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 III (마태복음 7:6-1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7. 3. 13:22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 III

 

마태복음 7:6-1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우리는 지난 두 번의 강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받는 하나님의 선물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선물들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령한 자들만이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선하시며 인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며 풍성하게 하는 모든 좋은 선물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쏟아 부으십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기도의 약속을 또 다른 주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오늘 본문의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영적 세계를 크게 둘로 나눈다면 은혜의 세계율법의 세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은혜의 세계에 속해 있거나 또는 율법의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속한 나라에서 그 나라의 사는 방식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와 율법의 세계는 서로 매우 다른 삶의 방식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은혜의 세계와 율법의 세계가 어떻게 다른지를 잘 알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세계와 율법의 세계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1:2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kindness)와 엄위(sternness)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얼굴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는 인자하신 얼굴이며 다른 하나는 엄하신 얼굴입니다. 은혜의 세계에 속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주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보이십니다. 하지만 율법의 세계에 속한 자들에게는 엄하신 얼굴을 보이십니다. 단순히 엄하신 얼굴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찍어 내어버리십니다. 우리가 율법의 세계에 있지 않고 항상 은혜의 세계속에 거해야 함은 단지 행/불행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과 죽음, 그리고 영생과 영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내가 지금 은혜의 세계에 있는지 아니면 율법의 세계에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은혜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 곧 율법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세상의 법은 받은 만큼 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받은 것이 나쁜 것이면 그대로 또는 그보다 더 악하게 되갚아주는 것이 세상의 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은 은혜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받은 만큼주는 것이 아니라 받고 싶은 만큼먼저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이 없어도 주는 것입니다. 이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거나 심지어 나에게 악한 일을 행한 원수라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약간의 또는 최소한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곧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으로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9, 갈라디아서 5:14). 이것이야말로 은혜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매우 중요한 법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은혜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 도우심을 구하고 누리는 중요한 삶의 양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 듯이 기도는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곧 은혜의 세계에 속하지 않았더라도,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기도를 합니다. 성경에는 은혜의 세계에 속한 자의 기도와 율법의 세계에 속한 자의 기도를 대조시켜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두 사람 곧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운 삶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은 자신을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특별히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 자신이 행한 2회의 금식과 자신이 드린 소득의 십일조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마땅히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갚으셔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그의 기도는 실상 기도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이 바리새인의 기도와 매우 달랐습니다. 그는 성전의 제단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세리의 기도는 참으로 은혜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며 따라서 주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자임을 인정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가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의지한 것은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은혜의 세계에 속한 자의 기도이며, 은혜를 구하는 기도이며, 참된 기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내가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내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죄인이며, 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인자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세계를 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은혜의 세계에 사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로부터 공짜로 받은 것이며 따라서 갚아야 할 빚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빚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갚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만큼, 우리의 이웃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의 본성을 생각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으로서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얼굴 색을 바꾸어 교만하고, 인색하고, 율법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공짜로 은혜를 베푸셨는데, 나는 이것을 내가 잘나서 받은 것으로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 높아진 마음은 은혜의 세계에서는 치명적인 독과 같습니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던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보고 눈이 뒤집힌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에는 이러한 우리의 본성을 경계하는 경고의 말씀들이 여럿 있습니다. 11:20절에는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하며, 12:16절에는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합니다. 겸손한 마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우리가 은혜의 세계를 사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성품입니다. 이 마음이야 말로 은혜를 은혜로지켜주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은혜는 빚입니다. 로마서 13:8절은 이것을 사랑의 빚이라고 부릅니다. 빚은 갚아야 하는 것이며, 갚지 않으면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은혜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대해 그리고 서로에 대해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갚아야 할 사랑의 빚이 얼마큼인지를 말해줍니다. 얼마큼일까요? 거의 무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평생 불편한 마음으로 이웃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배가 고프면 이웃의 끼니를 걱정하고, 내가 추우면 이웃의 의복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는 사랑의 빚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도 먹을 것도 부족한데 어떻게 이웃의 끼니까지 걱정합니까? 또 이웃이 한두 명도 아닌데 저 한 사람이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원천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는 기도로 그 은혜를 퍼서 세상에 나르는 캐리어(carrier)”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많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부자이시거나, 높은 지위에 있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것은 단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몸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기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시고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에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감사하게도,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도 예수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도 또한 우리 몸을 제물로 드리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은혜의 세계를 풍요롭게 살며, 이웃들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은혜안에 가두셨습니다. 이 안에 있는 것은 은혜이므로 다 공짜이지만, 또한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당연하게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고 겸손히 구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또 값없이 이웃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오직 은혜로 구하고 누리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이웃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