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 I (마태복음 7:6-1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6. 19. 03:59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 I

 

마태복음 7:6-12

 

오늘 말씀은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축복으로 초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후 강조하여 덧붙이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 곧 우리 믿는 자들이 사는 삶의 독특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기도를 매개로 하여 하나님께서 의지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에 참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다른 종교인들로부터 구별하는 매우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 신자의 삶에서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참여가 없다면, 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마음으로 붙드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참으로 굉장한 약속입니다. 정말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의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약속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의 원하고 구하는 바가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우리의 간절한 기대가 꺾입니다. 더 이상 무엇인가를 구하거나 새로운 도전을 하기가 두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분명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으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여러 참고서들을 읽어보니 이 약속과 관련하여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이 붙어있다니 약간 실망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내가 구하는 것들이 대부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한다는 것이 나하고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집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이 굉장한 약속이 갑자기 그림 속의 떡처럼, 박제된 동물처럼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기도야 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이며 생명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한다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는 거룩한 것을 구하여 받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는 가장 좋은 것을 구하여 받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는 사랑의 마음으로구하여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다음 설교에서 다루고, 오늘 설교에서는 첫 번째 곧 거룩한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로 구하여 받는 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룩한 것그리고 너희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자신과 그 이름이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영도 거룩합니다. 하지만 이에 더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들이 모두 다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여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를 통해 받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4절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신령한 음식이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만나를 말하며, “신령한 음료란 하나님께서 광야의 반석에서 나게 하신 샘물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음식과 물을 가리켜 신령한 음식그리고 신령한 음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이 음식과 물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물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선물을 주기 위해서 그것을 포장지에 쌉니다. 받는 사람은 포장을 뜯어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을 취합니다. 물론 포장지보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선물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실상 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포장 안에 담겨 있는 진짜 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실 때, 그것을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매일 필요한 양만큼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 만나를 거두면서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또 광야의 반석에서 솟아나는 시원한 샘물을 마시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와 샘물을 먹고 마시면서,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먹고 마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먹고 마시며, 이를 통해 평안과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만나와 샘물은 그 안에 하나님을 담고 있는 선물 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여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때, 우리는 그 선물 속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소중하고 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7:11-19절에는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병자들의 병을 치료하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소리 높여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기도했으며,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열 명 모두를 깨끗이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오직 한 명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다만 육체의 치료만을 선물로 받았으며, 그들을 치료해주신 거룩하신 하나님은 받지 않았습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껍데기만 취하고 그 선물 자체는 버린 것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감사드린 한 명의 문둥병자는 이 선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깨끗해진 몸을 예수님 앞에 던져 엎드렸습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받은 선물 곧 하나님을 자신의 몸보다도 더 귀하게 다루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구할 때,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 구하는 것을 주실 때도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된 시가 있습니다. 이슬이라는 초등학생(지금은 중학생)이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쓴 시입니다. 시의 제목은 "가장 받고 싶은 상"입니다.

 

가장 받고 싶은 상.jpg



이전에 엄마가 밥상을 차려주실 때는 그것이 어김없이 차려지는 당연한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지금, 그 매일 차려지던 상이 엄마의 희생이며 사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 시인이 지금 원하는 것은 밥상이 아닙니다. “엄마의 얼굴입니다. 이 어린 시인이 원하는 것은 밥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에게 밥상을 차려드리는 것입니다. 이슬이가 매일 받아 먹은 것은 밥상이 아니라 엄마였던 것입니다.

 

이 시인의 시와 비슷한 시가 성경에도 있습니다. 시편 137편입니다. 다음은 이 시의 앞부분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시편 137:1-6)

 

이 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 백성들이 그들의 고향 시온산과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쓴 것입니다. 이들은 이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예루살렘 성에 거하며,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땅과 성전에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섬기는 대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과 성전은 더 이상 거룩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해서 이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양할 수 없게 된 이들은, 이제 쓸모가 없게 된 악기를 나무 가지에 걸어두고 강가에 앉아 여호와 하나님을 그리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다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주시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을 함께 주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주시는 분 (giver)”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선물(gifts)”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곧 하나님 자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실 때, “하나님 자신을 빼고는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 가장 큰 선물되신 하나님을 빼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 생활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받되 우리는 그것들 속에 담긴 하나님을 함께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감사하고, 오히려 주님께 나를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들을 감당할만한 거룩한 제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