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님 – 믿음이란?
요한복음 4:43-54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올바른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참된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저는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터널”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믿음이란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비밀스러운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통로를 통해서 사랑을 나누며 또한 다른 온갖 좋은 것들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옛 수도인 예루살렘에는 “히스기야 터널 (Hezekiah’s Tunnel)”이라고 불리는 터널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다 왕 히스기야가 단단한 암반을 뚫어 판 인공 터널입니다. 예루살렘은 시온 산 꼭대기에 건축된 도시입니다. 다른 도시들에서와 같은 큰 강물이 없습니다. 이 예루살렘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원은 “기혼(Gihon)”이라는 샘입니다. 문제는 이 샘이 예루살렘 성문 밖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을 긷기 위해서 성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강대국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왔습니다. 적들이 성을 포위하게 되면, 성 내에 갇힌 사람들은 물을 길을 수가 없고 오히려 적들은 성 밖에 있는 우물에서 마음껏 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히스기야 왕은 성 밖에 있는 샘물을 막아버리고, 터널을 파서 이 샘에서 솟아나는 물이 성 내로 흐르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혼 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터널을 통해 이 샘과 연결되며, 이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명의 물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사방에 많은 적들과 시련들로 둘러싸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충만하고, 언제나 행복하고, 언제나 생기 발랄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터널은 단단한 암반을 쪼아서 만든 500m가 넘는 긴 터널입니다. 마땅한 도구가 없던 수천 년 전에 이와 같은 터널을 뚫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속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터널을 뚫는 것도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이는 우리 속에 매우 단단한 불신의 바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치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 속에 “믿음의 터널”을 건축하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중요한 교훈들을 주십니다. 그것은 “믿음의 본질”에 관한, “믿음의 내용”에 관한, 그리고 “믿음의 대상 또는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평생을 들여서 500m가 넘는 긴 터널을 어렵사리 뚫었는데, 다 뚫고 보니 거기에 샘이 없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고향인 갈릴리 지방으로 돌아가셔서 가나라는 마을을 방문하셨습니다. 45절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그들이 예수님께서 명절 동안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에 계시는 동안 한 왕의 신하가 가버나움으로부터 와서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아들이 거의 죽게 된 상황이라서 이 신하의 청은 매우 절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좀 “동문서답”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신하는 재차 청했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또 이 왕의 신하가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온 것을 보면, 이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은 것은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문제를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 있어서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보고 믿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며, 진정한 믿음이란 보지 않고서도 믿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란 말 자체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확실한 증거나 근거가 없는 상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일종의 시험(examin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답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정답을 맞추어야 합니다. 답안지를 보고 이를 문제지에 베끼는 것은 ‘시험’이 아니고, 따라서 ‘실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보여주시지 않은 채, 하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시거나 장차 하실 일을 우리가 믿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말씀들에서 믿음의 이러한 본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24절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합니다. 또 히브리서 11:1절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본질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
“보고 믿는 신앙”은 우리의 삶과 생각을 지극히 “협소”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지금 (now) 내 눈 앞에서 (here)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서 눈을 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고 믿는 신앙”은 과거를 통해서 배우지도 못하고, 미래에 대한 소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항상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일에 전전긍긍하며 많은 걱정들에 시달립니다. 1차원적인 삶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왕의 신하 또한 “지금 죽어가고 있는 아들”에 마음이 사로잡혀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잘 알 수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빨리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보고 믿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며, 이로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보고 믿는 신앙”은 사단의 유혹에 빠지기가 매우 쉽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0절 말씀입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표적과 기적”을 보고 믿는 신앙에 머무른다면 결국 사단의 미혹에 빠져 멸망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이 때야말로 “하나님을 믿을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있더라도, 그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대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이 내 삶과 생각 속에 “뿌리 깊은 습관”으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우리 삶과 생각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주님의 영원한 나라로 확장되며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둘째, 믿음의 내용에 관하여, 믿음이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이 죽기 전에 빨리 내려오셔서 아들을 고쳐달라는 신하의 간곡한 요청에, 예수님은 그와 함께 가시는 대신 “말씀”만 하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놀랍게도 이 신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혼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데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았으며 이를 믿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만 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붙드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왕은 몸소 일어나서 이것 저것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일하십니다. 왕께서 말씀만 하시면 그냥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왕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면, 사실 그 “말씀” 자체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듣는 자는 마치 왕을 모시듯이, 그의 “말씀”을 마음 속에 모셔야 합니다. 왕이 눈 앞에 계시든 계시지 않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지금 내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막연히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중심에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복숭아의 중심에 씨와 이를 감싸고 있는 단단한 핵이 있듯이, 우리 믿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나깨나 늘 이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는 우리에게 두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죽어가는 아들”이라는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로 올 때이며, 다른 하나는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시는 말씀을 안고 집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처음 예수님께로 올 때, 그의 마음의 중심에는 “죽어가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심히 어둡고 무겁고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시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제 돌아가는 신하의 마음 중심에는 “죽어가는 아들” 대신,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한결 가볍고 밝았습니다. 마치 구름 위를 나는 듯 했습니다. 이는 그의 영혼에, 그리고 그의 삶과 생각 속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두렵고 어려운 문제를 갖고 있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 중심에 그 문제 대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될 것을 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며, 능력입니다.
셋째, 믿음의 대상 또는 목적에 관하여,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종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살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신하는 종들에게 아이가 낫기 시작한 때를 물었습니다. 이는 그가 돌아오는 길에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골똘히 생각했었음을 보여줍니다. 5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여기서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함은 그와 그의 집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로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끝은 “아들이 살아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온 집이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신하가 결국 얻은 것은 “건강한 아들”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집안에 임한 진정한 축복입니다.
믿음이란 사실 두 인격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이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목자”로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항상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OO로부터의 (from) 구원”이며, 다른 하나는 “OO로의 (to) 구원”입니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애굽 왕 바로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7:16, 8:1, 8:20, 9:1, 9:13, 10:3).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이란 바로의 압제로부터의 (from) 구원이며, 더 나아가 여호와께로의 (to) 구원입니다. 사실은 두 번째 부분이 매우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믿는 자들이 “반쪽자리 구원”에 만족하며 광야에서 방황하거나, 심지어 애굽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음을 갖도록 도우시는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아빠!” 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를 부를 때, 우리는 이미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며, 이제 굳이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합니다 (하박국 2:4, 로마서 1:17). 이는 믿음이 우리의 삶의 근본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다 잃더라도 믿음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하나님께로 연결시켜주는 “히스기야 터널”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며, 우리가 믿으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단단한 불신의 바위를 깨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믿음의 터널을 뚫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이 믿음의 터널을 통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의 물과 생명의 빛이 우리 속에 끊임없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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