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 4:1-20
아마도 사람들은 모두 ‘후회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인생을 다 살고 나서 이 세상을 떠날 시간이 되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때, 후회할 것이 많고 허망한 느낌이 든다면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많은 것을 이루었거나 좋은 것을 누렸더라도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행복한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 사도 바울 또한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고백합니다 (디모데후서 4:7).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삶이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시편 126:5,6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로 돌아오리로다.” 우리의 삶은 씨를 뿌리고 거두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선 ‘좋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을 이 씨를 가꾸고 키우는데 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지막 날은 ‘추수 때’가 될 것입니다. 뿌린 것을 거두는 때입니다. 눈물을 닦고 기쁨을 누리는 때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후회 없는 삶 곧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맺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배에 앉으시고, 사람들은 물가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모여 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가지 비유들(parables)을 이용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듣고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이 두 세계가 서로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비유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농부들이 농사를 짓거나, 여자들이 누룩으로 빵을 만들거나, 어부들이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이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설명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시는 또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11,1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비유는 “너희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드러내는 “계시”이지만, “외인들” 곧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는 “베일”과 같습니다.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한 반면, 저는 서른이 훨씬 넘어서야 외국 생활을 시작해서인지 아직도 영어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아이들과 함께 TV를 볼 때면 자주 아이들이 웃거나 놀랄 때 저는 왜 이들이 그렇게 반응하는지를 모릅니다. “천국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언어는 한국어도 영어도 아닙니다. 히브리어도 헬라어도 아닙니다. 그것은 비유 곧 “천국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이 언어는 오직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만 듣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그 놀랍고 복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란 예수님과 그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나누는데 사용하는 “비밀 코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시작하시는 서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으라!” 또 비유를 끝내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여기서 “들으라!” 하심은 단순히 소리를 들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의를 기울여서 듣고 또 반응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흔히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제발 말 좀 들어!” 하는 말과 비슷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들으라!” 하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대표적인 말씀은 신명기 6:4,5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또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은 다음과 같은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사야 1:2). 이렇게 “들으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의 완악한 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런 고집 센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계속 “들으라!” 하시며 마음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거꾸로 된 그림”입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정작 듣기를 간청할 입장에 있는 편은 “죄를 짓고 어려움에 빠진 우리 사람들”입니다. 열왕기상 8:28절에서 이스라엘 왕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우리에게 참으로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입을 닫으시고 귀를 닫으신다면 우리는 영원한 절망 속에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들으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기쁘고 반가운지 모릅니다. “들으라!” 하심은 주께서 우리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심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이 씨들은 네 가지 서로 다른 상태의 땅에 떨어집니다. 더러는 딱딱한 길 가에, 더러는 흙이 얇게 덮인 돌 밭에, 더러는 잡초가 무성한 가시덤불에,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오직 좋은 땅에 떨어진 씨들만이 잘 자라서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이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14절에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땅’은 그 말씀을 듣고 받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농부가 씨가 땅에 뿌리듯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점들에서 ‘씨’와 닮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씨는 우리 눈으로 보기에 작고 볼품이 없지만 ‘생명의 지식 (genetic code)’을 품고 있습니다. 이 지식은 매우 신비롭고 정교한 것이라서 사람들이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작은 ‘겨자씨’ 한 톨을 만들 수 없습니다. 씨는 오직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말씀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지식’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지어낸 많은 지식들이 있습니다. 이런 지식들은 사람들을 교만하게는 할 수 있지만, 결코 그들에게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거짓 지식들’입니다. 마치 뱀이 하와에게 심은 거짓말과 같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4,5). 씨앗이 보잘것없듯이, 세상의 지식에 비해 하나님의 말씀은 ‘초라’하게 보입니다. 마치 로마의 황제에 비해서, 그 황제의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어마어마한 생명의 능력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보다 강한 능력은 오직 말씀에만 있습니다.
말씀이 씨와 닮은 또 다른 점은 그것을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씨는 그 안에 생명을 담고 있지만, 땅에 심기지 않으면 그냥 씨로 남아있습니다. 심겨지지 않은 씨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몇 년이고 그냥 ‘한 톨’ 그대로 있습니다. 하지만 씨가 일단 땅 속에 심기면 마치 마술 같이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작은 씨에서 뿌리가 나고, 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말씀은 ‘책 속에 쓰여진 글’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 상태로는 그냥 ‘까만 글자들’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우리 마음에 심으면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며 우리의 삶이 신기하게 변합니다. 단순히 말씀을 영접하고 마음에 둠으로써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공부할 때 우리는 보통 ‘적용(application)’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곧 배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또는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자주 우리의 ‘세상에서의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또 씨가 자라는데 시간이 걸리듯이, 우리가 말씀의 살아있는 능력을 ‘실감’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며 그 시간은 수 년 또는 수십 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적용하는 습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기 싶습니다. 이는 말씀을 받을 때 그것이 “지금 당장 내게 얼마나 유용한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밭에 심어 키워야 할 씨앗을,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솥에 넣어 삶아 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유익하지만 그것이 말씀을 받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접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 말씀이 지금 당장 유용하기는커녕 오히려 많은 문제들을 일으킬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을 마음에 지켜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말씀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상태의 땅들 곧 딱딱한 길 가와, 흙이 얇게 덮인 돌 밭과, 잡초가 무성한 가시덤불과, 그리고 좋은 땅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닫아서 그 말씀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말씀을 잘 듣지만, 그 말씀으로 인해 환난이나 핍박을 받으면 곧 넘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듣되 온갖 염려들과 사나운 욕심들이 마음에 가득해서 그 말씀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들을 사람들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좀 더 나은 삶을 기대합니다. 현재 겪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거나,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생기거나, 생활의 환경이 개선되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그 말씀을 내 안에 심으심으로써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가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곧 ‘나 자신’이야말로 변화되고 해결되어야 할 문제의 근본입니다. 사실은 단지 이것을 깨닫고 영접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성경학자들은 말하는 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과정을 보통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드러내고 (reveal), 책망하고 (rebuke), 용서하고 (redeem), 회복하는 (restore) 것입니다. 이렇게 ‘치열한’ 과정을 통해서 한 편으로는 내 자신이 ‘좋은 밭’으로 변화되어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내 속에 무성하게 자라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좋은 밭이란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완악한 마음, 바위 같은 마음, 많은 걱정들, 그리고 사나운 욕심들은 “매우 뚜렷한 자아”를 갖고 있어 보이는 반면, 말씀을 순순히 듣고 받는 마음은 한 인격으로서의 특색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냥 듣고 받기만 하는 매우 “수동적인” 마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밭을 가리켜 “좋은 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입니다.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라고 불리는 고대 신학자는 on the Cosmic Mystery of Christ라는 그의 책에서, 거듭나기 전의 사람과 거듭난 후의 사람 곧 ‘육체 가운데 있는 사람’과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을 각각 ‘능동성 (activity)’과 ‘수동성 (passivity)’으로 정의했습니다. 육체 가운데 있는 사람은 ‘능동적인 행위자 (active agent)’로서 끊임없이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위해 일합니다. 반면에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수동적인 피행위자 (passive recipient)’로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의 역사에 자신을 맡깁니다. 이것을 가리켜 혹자는 ‘능동적인 수동(active passivity)’라고 합니다. 곧 “기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심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분명한 진리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오직 “마음에 뿌려진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말씀이 뿌려진 마음”에 대해서만 일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며, 또 그 말씀을 받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좋은 씨”가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밭”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100% 수동적인 피행위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왕성히 역사하시며,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에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는 행복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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