를  것인지를 미리 정해 놓고 자녀들에게 이를 알렸다면, 이제 아버지의 재산  이상 아버지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이상, 자녀들의 삶과 마음 속에 아버지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언제, 어떻게 주시겠다는 말씀은 정확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유일한 선택은 그저 하나님을믿고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 아들 동일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길고 막막한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훈련하시고, 결국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열매를 맺게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나이 들어 몸이 죽은 자와 같이 되었을 ,  오직 믿을 이가 하나님밖에 없게되었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은 아들을 받은 후에도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이는 여전히 그에게하나님 아들 동일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붙드는 , 결코 아들을 잃을 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날과   비밀로 감추신 것은 우리가 매일 매일을 사람의 지식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깨어 있는 삶인 것입니다.

 

34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때에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 주인이  나라로 가면서 그의 종들에게 권한을 주고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있으라 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맡기신 사무  해야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감당하면서 예수님을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깨어 있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기신  사무 어떤 일일까요? 제가생각할 ,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들을 가장  설명한 말씀은 마가복음 3:14-15절로,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목적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에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반드시 해야   가지 기본 책무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과 함께 하는 입니다. 이는 매일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교통하고 연합하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도하는 입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입니다. 셋째는귀신을 내어 쫓는 입니다. 이는 악한 마귀를 대적하여 영적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영적 싸움에 대하여 고린도후서10:4-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 영적 싸움의 본질은 선과  사이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진리와 거짓 사이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진리란 하나님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 하십니다 (요한복음 14:6). 따라서, 악한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 싸움은 근본적으로 하나님보다 높아진 교만한 세상 문화를 거스르며, 모든 생각과 사상을 예수님께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제자로서의 책무들을 매일감당하는 것이 또한 깨어 있는 이라고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지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삶이며, 둘째는 잠자는 삶이며, 셋째는 깨어 있는 삶입니다. 죽은 삶은과거 사는 것입니다. 죽은 삶을 사는 사람은  지난 날들을 그리워하거나 자랑하거나 후회하면서 삽니다. 맨날 옛날의 일들을 회상하며 얘기하는데 시간을  소비합니다. 지난 날의 추억들이 보석처럼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그의 앞날은 그냥 암담하고 두렵고 쓸쓸합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인생이  끝난 죽은 자처럼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잠자는 삶은 현재 사는 것입니다. 잠자는 삶을 사는 사람은 오직 현재만을 즐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나은 내일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면서 오늘을 즐기는 삶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에게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더더욱 없습니다. 오직 지금 있을 뿐입니다. 그의 생각은 오직 어떻게  순간을 즐길 것인가에 골몰해 있습니다. 깨어있는 삶은 미래 삽니다. 깨어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향하여  영적인 눈을 뜨고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와  미래와 영원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삽니다. 그의 미래는 결코 컴컴한 어둠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과 소망이 환한 빛으로 내며  날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의 약속을 믿는 믿음 가운데, 장래의 일들을 바라보고, 이들을골똘히 생각하며,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그는 영적이며 지혜로워서 영원한 행복 위해 잠시의 편안함과 쾌락 포기하고 고난과 슬픔을 기꺼이 감당합니다. 그가 원하는  좋은 것들은 모두 미래에 있으며, 현재는 다만 그날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길의 중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시간 속에 살면서 깨어  소망을 바라보고,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때엘는지, 새벽엘는지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주님의 말씀이  영혼 속에 항상 등불처럼 환하게 켜져 있어서, 예수님이 오시는   기쁨과 반가움으로 주님을 맞이할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