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자, 영적인 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
고린도전서 2:6-16
오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지혜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지혜”라는 단어와 함께, “영 (spirit)”에 관한 단어들도 매우 자주 등장을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영,” “사람 속에 있는 영,” “세상의 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등이 나오며, 또 “영적으로,” “신령한”과 같은 형용사적 표현들도 볼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것,” “하나님의 사정,” “주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 등도 “영”이라는 말과 깊이 관련이 있는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들을 근거로 미리 결론을 내리자면, “지혜로운 자”란 “영적인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영적이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제가 제 아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들 중 하나도 “Everything is about spirit”라는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영이다” 또는 “모든 중요한 것은 영에 관한 것이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영적이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읽기, 기도 생활, 전도 활등에 헌신하는 것, 세상의 보이는 것들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는 것, 마음과 말과 행동이 겸손하고 진실한 것 등은 모두 “영적인 삶”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삶”의 이러한 면들은 그 자체가 영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어떤 사람이 영적일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 곧 “영적인 삶의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이다”라는 말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영적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과 마음으로 통할 때,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되며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6,7절에서 사도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서로 대비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없어질 관원의 지혜”라고 소개하는 반면, 하나님의 지혜는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며 “우리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없어질 세상의 지혜에 비해,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한 것이며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는 지혜입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어떻게 지혜를 평가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지혜는 그 열매로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없어질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열매도 없습니다. 에베소서 5:11절에서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권하며, 로마서 7:5절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는 열매를 맺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세상의 지혜”의 본질이 어떠하며 또 그것의 열매가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지혜란 그 자체가 “어두움”이며 “죄의 정욕”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합니다 (요한1서 2:16). 하지만 이런 것들에 성공하여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갔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그가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열매는 “죽음”입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없어지며, 그의 성공도 지혜도 다 잊혀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빛보다 어두움이며, 생명보다 죽음이며, 영광보다 부끄러움입니다.
없어질 세상의 지혜에 비해,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한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혜를 감추어두셨다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내시고, 또 성령님을 통해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지혜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이 지혜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도, 귀로 들을 수도, 마음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지혜라기보다는 “어리석음”입니다 (14절). 그래서 무시당하고 배척을 당합니다. 심지어 세상은 “지혜 자체”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정도로 하나님의 지혜를 싫어합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혜”란 곧 그 사람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란 자랑스럽게 목에 건 목걸이나 머리에 쓴 관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보이지 않게 지혜를 겨루고 지혜를 자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그 사람의 “자랑”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어리석음”으로 비추어집니다. “지혜”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며, 다른 하나는 “완전히” 포기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로 칭송 받을 소망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세상의 지혜”란 어두움을 좇다가 죽음에 이르는 허망한 것임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다른 점은, 세상의 지혜는 보이는 (또는 보여줄 수 있는) 반면, 하나님의 지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상의 지혜는 “육체”에 관한 것인 반면, 하나님의 지혜는 “영”에 관한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세상의 지혜란 “눈에 보이는 육체의 자랑”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지혜의 뿌리에 관해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깊은 것” 또는 “하나님의 사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달리 “하나님의 마음” 또는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갖는다는 것은 곧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또 그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 또는 영적인 자로 인정하시는 사람이란 바로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말째이며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준수한” 그의 형들 대신에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사도행전 13:22).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곧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해서도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하십니다 (마태복음 12:18). 이와 같이 세상의 지혜는 나로 세상에서 “육체의 자랑”을 얻게 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나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곧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 앞에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고 역사하실 때,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게 되며 또 경외함으로 그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11: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리니.” 이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 곧 예수님께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하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성령님은 “지혜와 지식의 신”이시며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는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이 지혜는 우리의 영으로 받고 깨닫는 지혜이며,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지혜입니다. 따라서 이 지혜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살아있는 지혜이며 능력 있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마음으로 통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을 때, 우리의 눈이 달라집니다. 이전에 세상에서 지혜로워 보였던 것들이 미련하게 보이고, 또 세상에서 미련하게 보였던 것들이 지혜롭게 보이게 됩니다. 곧 신령한 것을 분별하는 분별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거룩한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 하나님이시니 당연히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신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신 것은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하여 빌립보서 2:5-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고 이에 100% 순종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지혜와 지식의 신”이시며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신 성령님께서 주님 안에 충만하신 상태입니다. 또 이 마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해서 주신 “선물”입니다.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자가 될 때,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 속에 있던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에게 영광이 되며 생명이 됩니다. 우리 각자가 이렇게 지혜로운 자, 영적인 자,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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