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배를 탈 것인가 세상의 배에 부딪칠 것인가?
요한복음 19:16-27
요한복음 19:16-27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순한 양과 같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고 하는 곳까지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른 두 명의 죄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곳에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그룹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로마 총독 빌라도와 그 휘하의 군병들이며,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의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몹시 싫어했거나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체포하고, 재판하고,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고에 따라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못박았습니다. 로마는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은 자랑했으며, 이스라엘은 당시 세계 최고의 종교를 자랑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탄탄한 법률을 기초로 한, 우월한 도덕성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서로 상극이었습니다. 그래서 심하게 부딪혔습니다. 그 여파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Thomas Hardy라는 영국 시인이 쓴 “The convergence of the Twain”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글로 번역하면 “그 둘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는 그 당시 최고의 규모, 기술 및 화려함을 자랑하던 타이타닉호의 침몰에 붙여서 지은 것입니다. 이 시의 요지는 대충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교만함과 허영심으로 이 거대한 쇠 구조물을 세우고, 그 안을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하지만 이 날렵하고 빠른 배가 그 우아한 모습을 드러내고 아름다운 색조를 뽐내는 동안, 저 멀리 그늘진 조용한 곳에서 빙산(iceberg)이 함께 자라갔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역사를 지어가는 그 분이 “이때다” 하는 사인을 보냈을 때, 종말의 때가 왔습니다. 이 둘이 부딪히며 세상이 흔들렸습니다.” 사람들이 타이타닉을 짓고 있는 동안, 세상을 지배하는 그 분은 빙산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둘의 만남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이 역사에 긴 흔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충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2장 3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보이신 환상에 “사람의 손을 대지 않은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렸다”고 합니다. 마치 인간 문명의 최고봉인 타니타닉이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것과 같이, 인간들이 만든 우상이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돌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이 느부갓네살 왕이 본 환상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실현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세상 최고의 문명과 최고의 종교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돌과 부딪힌 것입니다. 당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 세상이 이긴 것처럼 보였지만 최고의 문명인 로마제국과 최고의 종교인 유대교는 마치 타이타닉이 침몰하듯 서서히 가라앉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은 온 세상이 따르고 섬기는 왕이 되셨습니다. 이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렇게 강력하여,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이기시고 또 세상의 왕이 되셨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가 어떻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힘을 품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죽음 너머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늘 이 죽음을 의식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 가장 고상한 일을 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우리 전도사님들과 목사님들 조차도 이 죽음의 그늘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안 죽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많은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불평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었는데, 너희가 (모세와 아론이) 우리를 이 광야로 인도해 내어서 굶어 죽게 하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소에는 착한데, 뭔가 죽음의 기운이 감돌면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러면 애굽땅이 오히려 젖과 꿀이 흐르는 생명의 땅으로 보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시는 사신으로 보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많이 짓고 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이렇듯 죽음의 두려움에 갇혀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삶은 비참합니다. 평생 쫓기며 불안한 삶을 살다가 결국은 죄인으로 죽음에 삼켜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있어서 죽음은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순결하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곧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의로우신 예수님을 죽음이 가둘 수 없었습니다. 무덤이 그 입을 열고 토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 의를 이루셨고,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죽음”을 통한 생명은 구약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이 두려워 아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기꺼이 아들을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오히려 이삭을 살리시고, 그 자손을 크게 번성케 하시고, 심지어 천하 만민이 그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안에서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지켜주는 든든한 반석입니다. 십자가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면 우리 또한 동일한 능력이 임합니다. 죽음의 휘장 건너편에 있는 새로운 지평을 볼 수 있으며, 그 축복의 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게 생명이 될만한 것을 포기하고, 내게 손해가 되고, 고통이 되고, 내 본성의 욕구를 거스르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죽음과 친해지며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참 자유가 임합니다. 이 자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 드리고 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가 세상에서 온전히 자유롭고 하나님과 온전한 하나로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생명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이는 복음이 아닌 것처럼,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삶에는 생명도 능력도 전혀 없습니다.
저는 지난 3년 동안 Gordon-Conwell에서 Christian Theology를 공부했습니다. 힘들게 공부하며 많은 것들을 배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어느 교수님으로부터도 “십자가”에 대한 진지한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제자의 삶이 핵심인데도 말입니다. 영화 타이타닉에 보면 1등실 승객 전용의 예배실이 나옵니다. 1등실 귀족들이 우아한 옷을 차려 입고 서서 경건하게 찬송가를 부릅니다. 저는 가끔 이 타이타닉 예배실과 Gordon-Conwell Campus가 overlap될 때가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문명 국가이고, 또 세계 최고의 기독교 국가입니다. 그리고 Gordon-Conwell은 그런 미국의 뛰어난 문명과 높은 종교성을 다 담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배울 것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배움을 통해 저 또한 웅장한 타이타닉호의 아늑한 예배실로 인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도 듭니다. 타이타닉을 타고 있으면서, 타이타닉과 부딪혀 그 배를 침몰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배를 타고 있으면서 세상과 부딪혀 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곳에서의 삶은 오히려 저 북극의 그늘진 곳에서 조용히 홀로 몸집을 키워온 빙산과 같아야 합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조용히 자신의 몸집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애굽왕 바로와 부딪혀 그의 왕국을 침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냈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세상의 배에 타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기까지 강력한 충격으로 세상과 부딪히셨습니다. 그 충격으로 거대한 로마까지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저는 Gordon-Conwell이 북극의 차갑고 그늘진 바다처럼, 미디안의 황량하고 거친 광야처럼 그런 곳이었으면 합니다. 십자가를 가르치고, 배우고, 연습하는 곳이었으면 합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을 연습하고, 죽음의 휘장 건너편에 있는 영광스러운 생명을 볼 수 있는 강한 자들로 빚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둥지를 트는 대신, 죽기까지 세상과 부딪혀 그 교만과 허영으로 무장한 성문을 열고 몇몇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면 좋겠습니다.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또 그 생명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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