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예수님 – 주 되신 예수님 (II)
요한복음 2:1-1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님이신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Lord)로 만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다른 무엇과 비견할 수 없이 커다란 변화입니다. 이 변화된 삶을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의 주가 되시는지, 이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리고 이러한 주님께 맞추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 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물과 같이 맹맹하던 삶이 포도주와 같이 맛있는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바를 요약하면, 주님 되신 예수님은 “나의 때”가 아니라 “주님의 때”를 따라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급함으로 나의 때를 고집하지 말고, 믿음으로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주님 되신 예수님은 그 하시는 말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순종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또한 순종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더 생각해 볼 것은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의 믿음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마지막 11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말씀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사 혼인잔치를 축복하신 이 사건의 총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론이란 “예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영광”이란 어떤 사람을 높이고 영예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학생이 공부를 잘 해서 명문 대학교를 들어가거나, 운동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사업가가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영광스러운” 일들입니다. 이러한 성공들이 이들에게 영광이 됩니다. 즉, 이를 통해서 이들의 이름이 높아지고 또 명예롭게 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따라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이사야서 42:8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또 같은 장 11절에서는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하니하리라.”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모두 “그의 이름”의 영광이 걸린 것이며, 또 주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심을 보여줍니다. 이 점에서, 오늘 말씀에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누구신가”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진리를 증거합니다. 곧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상관이 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신이 차지하려는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 영광”을 구하며, 또 자기의 이름에 해가 되는 일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곧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죄로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0,2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 말씀은 바울의 인생의 목적이 “자기 영광”에서 “주님의 영광”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주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이 죽는 것이라도 자신한테 “유익한”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붙잡고자 애쓰는 “영광”은 사실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풀이나 꽃과 같아서 금방 시들고 말라서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주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높이십니다. 우리에게 “잘했다”고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와 장차 올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들이야말로 “영원한 영광”입니다. 주님 되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그의 고난에 참여한 충성된 종들이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은 또한 예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주님 되신 예수님의 “일꾼”이 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곧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한 로마인 백부장이 병들어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위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종을 구원해 주시도록 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의 집으로 가시려고 하자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말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이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 예수님의 칭찬을 생각하면, “주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온전하고 고상한 믿음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경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꾼으로 일을 할 때, 우리 속에 반드시 내가 순종해야 할 “주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의 일”이 되는 것이며, 그 일에 주님의 권세와 능력이 임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의 말씀이 우리가 하는 일의 “시작과 끝”이 되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은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7,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 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이 말씀은 혼인 잔치의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순종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말이나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말이나 모두 하인들에게는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들입니다. 그 일 자체가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순종한다”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의 어원적인 기본 뜻은 “듣는다”입니다. 좀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마음으로 듣고 이에 반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씀으로 일하시는” 주님께서 “순종하는 자들” 곧 “듣는 자들”과 함께 일하심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반대로, “듣는 자들”이 없으면 주님께서 말씀으로 일하시기가 어렵습니다. “순종하는 자들”이 주님께서 일하시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내 생각”이 아닐까 합니다. 곧 귀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만, 마음으로는 “다른 생각들”을 하는 것입니다. 잔칫집의 하인들은 해야 할 일들도 많고, 눈치를 보아야 할 상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있는 하인들을 보면서 쓸데 없는 일을 한다고 책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발 씻는” 물을 마시라고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올곧게 순종하기 위해서, 하인들은 그 마음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자기 생각들을 부인하는 싸움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싸움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은 사실 하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은 바로 예수님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권세”가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의 말씀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실 때 생기는 엄청난 변화들 중 하나입니다. 두려움과 불신으로 우왕좌왕하던 복잡한 생각들이 사라지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내 마음과 영혼이 단정해지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과 불신과 욕망의 생각들을 포박하여 주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나의 주님 되신 예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멘” 하며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받아 몸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변화의 역사이며 창조의 역사입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콩이 팥이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꺾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콩이 팥이 될 수도 있고, 물이 포도주가 될 수도 있으며, 갈릴리의 불학 무식한 어부들이 인류의 역사에 빛을 비추는 스승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10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비유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고 그 포도주로 혼인 잔치를 축복하신 주님의 일로 잘 증거가 됩니다. 즉 우리는 “물”로 태어나 평생 물 같이 맛 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부터 “포도주”의 재료이며 포도주로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도록 예비된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나의 출생이나, 받은 교육이나, 가진 소유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합니다. 곧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내게 임한 “예수님의 역사(Jesus’ works)”입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역사가 낳은 작품(workmanship)입니다. 마치 투박한 원석이 장인의 손을 거쳐 신기한 빛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보석이 되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신묘한 역사 안에서 이전 모습을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연회장은 하인들이 떠다 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았지만,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포도주는 연회장이 평생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좋은 포도주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가 어디서 온 것인지 어리둥절했습니다. 이런 연회장과 비교하여, 성경 저자는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의 일에 참여한 이들은 이 좋은 포도주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떠들썩한 혼인 잔치에서 “평범한 모습의”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매우 은밀하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매우 은밀하게 주님께서는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의 근원 되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Lord)로 만나고, 또 나의 주 되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이 은혜를 입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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