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제목으로, 마가복음 10:17-22절 말씀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부자이며, 다른 복음서에서는 “청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주 “부자 청년”이라고 불립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에는 약간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 19:16)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합니다. 이 사람의 질문은 아마도 신앙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일을 함으로써 덕을 쌓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생각도 이 사람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서 2:7-8절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참고 선을 행하는 자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선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선”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위한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크게 세 가지 점들을 말씀하십니다. 첫째,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십니다. 둘째, “네가 알고 있는 계명들을 지키라”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초로 이 부자 청년이 듣기를 원하는, 또 우리가 알기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하다” 혹은 “착하다”는 말을 일상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잘라서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자신조차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거부하셨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선하다”는 말은 “영광”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매우 신성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선하심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대신 사람은 “선을 행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써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선한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선을 행한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선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해와 햇볕”을 비유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햇볕을 이용해서 여러가지 유용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와 같이 빛 아래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 햇볕을 이용해서 식물을 기를 수 있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볕이 좋은 날에 고추를 말리고 있습니다. 또 한 젊은 여성은 태양 아래 선탠을 하고 있습니다. 태양열을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기도 합니다.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물의 순환도 해가 그 빛을 땅과 바다에 비추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햇볕이 땅에 비출 때 여러가지 좋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햇볕을 이용하여 많은 유익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빛이 되거나 빛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빛은 오직 태양으로부터 옵니다. 우리는 다만 그 빛을 받아 좋은 일들에 사용할 뿐입니다.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리고 태양이 빛을 땅에 비추듯이, 하나님께서 그 선하심을 세상에 비추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햇볕을 이용하여 여러 유익을 얻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아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해나 햇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려는 것은 마치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하며 또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스스로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여러 원치 않는 결과들을 초래합니다. 우선 스스로 죄의 짐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매일 자신의 죄를 봅니다. 꼭 드러내놓고 나쁜 일을 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마음 속에 부끄러운 정욕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합니다. 과거의 잘못들과 실수들이 늘 마음에 남아서 죄의식을 일으킵니다. 스스로 선하고자 하는 것은 또한 예수님의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은혜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믿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스스로 선하고자 애쓰는 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주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하신 일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 스스로 선하고자 할 때 우리는 쉽게 사단의 덫에 빠지게 됩니다. 사단은 우리를 스스로 높아지도록 유혹하며 동시에 정죄합니다. 이 덫에 걸리면 결국 사단의 종이 되어 더 깊은 죄에 빠져들게 됩니다. 또 스스로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할 때 우리는 위선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덮고 꾸미기 위해서 원치 않는 삶을 살며 많은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선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사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다”는 찬송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스스로 선하고자 할 때 마음이 높아져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또 시기하고 경쟁합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칭찬하고 배우며, 또 허물이 있으면 덮어주고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훌륭한 사람을 깎아내리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흉 보고, 즐깁니다. 심지어 자기 의를 내세워서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게 됩니다. 정말 스스로 선하고자 할 때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내가 아는 계명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네가 계명을 아나니 ……”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중요한 계명들을 언급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가 아는 이 계명들을 잘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들은 청년은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부자 청년의 말에서 두 가지 문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그의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묻습니다. 그가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곧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선을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계명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자기 의를 쌓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가, 후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에게 “계명“은 이렇게 자신의 생명과 행복을 지켜주는 울타리였습니다. 계명을 지킴으로써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고, 죄, 형벌, 불행, 가난, 죽음, 멸망 등 무서운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좀더 튼튼하고 확실한 울타리, 영생을 보장하는 울타리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한 선생”이신 예수님이라면 그가 원하는 답을 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영생을 보장받고, 남은 여생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는 그런 “선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의 또 다른 문제는 “선함”에 대한 그의 자만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계명들에 대해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완벽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께로부터 “너는 이미 영생을 얻을 만큼 충분히 선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을 때 속으로 적잖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가 “선하지 않다”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 참 계명의 정신, 곧 “선을 행한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0:11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이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비슷한 예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우상 숭배의 죄를 지은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질지라도 괜찮다고 합니다. 곧 “영원한 저주”를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과 모세와 바울은 양들의 생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 곧 “선을 행하는 것”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바라고 선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원하는 것이며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위해 “영생”을 포기했습니다.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양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또 목숨을 버리기까지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한계가 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는 선을 행함에 있어서 “나는 할만큼 했어!”라는 자만심이 없습니다. 생명이 살아있는 한 있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섬깁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시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은 커녕 “자기 재물”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하고 자랑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영생을 얻기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는 마치 성냥개비로 울타리를 쳐놓고 노아의 홍수를 막아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며, 우리는 스스로 선하게 될 수 없습니다. 계명을 지켜 선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최소한 모세나 사도 바울 같은 삶을 살아야 될 것 같은데 그것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희생적인 삶을 산 사도 바울조차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함”과 관련된 우리의 소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이것은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스스로 높이 뛰기를 해서는 아주 잠깐 1미터 정도를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을 오르게 되면 그 산만큼 높아질 수 있습니다. 산이 높다면 더 높이 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산에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나의 “선함”으로, 나의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내 삶이 오롯이 예수님의 선하심을,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딛고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다나엘 호손이라는 미국 작가가 지은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소설입니다. 이 이야기는 전에 한글로 번역되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큰 바위 얼굴은 거대한 바위인데 이것을 멀리서 보면 한 남자의 얼굴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냥 남자의 얼굴이 아니라 매우 고상하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이 소설에서 큰 바위 얼굴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모든 형상들이 다 고상하며, 그 표정은 한편으로는 장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냥하다. 마치 거대하고 따뜻한 화로의 불처럼 그 애정으로 모든 인류를 포용하고도 남을 넉넉함이 있다.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교육이 된다.” 이 소설의 저자가 누구를 생각하며 이 글을 썼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이 큰 바위 얼굴에 대한 묘사를 들을 때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교육이 된다”는 말이 참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 되십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이 기쁘고 또 밝아지고 지혜로워집니다.
이 바위산 아래 계곡에 사는 사람들은 언젠가 이 얼굴을 꼭 닮은 위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을 믿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소년 Earnest 또한 그의 어머니로부터 이 큰 바위 얼굴에 대한 오래된 예언을 듣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소년은 몹시 흥분하여 손뼉을 치며 말했습니다. “엄마! 엄마! 나는 그 사람을 보기 위해 사는 것을 내 마음의 소원으로 정했어요(I do hope that I shall live to see him)!” 이 소년의 소원은 “자신이 선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소원은 “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그 선하고 위대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이 소년은 큰 바위 얼굴을 보기 위해서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을에 이 위대한 얼굴을 닮은 듯한 사람들이 몇 명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은 Gathergold라는 부자이며, 다른 한 사람은 Old Blood-and-Thunder라는 별명을 가진 용감한 군인이며 지휘관이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Old Stony Phiz라고 하는 뛰어난 정치가였습니다. 이들 유명한 인물들은 어떤 점에서는 큰 바위 얼굴을 닮은 듯 했지만 결국은 모두 가짜로 밝혀졌습니다. 이들은 큰 바위 얼굴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보통 사람들보다도 못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어니스트를 실망시켰습니다. 이제 어니스트 자신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는 저녁 시간에, 어니스트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앞에 서서 그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매우 힘이 있었는데, 이는 그 말이 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며 그의 생각은 매우 깊이 있고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또한 그가 살아온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어니스트는 비록 학교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소박하고 근면한 시골 사람이었지만, 이 모든 것들을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배웠습니다. 그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모인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보라! 보라! 어니스트 자신이 바로 큰 바위 얼굴이 아니냐?”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을 삶의 목표요 소망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자신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큰 바위 얼굴을 따랐으며, 결국 그 사람을 자신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좇는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그 얼굴 뵙기를 기다리면서, 결국 자연스럽게 주님을 닮아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좇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을 좇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이며, 소망이며, 욕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 예수님을 나의 주요 그리스도로 모시기 위해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니스트를 보면서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큰 바위 얼굴이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제 그 마을에 전해내려오던 오래된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보다 더 현명하고 위대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조만간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결코 기다리는 삶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13-14절에서 말하기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느라” 합니다. 그가 좇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좇는 삶입니다. 이 삶은 우리가 장차 예수님의 얼굴을 뵈올 때까지 계속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이 바로 우리의 선이며, 우리의 의가 되며,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요약하자면,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며, 따라서 하나님만 그 선하심으로 인해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나님의 선하심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리며, 또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선을 행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선함에 관한 우리의 소망은 스스로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 예수님을 사모하고, 배우며, 기다리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히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리며, 은혜 받은 자로서 빚진 마음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선한 목자 예수님을 좇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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