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네 원수를 사랑하라 (마태복음 5:38-48)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5. 22. 03:58

네 원수를 사랑하라

 

마태복음 5:38-48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통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들은 천국 시민의 특성들과 또 그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삶의 원리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이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일부입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거의 대부분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덴마크 동화 작가인 안데르센이 지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인 미운 오리 새끼는 비정상적으로 큰 몸과 못생긴 외모로 인해 다른 오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곳 저곳 곧 이 세상 저 세상을 기웃거렸지만 그는 어느 곳에서도 이상하게 생긴 외부자였습니다. 암탉은 미운 오리 새끼에게 네가 알을 낳는 법을 배우면 사랑을 받을 거야라고 충고를 하고, 고양이는 네가 귀여운 소리를 내는 법을 알면 귀여움을 받을 거야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충고들은 미운 오리 새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미운 오리 새끼는 물 위에 떠 있는 한 무리의 아름다운 백조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하얀 자태와 미끄러지듯 물 위를 유영하는 우아한 모습을 보면서 미운 오리 새끼는 더욱 자신의 못생긴 것을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백조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이 우아한 백조들이 못생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로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이렇게 아름다운 백조들에 의해 죽는 게 더 낫겠다 싶어 순순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물 속에 비친 자신을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물 속에 비친 자신은 예전의 그 거무튀튀하고 못생긴 오리 새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조였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많은 고생을 했던 것은 우선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세계 밖에서 방황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속한 세계가 어디인지를 잘 알고, 그리고 바로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45).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천국 곧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우아하고 고상한 나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천국은 백조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나라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사랑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숨이 막힐 정도로 눈이 부시고, 평화롭고, 풍요로우며, 아름답고, 행복한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방향과 목표를 지시하는 중요한 두 가지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기초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38-42절에서 예수님은 범인으로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들을 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구약의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종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러가지 법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애굽기 21:23-25).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9:6절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이 말씀들은 기본적으로 속죄 (redemption)”와 이를 통한 하나님의 공의 (justice)”를 말하고 있습니다. 곧 어떤 사람이 잘못을 하면 그것을 보상하거나 징벌함으로써 공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생명에는 생명으로, 피에는 피로 되갚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속죄를 통한 공의라는 이 기본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듯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오른 뼘을 치면 왼 뼘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내어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구약의 계명과 비슷한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 또한 오른 뺨에 왼 뺨,” “속옷에 겉옷,” “오리에 더하여 오리등의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속죄를 통한 공의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새 말씀이 구약의 말씀과 다른 점은 죄를 범한 자가 해야 할 속죄, 손해를 입은 제자들이 하라는 것입니다. “속죄나 보상이란 기본적으로 잘못을 한 사람이 그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해 대신보상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손해를 입은 것도 억울한데, 그 손해에 더하여 그 손해를 덮기 위한 속전까지 부담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 없는 말씀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복음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로마서 5:8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은 줌으로써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forgiving by giving). 이 사랑은 은혜로 죄를 덮어주고 죄인을 의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보다 더 크고 높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바닷물과 같아서 가장 깊은 협곡을 채우며 가장 높은 봉우리를 덮습니다. 바닷물은 아무리 깊은 골이라도 다 채우며 아무리 높은 봉우리라도 다 덮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리 소망이 없는 죄인도 능히 충만하게 하시며 아무리 의로운 자라도 그 은혜 아래 가두십니다. 이렇게 해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오직 그 사랑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이며 우리에게 임한 천국입니다. 바다에 나가면 온통 바닷물만 보이듯이, 천국에는 오직 모든 죄를 덮는 하나님의 사랑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어처구니 없는 말이 아니라 천국의 자녀들의 중요한 삶의 원리가 됩니다. 이 사랑으로 천국의 자녀들은 세상과 함께 하며 동시에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천국의 자녀들은 세상을 섬기며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보호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천국의 자녀들은 세상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로 사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건기가 되면 강에 물이 마르고 결국에는 강 바닥이 드러나며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물웅덩이들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물고기들은 작은 물웅덩이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흙탕물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비가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우기가 되어 비가 쏟아지면 다시 강에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물 웅덩이에 갇혀있던 물고기들도 풀려나게 됩니다. 자유롭게 강물을 따라 오가며 물고기다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여기서 물은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사랑이란 건기에 남은 작은 물웅덩이와 같습니다. 사랑이 메마른 세상에서 사람들은 작은 웅덩이에 갇혀 삽니다. 가족이나 겨우 몇 명의 가까운 사람들을 벗삼아 그나마 가까스로 물기를 느껴봅니다. 이 웅덩이를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웅덩이를 둘러싸고 있는 죄의 벽이 너무 높고 험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기회만 있으면 나의 뺨을 때리거나 나의 속옷을 빼앗거나 나에게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려는 원수들로 가득합니다. 웅덩이를 벗어났다가는 이런 원수들에 의해 밟히고 금방 말라서 죽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작은 물웅덩이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사랑입니다. 그것은 마르지 않는 맑고 시원한 물이며, 깊이를 알 수 없이 깊이 흐르는 강이며, 온갖 생물들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이 물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벽에 갇혀서 숨을 헐떡이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43-45절 말씀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따라서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특히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부분은 원수에 대한 사랑입니다. 48절에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말씀과 대응하는 절인 6:36절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함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쓰여있습니다. 이 말씀들로 미루어보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따라 온전해져야 할 것은 바로 자비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비함에서 온전해야 합니다. 자비함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며 능력입니다. 자비함이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주신 이며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오직 이 사랑의 법, 사랑의 능력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며 치열하게 이기적인 삶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 원수를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이런 삶을 사는데 다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내가 사는 세상을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오리들과 함께 살면서 자신이 오리이며 오리들의 세계가 자신의 세계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오리들처럼 꽥꽥소리도 내지 못하고 생김새도 그들과 달라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비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백조인 것을 발견하고 또 백조의 무리 속으로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이 정상으로 회복되고 또 말할 수 없이 우아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길은 세상과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높은 톤으로 꽥꽥소리는 내거나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길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안에서 더욱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배우고 연습하며, 사랑에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원수와 싸우고 싶어하는 나의 손발을 묶고, 오직 사랑으로만사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싸우는 이 믿음의 싸움이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끝까지 싸우고 이겨야 하는 싸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비슷하지만 서로 원수가 되어서 미워하며 싸우며 자기 속에 갇혀 외롭고 불행한 삶을 삽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만 오히려 원수들까지도 품고 사랑하고 섬기면서 자유롭게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삽니다. 이런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증거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신 삶이며 우리가 따라야 하는 삶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믿는 자의 능력입니다. 이 행복하고 능력 있고 자유로운 삶이 우리의 매일의 삶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