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7:36-50
“좋은 친구는 거울과 같다(A good friend is like a mirror)”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거울처럼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요한복음 15:14,1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친구가 된 것은 이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깊은 비밀들을 알고, 또 이를 그들의 삶 곧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마치 거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명료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거울’과 같은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고 또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거울처럼 드러내는 ‘증인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보다 더 투명하고 깨끗하게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내는 증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죄 많은 여자”도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여자를 통해서 우리는 “죄인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된 자’ 또는 ‘구별된 자’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 종파에 속한 사람들 곧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열심히 공부하고 엄격히 준수하는 삶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구약의 율법뿐 아니라 여러가지 세세한 시행규칙들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이런 규칙들에 따르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도 (마태복음 12:10), 물건을 들고 가는 것도 (요한복음 5:10) 다 법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스스로를 ‘구별된 자’로 여겨 높이고 교만히 행하며,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또 ‘죄인들’을 멸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은 ‘죄인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특히 ‘죄인’을 둘러싸고, 많은 갈등들이 일어났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자면, ‘죄인들’에 비해 이렇게 구별된 의로운 삶을 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더 가까운 친구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벽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친구를 거울로 비유한다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비추는 거울이기보다는 늘 예수님을 왜곡하고 심지어 죄 없으신 예수님을 범죄자로 고소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사함”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곧 죄인들을 부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향해 선포하신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왔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이 사람들의 “죄 문제”에 맞추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면 세상의 역사(history)란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내내 “죄에 빠진 (혹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과 “구원하시는 (혹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 “죄”라는 말은 매우 꺼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죄를 짓지 않고 선하고 의롭게 살고자 노력합니다. 최소한 그렇게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신앙 생활 또한 이러한 노력의 일부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죄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어려운 일은 “죄를 짓지 않고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있는 갈등의 본질도 이것이 아닙니다. 죄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정말 풀기 어려운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의 무게(심각함)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죄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사야 1:18).
위에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주홍” 혹은 “진홍” 같이 붉다고 표현하십니다. 사람의 죄는 마치 하얀 천에 붉은 페인트를 쏟아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제 이 천을 다시 하얗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페인트를 지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러워질 뿐입니다. 이렇게 못쓰게 된 천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 바 “Me Too” 운동과 관련된 여러 사건들을 보노라면, 죄가 갖고 있는 파괴적인 힘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서너 가지 “드러난 죄”로 인해 한 사람이 평생 쌓아놓은 명성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벌금을 내거나 감옥살이를 한다고 해서 이런 죄과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니며, 신원조회(background check)를 할 때마다 가슴의 “주홍글씨”처럼 선명하게 남아서 그 사람을 고소할 것입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를 죄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끼리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드러난 죄”뿐 아니라 모든 숨은 죄와 심지어 마음 깊은 곳의 생각까지도 다 아십니다. 더 나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란 “절대적인 악”입니다. 곧 아무리 사소한 잘못도 하나님께는 무한하게 중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 두려운 사실은 우리의 죄과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벌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세상에는 죄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죄사함”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죄가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고, “선한 행실”로 죄를 포장합니다. 마음 속으로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롭지만, 그럴수록 더 마음을 다잡고 위선(hypocracy)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렇게 사람은 죄 문제를 가슴 깊은 속에 끌어안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두 가지 문제는 더욱 깊어져 갑니다. 죄의 무게(심각함)를 깨닫는 것도 더욱 어렵고 그 죄를 들고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 맡기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집니다.
세상에는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우리 사람들은 모두가 예외 없이 다 죄 아래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를 돕거나 구해줄 처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둘째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짓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어야 하며,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주홍 같이 붉은 죄”를 깨끗하게 씻어서 우리를 눈처럼, 양털처럼 하얗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능력”이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입니다. 이는 정말 놀라운 능력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이보다 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특히 죄인 된 우리에게 기이하고 신비로운 능력입니다. 그것은 “있는 것을 없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곧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모습을 매우 드라마틱하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4:7,8절은 “죄를 덮으신다”고 하시고, “그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에스겔서 33:16절은 “그의 본래 범한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 하십니다. 이사야서 38:17절은 “…… 주께서 …… 나의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하며, 미가서 7:19절은 “(주께서)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며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되, 아주 철저하고 완전하게, 불가역적이며 영구적으로 해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우리가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앞서 말한 두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죄의 무게(심각함)를 깨닫는 것이며 또 그 죄를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과 더불어 두 명의 서로 대조가 되는 등장인물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 많은 여자”이며 다른 하나는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입니다. 이 여자에 대해 37절은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라고 소개합니다. 39절에서도 다시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여자는 자신의 동네에서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시몬이라는 사람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선지자”요 (39절), “선생님”으로 (40절) 떠오르고 계신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을 보면, 그는 최소한 예수님과 동급의 도덕적 영향력을 가진 유력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죄 많은 여인”과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서로 매우 다른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극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37,38절은 이 여자가 예수님께 행한 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계신 동안 이 여자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로 다가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그녀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또 예수님의 발에 자신의 입을 맞추며 그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귀한 것들을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비록 “죄인”이라고 하지만, 여자의 마음, 여자의 눈물, 여자의 머리카락, 그리고 한 방울 한 방울 정성스럽게 모아온 값비싼 향유는 어느 하나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이 소중하고, 섬세하고, 예민한 것입니다. 여자라면 결코 쉽게 드러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동네에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여인이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녀는 늘 자신의 온 얼굴과 머리를 두꺼운 천으로 가리고 다녔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와도 눈물을 보이며 속마음을 털어놓는 대화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향유 옥합을 장롱 깊이 감추어두고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것들을 예수님의 “발”에 아낌없이 드러내고 쏟아 부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 이제 아무것도 가릴 것도, 숨길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 시몬은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시몬은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죄인 됨을 아셨더라면 당연히 그녀를 거부하고 자신을 만지지 못하도록 하셨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시몬에게 예수님께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빚을 진 자가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둘 다 빚 갚을 돈이 없음으로 주인은 이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둘 중에 누가 주인을 더 사랑하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시몬은 “더 많이 탕감을 받은 자니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행동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47절). 예수님께서는 물론 그녀가 “죄인”인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많은 죄를 “모두” 용서하셨습니다. 그녀의 죄 문제가 예수님을 통해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는 아무런 벽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그녀 속에 비추어지고, 그녀는 온전히 예수님 속에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막힘이 없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죄 많은 여자”에 비해, 의로운 시몬은 여전히 “죄”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을 씻는 여자를 보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죄인 된 여자에게 발을 씻도록 맡길 수 있는가 의아해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며 죄사함을 선포하시자 (48절), 속으로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는 죄인을 영접하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의 은혜 대신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의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하십니다. 겉은 마치 평탄한 길처럼 그 위에 사람들이 오가며 머물지만, 그 속은 썩은 시체의 더러운 냄새가 가득한 무덤입니다. 그는 죄를 떠나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신의 죄의 심각성도 모른 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기다리는 무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모든 죄를 내려놓고 죄사함을 받은 이 “죄 많은 여자”에 비하면, 바리새인 시몬의 앞날은 정말 컴컴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를 무서워하고 감추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지은 후 처음 한 일은 두려움과 수치심에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몸을 가리고 나무 뒤에 숨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죄를 가리기 위해 “더욱 보기에 좋은 옷들”을 만들어 입고 다닙니다. 심지어 우리의 신앙생활도 겉치장으로 변질됩니다. 그리고 이 옷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나뭇잎을 엮은 옷을 벗기시고 대신 튼튼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창세기 3:21).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넝마 같은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벗기시고, 예수님을 입히십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이사야 64:6).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 수 있는 순결한 예복이 되십니다. 우리가 더러운 자기 의를 벗고, 예수님 앞에 담대히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주님께 맡김으로 죄사함과 참된 자유를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제 주님과 나 사이에 아무런 막힘이 없어, 온전히 예수님의 은혜를 세상에 드러내는 주님의 거울 같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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