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복음이란? (로마서 3:19-2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7. 18. 04:59

복음이란?

 

로마서 3:19-26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로마서를 포함하여 신약성경에는 복음이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성경에서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은 이 단어를 곧잘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그 목사님 설교는 복음적이야!”라고 하기도 하고, “복음적인 삶이나 복음적인 가치관에 대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럼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복음은 Good News 곧 좋은 소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믿는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게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이 복음에 대해서 설명해 주면 됩니다. 만약 복음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래서 복음을 설명해줄 수 없다면,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매우 곤란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복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라고 말하는 크리스천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피아노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자신을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거나, 자장면도 탕수육도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중국집 요리사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크리스천은 그냥 믿는 자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복음을 믿는 자입니다. 더 나아가서 크리스천은 복음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는 복음 곧 믿음의 내용을 잘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내 것으로 가져야 합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서신인데, 이 서신에서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 (1:1)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 (15:19)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이 복음을 내 복음” (2:16; 16:25)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물론 내가 전한 복음이라는 뜻도 포함하겠지만, 복음에 대한 바울의 깊은 애정과 헌신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애지중지하고 보물처럼 다루며, 하루에도 수백 번씩 아니 수천 번씩 보고 만지고 누르고 합니다. 옛날 전화기는 말 그대로 전화기였으며 오직 전화 통화를 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스마트폰은 개인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며, 따라서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좀처럼 손에서 놓지 않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필요할 때 사용하는 도구의 개념을 넘어서, 스마트폰이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심한 경우, 개인의 삶 전체가 스마트폰 속으로 인스톨(install)”되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사도 바울에게 복음이란 오늘날 사람들의 스마트폰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나의 일부로 가진 자였습니다. 아니면, “복음에 팔린 자또는 복음 속에 인스톨(install)되어버린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루 수백 번 수천 번 나의 스마트폰을 보고 만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복음을 보고 만지고 즐겨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복음은 이미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성취된 것이며, 완전한 것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하신 구원의 약속입니다. 이 복음 안에서 이미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구원의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에베소서 1:13). 세상의 종교와 윤리는 항상 사람이 해야 할 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또는 완전함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여러가지 길들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 (장차 하실 일들을 포함하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 가운데 나의 구원도 나의 완전함(– righteousness)도 이미 다 들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것들입니다. 다니엘서 9:24절은 이렇게 예언합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9:30절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순간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단번에 영원히 대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입니다.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습니다.

 

복음은 이미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무능함을 드러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의 19-20절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며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들에 따르면, 사람들 중 도덕적으로 가장 선한 자와 가장 악한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구원하는데 있어서는 전적으로 무력하고 무능합니다. 우리 안에는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한 줄기 빛도 없습니다. 오직 죽음과 심판과 영벌의 두려움만 있을 뿐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아직 쓸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오히려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심판합니다.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로마서 6:6). 우리의 몸이 죄로 인해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로마서 8:10).

 

복음은 이미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은 또 이 복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짐을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복음을 완성하시는데 도움을 드리지 않았으며, 또 어느 누구도 복음을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신 것이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값없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복음의 은혜를 받습니까? 믿음으로 받습니다. 22절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합니다. 또 마가복음 1:15절에서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십니다. 성경에서 믿는다(believe)”라는 말은 다른 동사들 예를 들어 먹다,” “말하다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다른 동사들은 내가 하는 행위들을 설명하지만,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일을 하시도록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이것은 설명하거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치 환자가 마취된 상태로 수술대 위에 누워 외과의사의 손에 몸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죽은 시체가 무덤 속에 누워서 그 몸을 일으켜줄 부활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취된 몸이나 죽은 시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 치료의 소망, 부활의 소망을 갖는 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기다릴 뿐입니다. “믿음은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원하시는 뜻대로 일하시도록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이 내 안에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이렇게 믿는 자에게 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는 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righteousness)라는 말이 어려운 신학용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는 것이 바로 입니다. 며칠 전 차를 운전하면서 가다가 횡단보도를 그냥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면서 보니 횡단보도 끝에 한 아이가 길을 건너려고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뒤로 경찰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서야 했음에도 그냥 지나간 것입니다. 실수를 알아챈 저는 순순히 차를 길가에 댔고, 경찰차는 이내 사이렌을 울리며 제 뒤로 다가왔습니다. 다행히 경고로 끝났지만 정말 기억하기 싫은 순간이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길에서 횡단보도나 아이들을 보면 거의 자동으로 속도를 줄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가까스로 의로운삶을 이어나갑니다. 주위를 살피며,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말도 조심하고, 실수할만한 일은 하지 않고, 잘 모르는 곳은 가지도 않습니다. 어쩌다가 부끄러운 모습을 들키면 얼굴을 땅에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심지어 어린 아이도 잘못을 감추려고 변명이나 거짓말을 할 줄 압니다. 배고픈 아기가 젖을 빨아대듯이 사람들은 그렇게 간절하게 를 찾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의는 매우 빈약하고 초라합니다. 이사야서 64: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성경에서 는 자주 몸을 가리는 옷으로 비유됩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아서 그것을 입고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주셨습니다. 옷으로 비유하자면 눈처럼 하얀 예복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방탕하게 살다가 거지가 된 후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이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벌거벗은 발에 신을 신기운 것입니다. 이 옷이며, 반지며, 신발은 이 아들이 본래 아버지의 아들로서 누리던 것들이었습니다. 이 옷을 입고, 반지를 끼고, 신발을 신음으로써 이 죄인은 다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는 죄인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아들과 딸로 회복시키는 제일 좋은 옷입니다. 이 옷은 사실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입니다. 로마서 13: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또 갈라디아서 3: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나의 복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내 마음대로 만들거나 바꾸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어서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 속에서 역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나의 지극히 값진 진주로 귀하게 여기며 그 가치를 음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 이 은혜가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