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마가복음 15:1-47
세상에는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 종류는 함께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함께 있지 않으면 잘 보이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함께 있을 때는 잘 보이지만 함께 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함께 있어도 잘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할 뿐 아니라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한 일들까지도 묵묵히 대신 해줍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순조롭고, 사람들 간에 다투는 일도 없습니다.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존재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가치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없어지면 전혀 다른 상황이 됩니다. 갑자기 일은 엉망진창이 되고 사람들은 서로를 탓하며 싸웁니다. 그제서야 그 “보이지 않던 사람”을 기억하며 그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를 그리워하며 찾게 됩니다. 비로소 그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늘 다른 사람을 탓하며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그래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고 다투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또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드러내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인정을 받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이 요란함으로 인해 멀리서도 그 사람이 거기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오직 그가 자리를 떠나야 조용해지고 평화가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기조차 싫어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후자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전자의 경우, 곧 함께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함께 있지 않으면 잘 보이는 사람이 될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런 경우의 “극단적인 본보기(extreme model)”가 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입니다. 묵묵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예수님께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7)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사야 53:12b)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을 그냥 “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저항하시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예수님께서 절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되실 리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여 능력을 보이라고 조롱합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29,30)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31,32). 헬라인 총독 빌라도 또한 유대인들의 거짓 고소에 잠잠하시며 자신을 위해 아무런 변명도 하시지 않는 예수님께서 미련하고 답답해 보여 채근했습니다.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5)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무력하게,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은 이들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셨습니다 (로마서 9:33; 베드로전서 2:8). “하나님의 능력”이란 “사랑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란 “구원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과 구원의 지혜를 깨닫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신앙의 중심이 되지 않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시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십자가 형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형벌로서, 주로 중대한 죄를 지은 노예나 전쟁 포로들에 대해서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사형법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수단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나 광장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죄수는 자신이 못박힐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으며,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채찍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닥으로 된 채찍에는 쇠나 뼈 조각들이 달려있어서 몸을 휘감으며 살을 찢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옷을 벗긴 후 두 발을 포개어 세로 기둥에 못박고 양 손목을 가로 들보에 못박아 고정시켰습니다. 죄수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수시간 길게는 수십 시간 고통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삼시 곧 아침 아홉 시에 못박히셔서 제 구시 곧 오후 세 시가 넘어서 운명하셨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좌우에 강도 둘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이런 강도들과 같은 흉악한 죄인들 중 하나로 취급하여 더욱 수치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가장 큰 괴로움이 남아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받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잠잠히 고통을 참으시던 주님은 마지막 때가 되어 큰 소리를 지르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진정한 죽음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 육체의 고난과 죽음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영적인 죽음 곧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였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얼마나 큰 고통일까요? 그 고통의 크기는 예수님의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크기”만큼 클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예수님만이 아시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천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도 수억 배 더 크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 고난은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고난을 피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향하여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말씀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고소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누가복음 23:2). 유대인들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로마 황제 가이사에 저항하여 사람들을 선동하는 반역자로 거짓 고소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심문에 대해서 “아니 그게 그런 뜻이 아니고……” 하시며 자신의 무죄함을 설명을 하셔야 했지만, 순순히 “네 말이 옳도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는 기이히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로마 군병들로부터 많은 희롱을 당하시고, 또 십자가 위에 계시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자신과 함께 좌우에 못박힌 강도들로부터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임을 증명해 보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부인하기 힘든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마저도 참으시고 계속 십자가 고통가운데 머물러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형수가 겪는 극심한 육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최소한의 자비로, 마취제 역할을 하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23).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마저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손에 고난은 당하셨지만, 그 고난을 덜기 위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말 100% 정금보다 더 순결한 “The Cross”였습니다.
38절 이후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후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된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성소(Holy Place)와 지성소(Holy of Holies) 사이에 드리워진 커튼을 말합니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이곳은 대제사장이 일년에 단 한번만 몸에 희생의 피를 바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을 막고 있는 커튼이 둘로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길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찢어졌다”를 의미하는 단어는 마가복음 1:10절에서도 쓰였는데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마가복음 1:9,10). 여기서 “하늘이 갈라졌다”는 표현이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과 서로 상응합니다. 곧 예수님의 세례 곧 십자가 죽으심으로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으신 고통의 크기는 예수님의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크기”만큼 크다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고통을 당하신 것일까요? 이는 주님께서 또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오랜 동안” 이 형용 못할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마치 문둥병자와 같이 그것이 고통인줄도 모른 채, 하나님을 떠난 그 무서운 죽음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 딸로 회복되고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저주에서 영원한 축복으로, 지옥의 나락에서 은혜의 천국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예수님의 한없는 은혜가 바다 같이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잠잠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묵묵히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 우리를 평안한 생명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 공기를 호흡하며,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처럼, 또 매일 해가 뜨고, 철을 따라 비가 내리고, 초목이 자라는 것처럼,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영혼의 생명이 되며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만일 이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떠난다면, 우리의 삶은 차라리 죽음보다 못할 것입니다. 그때라면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였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바로 지금, 아직 주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 때에,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이루신 이 놀라운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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