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사울을 살려준 다윗 – 불리한 싸움 (사무엘상 24:1-15)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6. 5. 03:40

사울을 살려준 다윗 불리한 싸움

 

사무엘상 24:1-15

 

크리스천들은 세상에 살면서 여러가지 종류의 시험들을 겪습니다. 세상의 즐거움, 부요함, 화려함과 같은 유혹들이 늘 눈 앞에 있습니다. 먹고 사는 걱정 또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불신자들 사이에서 믿음을 지키며 평안하게 사는 것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런 시험들은 견딜 만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인의 형통함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지만 특별히 잘되는 일도 없고 오히려 많은 문제 속에 허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상관 없이 마음대로 악하게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성공하고 번성하며 아무런 걱정 없이 삽니다. 이런 악인의 형통함을 볼 때 우리 마음 속에 의심이 생깁니다. 시편 73편은 이런 믿는 자의 고민을 실감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2,3). 또 이렇게 한탄합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12-14).

 

오늘 말씀의 두 주인공은 다윗과 사울왕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며 또 매우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충성됨은 그가 목자로서 어떻게 양들을 돌보았는가를 통해서 잘 나타납니다. 다윗은 본래 그의 아버지 이새의 양들을 돌보는 목자였습니다. 어느 날 선지자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중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신 자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이새의 마을인 베들레헴을 찾았습니다.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일곱 명만 사무엘 앞에 섰고 막내 다윗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곱 명들 중 아무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이새에게 물었습니다. “네게 아들들이 이들뿐이냐?” 그러자 이새가 대답했습니다. “아직 막내가 있는데 그는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대통령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VIP를 맞이하기 위해서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모였으며, 이새의 아들들은 이 특별한 행사에 공식적인 초대를 받은 터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흥분되는 행사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항상 하던 것처럼 들에 홀로 남아서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그에게는 양을 돌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후에 다윗은 사울왕 앞에서 수금을 연주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왕의 신하가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들에서 양을 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17:15절은 다윗이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 아비의 양을 칠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하루는 아버지 이새가 다윗에게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라는 중요한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나서 심부름을 떠났습니다 (사무엘상 17:20). 성경은 참으로 깨알같이 섬세하게 다윗의 목자로서의 충성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충성스럽게 돌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다윗은 단신으로 블레셋 거인 용사인 골리앗과 맞서 싸우고 그를 죽여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다윗을 칭송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은 다윗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로 보고 그를 시기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미워하고 급기야는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이렇게 하여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소수의 무리와 함께 이곳 저곳으로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사울은 다윗 일행이 엔게디 황무지라는 곳에 있다는 보고를 듣고, 3000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다윗을 잡으러 나섰습니다. 그 때 다윗 일행은 어떤 굴 깊은 곳에 숨어있었습니다. 다윗을 쫓다가 피곤해진 사울은 잠시 쉬기 위해 한 굴에 들어가 그곳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굴은 바로 다윗 일행이 숨어 있던 곳이었습니다. 다윗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울이 들어와 잠이 든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원수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습니다. 다윗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주신 기회라며 사울을 죽이라고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대신 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심이 심히 찔림을 느끼고 물러나서 말했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이렇게 말할 뿐 아니라 그는 다른 사람들이 사울왕을 해치지 못하도록 사울왕을 보호했습니다. 혹 누군가가 다윗을 위한답시고 사울왕을 죽이려고 했다면, 그는 필시 다윗의 칼에 죽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무죄한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려는 원수 사울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 경외하고 보호했습니다.

 

사울왕과 다윗의 처지는 참으로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사울은 아무 죄도 없으며 심지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서 온 나라를 쥐 잡듯이 뒤지고 다녔습니다. 그에게는 3000명의 정예병을 포함하여 많은 병사들이 있었으며, 곳곳에 그를 위해 다윗의 동태를 보고해주는 정탐꾼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다윗은 사냥꾼에 쫓기는 불쌍한 들짐승과 같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이동하고, 굴 속에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하루 세끼 먹을 것을 구하는 것도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윗 조차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과 같다고 토로할 지경이었습니다 (14). 하지만 다윗에게는 이런 외적인 문제들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예민한 양심이었습니다. 사울은 백주대낮에 드러내놓고 불의한 짓을 하고 다니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눈 앞에 보이기만 하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창을 던져 그 몸을 꿰뚫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가 원수 사울을 죽이는 것은 100% 정당방위였습니다. 그를 죽인다고 해서 아무도 다윗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이미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민한 양심은 그가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사울 왕의 옷자락을 살짝 베었는데도 그의 양심은 마치 불에 데인 듯 고통스러웠습니다. 원수를 눈 앞에 두고도 그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원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 사람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이 사울과 다윗의 싸움에서 사울은 아주 유리한 위치에 있고 다윗은 매우 불리합니다. 다윗은 불리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요? 이는 사울은 법 없이 싸우는 싸움을 하며, 반면에 다윗은 법대로 싸우는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 법을 지켰습니다. 다윗에게 이 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들짐승처럼 쫓기며 사는 이 비참한 생활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알량한 (good-for-nothing)” 양심 때문에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것도 차마 못할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지켰습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윗은 쥐만큼의 용기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느니, 차라리 개처럼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것이 나았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매우 불리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이는 그가 사울의 칼이나 죽음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불리한 싸움은 또한 우리 믿는 자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평생 싸우는 싸움은 원수와 경쟁하여 이기는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마라톤 경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은 정해진 경로와 규칙을 따라 달리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이 경기에서는 빨리 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해진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규칙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빨리 가겠다고 경로를 이탈하거나 경쟁자의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면 그는 실격입니다. 아무리 기록이 좋아도 심판은 그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법을 지키는데 실패한 선수는 이미 진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임으로써 보다 쉽게 그리고 빨리 이스라엘의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칼을 들어 사울의 옷자락을 벨 때 그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경로를 거의 이탈할 뻔 하였습니다. 그의 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피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어놓으신 선을 발로 밟았을 때 그는 놀라서 급히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람들이 그 선을 넘는 것을 온 몸으로 막았습니다. 정말 큰일날 뻔 했습니다. 비슷한 일이 신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던 날 밤에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하자 베드로는 칼을 빼어 그 중 한 사람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급히 그의 귀를 치료해주시고 오히려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칼을 집에 꽂으라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원수 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따라 자신을 드리는 길을 순종하여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그 뜻을 온전히 이루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가 칼을 들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이제까지 하신 일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매우 경솔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이나 베드로가 귀를 벤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싸움에서 거의 실패할뻔한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이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믿음의 법이며, “사랑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법은 오늘 본문 말씀의 12,13절에 나오는 다윗의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에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을 믿었습니다. 악을 심판하고 벌하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로마서 12:19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계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또 다윗은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고 합니다.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고 그가 악인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악함에 대해 악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보호하였습니다. 그에게 선을 베풀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또 말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20,21).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신 두 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다리만으로 서서 걷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그래야만 영적으로 성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인들이 불법하게 형통함을 좇아 누리는 동안,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만 경주를 해야 하는 우리의 불리한 싸움이 때로 무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이야말로 이미 이긴 싸움이며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더욱 강한 믿음의 다리, 사랑의 다리를 주셔서 이 불리한 싸움을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