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13:14-2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23. 8. 7. 13:37

권능과 영광으로 오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13:14-27

 

그리스도인의 삶을 마디로 정의한다면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 강림을 약속하시고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하시는 사명을 주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구름 사이로 사라지신 후에도,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그대로 오시리라!” (사도행전 1:11).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삶의 끝은 죽음입니다. 이것은 생명이 죽음에 굴복하는 것이며, 이와 함께 생애 동안 성취하고 획득한 모든 것들을 빼앗기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 그의 삶을 마무리하고 열매를 거두며 상을 받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날을 소망하며, 날을 준비하며, 날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7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1: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의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더하여 5: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말씀들이 증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

말씀들이 증거하는 바는 우리가 장래에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 모두 하늘에 계신 예수님 안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믿는 자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비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사모하며 소망하는 바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며, 안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예수님 안에 있으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우리에게 주실 선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는 매일 하늘 저편을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를 당하여 땅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날은 환난의 됩니다. 19 말씀입니다. “이는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땅에 나타나심이 믿는 자들에게는 축복이지만, 세상은 전무후무하게 환난을 겪게 됩니다. 환난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리시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날들(환난의 날들) 감하셨다 합니다. 환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아가, 24-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때에 환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동안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운행하던 ,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상 만물이 운행을 중단하고 완전히 해체됩니다. 환난과 더불어 세상과 우주의 역사가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환난이 임하며 모든 우주 만물들이 철거되는 것일까요?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말씀은 환난과 세상의 종말을 촉발하게 방아쇠(trigger)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이 일어나면 세상이 끝나는 우주적인 환난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되었음을 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다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은 멸망의 가증한 더러운 우상으로 이해하며, “서지 못할 하나님의 성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셔야 성전의 자리를 더러운 우상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 침략자들에 의해 이렇게 더럽혀진 역사적 사건들이 예수님 시대 전후에 차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역사가 끝나는 말세지말 일어날 사건입니다. 이공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역치(threshold)”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어의 뜻은 생물학의 경우 생체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라고 하며, 물리학이나 화학의 경우 어떤 반응이나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 등으로 설명됩니다. 이공학 분야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역치라는 개념은 자주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 번만 그러면 혼날 알아!” 이렇게 경고를 경우당신이 나를 조금만 자극하면 화가 폭발할 있다,” “당신의 잘못이 나를 폭발시킬 역치 값에 거의 도달했다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선을 넘었다 말도 달리 표현하자면 참을 있는 역치 값을 넘었다 말입니다. 말은 하나님께도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하셨습니다 (창세기 1:31).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동산을 지으시고 지으신 사람이 그곳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마디로 퍼펙트였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세상은 본래의 퍼펙트한 모습을 조금씩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보시기에 좋지 않은세상을 참으시고, 여전히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참으심에는 끝이 있습니다. 끝은 세상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폭발시키는 역치값 도달하는 때입니다. 예로 창세기 15:16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자손은 (four generations)만에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여기서 관영(貫盈)하다 말을 가득차다라는 뜻으로, NIV 영어 성경은 “reach its full measure”라고 번역합니다. “ 찼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차게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때가 되었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그들을 통해 아모리 족속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참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만, 하나님의 참으심에는 있습니다. 로마서 2:4-5 말씀입니다. “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에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진노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넘쳐흘러 세상을 덮고 휩쓰는 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죄가 가득 상태, 하나님께서 이상 세상의 죄를 참을 없게 상태를 말씀합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의 모습이 노아의 것과 같고, “롯의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7:26, 27). 노아의 때란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때를 말하며, 롯의 때란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때를 말합니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기록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 보셨다고 합니다 (창세기 6:5). 역시 죄악이 관영하다 말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창세기 6:2절에는 흥미로운 말씀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말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의 같은 말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께서 정하신 받아들이고, 이를 기뻐하고, 따르도록 지어졌습니다. 사람이 바르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만이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 절대자이심을 영접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뜻을 같은 마음으로 기뻐하며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자신들이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좋게 여겨지는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함을 따라 좋아하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일생의 반려자인 아내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육체 따라 판단한다는 것은, 이들의 전체가 어떠했을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마디로 말해서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이들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 아름다움 하나님의 눈에는 가증함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창세기 6:3). 하나님의 성령께서 계셔야 자리에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온갖 육체의 아름다움들,” “육체의 좋은 것들 자리잡게 것입니다. 이제 육체가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하나님은 이상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절대자 아니시며,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선히 여기지도 않으며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육체의 아름다움이 있을 뿐이며, 이것으로 서로를 판단하며, 이것을 기뻐하며, 이것을 얻고자 애쓰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그만큼 죄악의 잔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말씀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같은 장의 17절은 주와 합하는 자는 (one spirit)이니라말씀합니다. 우리는 말씀에 비추어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라는 말의 뜻을 깊이 이해할 있습니다.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안에 성령으로 거하시기 위해서 값을 주고 우리 몸을 사셨습니다. 이제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는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몸이 존재하는 이유는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그대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주님과 연합하여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함으로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육체가 되어 타락함으로 우리를 떠나가셨던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우리 안에 다시 오시며, 육체가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으로 회복시키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령의 내주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것으로 여기며, 위해 있습니다. “ 위해 산다는 것은 육체의 정욕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은 우리를 유혹하는 자들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는 (door)” 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4 말씀입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2:11-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들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배도 대해서 말씀합니다. 배도(apostasy) 신앙을 버리는 의미합니다. 성경은 자주 세상이 끝날 때를 가르켜 추수 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3:39). 추수 때가 되어 밭의 주인이 하는 일은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고, 곡식은 모아서 곳간에 넣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 추수 때에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실까요? 그것은 세상에 환난 유혹 함께 보내시는 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밭에서 함께 자라며, 서로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포함하여 세상은 믿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  그리고 거짓으로 믿는 자들 혼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시는 환난과 유혹은 이런 세상에서 참된 신자들 골라냅니다. 그들의 신앙으로 유혹을 물리치고 이겨내며, 환난을 견디며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3-5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그렇습니다.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인내함으로 오히려 믿음이 자라갈 이것으로 그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 알곡으로 여기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곳간으로 거두어집니다. 다른 , 앞서 읽은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심으로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십니다. 이들이 미혹되고 거짓 것을 믿게 되는 것은 으로 살지 않고, “육체의 정욕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장차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주실 영광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대신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 세우고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소망을 저버리고, 성령님을 따라 행하지 않으며, 대신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 좇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4:1).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영이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으로 거하며 그를 미혹함으로, 그로 심판과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난의 때를 당하여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세상에 보내시는 환난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산을 향해 속력으로 달려야 만큼갑작스럽고 급박하게 임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2011 3월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 높이가 10미터를 넘는 거대한 해일이 몰려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높이 세운 차단벽을 믿고 산으로 피하지 않고 길에서 어슬렁거렸습니다. 모르긴 해도 집에 있는 귀중품을 챙기느라 제때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도 허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센 해일이 차단벽을 넘자마자 순식간에 마을들을 휩쓸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에 있을 환난에 대해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하십니다. 환난은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를 불태운 유황과 심판과는 비교조차 없는 그런 엄청난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털끝만큼의 미련이라도 있어서 뒤를 돌아보거나, 미적거리면서 내달리기를 주저하거나, 심지어 무엇인가를 가지러 돌아간다면, 우리는 급박한 환난을 피할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앞에있으며, “뒤에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늘에있으며, “땅에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에도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과 하나되어 영으로 사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말씀과 성령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향해 날아갑니다. 환난의 때가 오히려 우리에게는 추수 때이며, 오시는 예수님께로부터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언제일지 우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세상에 육체의 유혹이 강해지며, 성령과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려워짐을 우리는 피부로 느낄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죄악은 관영해지며, 신자들이 견뎌내야 하는 시험도 거셉니다. 이런 세상을 살면서 육체의 정욕을 따라 자유롭고 평안하고 호화롭게사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깨어 허리에 띠를 띠고 준비해야 합니다. 날이 내일일지, 아니면 오늘 저녁일지 우리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복음 24:37-39). 그렇습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며 연락하는 세상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것입니다. 마치 신부가 정혼한 신랑을 기다림 같이, 영으로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어 이제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그렇게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을 읽겠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