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요한복음 2:1-11)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8. 3. 19. 03:37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요한복음 2:1-11

 

우리는 생애를 통해서 결혼이나 군 입대와 같이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20여 년 전에 저는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이 새로운 땅에서 어떤 삶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한 친구가 제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결혼 전날 같은 기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에 입대하기 전날 같은 기분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과격한 변화는 자주 전혀 다른 삶으로 이어집니다. 군에 입대한 사람은 하루 24시간 엄격한 군율을 따라야 합니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제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생의 동반자가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또 이민자는 자신을 전혀 새로운 사람들, 언어, 생활습관, 음식 등에 적응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이러한 경험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변화를 겪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Master)임을 뜻합니다. 이전에 우리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나의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이 주인이 내게 대한 절대적인 권리와 권한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들이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이것은 단순히 호칭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이름의 무게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크리스천으로서의 우리의 삶이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주님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알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믿는 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이 여정에 또 한 발을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갈릴리 지방에 있는 가나라는 마을에서 혼인 잔치가 열렸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혼인 잔치는 매우 특별하고 기쁜 행사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일 년간의 정혼 기간을 가진 후에 성대한 혼인 잔치를 열고 이를 통해 신랑이 신부를 정식으로 맞이하였습니다. 혼인 잔치는 주로 가을 추수가 끝난 후에 열렸으며, 일주일이나 길게는 이주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신랑 신부,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모든 초대된 손님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노래와 춤과 게임 등을 즐겼습니다. 씨를 뿌리고, 잡초와 싸우며, 곡식을 추수하기까지의 모든 수고를 잊어버리고, 밤이 늦도록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음껏 먹고 마시는 혼인 잔치의 모습은 장차 우리가 주님과 누릴 천국 잔치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 혼인 잔치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초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매우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아마도 손님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잔치에서의 포도주는 자동차의 연료와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여러 날 동안 혼인 잔치를 기뻐하며 신랑 신부를 축복할 수 있는 힘은 포도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포도주 없이 혼인 잔치를 기뻐하기란 마치 음악 없이 춤을 추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이제 일생에 한번뿐인 혼인 잔치가 시들해질 위기에 빠졌습니다.

 

마리아는 이 긴급한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와서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으며 또 해주실 것이라고 믿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여하시지 않겠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촌각을 다투는 사건입니다.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제가 얼마나 긴급한가에 따라 일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를 따라 일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나 이 잔치의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대답은 무심하고 무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문제들과 사정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항상 다급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문제들과 사정들을 위해 즉각적인 조치들과 해결책들을 원합니다. 우리의 시간은 항상 지금 당장입니다. 이런 두려움과 조급함 속에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당연히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들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다스리는 주인으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문제 때문에 서두르시는 일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죽고 사는 문제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를 고집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때 혹은 하나님의 때란 언제입니까? 성경 속에서 우리는 자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때의 문제로 갈등이 있음을 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삭을 통해 성취되기까지 25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이렇게 불평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하박국 1:2) 하나님의 때는 거의 항상 사람의 때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간략하게 말하자면, 사람의 때는 죽음 이전인 반면, 하나님의 때는 대개 죽음 이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 또한 죽은 것 같이 되었을 때” (로마서 4:19) 비로소 이삭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병든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사흘이 지나서야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셨습니다. 사람의 시간이 죽음 이전인 것은 우리에게 늘 데드라인(deadline)’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늦어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상황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데드라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때가 최선의 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최선의 때더 좋은 때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로 인해 제약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심지어 시간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입니다. 이 영원 속에서는 시계의 똑딱거림도 없으며, 다급함도 없으며, 서두름도 없습니다. 이 영원 속에서는 쇠함도 죽음도 없습니다. 이 영원 속에서는 주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붙드시고 다스리십니다. 이 영원 속에서 우리는 참된 평화와 자유를 누립니다. 이 영원의 시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며, 또 이 주님을 믿음으로 죽음의 경계(the line of death)를 넘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가 한 일입니다. 그녀는 죽음의 경계, 곧 데드라인을 건너갔습니다. 두려움, 불안, 조급한 불신의 마음으로 그어진 데드라인을 넘어서 예수님의 시간으로 침입해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시간의 폭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평강이 우리 위에 임하게 됩니다. 이 영원 속에서, 우리는 이제 오직 주님 되신 예수님의 다스림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말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대답이 거절하시는 것처럼 들렸지만, 마리아는 다른 해결 방도를 찾기 위해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녀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 말은 무조건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마리아가 모든 것을 예수님의 처분에 맡겼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문제는 그것의 컨텍스트(context – 경위, 전후 맥락, 배경)를 갖고 있습니다. 이 컨텍스트는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는가, 누구의 책임인가, 가능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등을 설명합니다. 또 문제의 컨텍스트는 과거의 경험들, 비슷한 사례들, 사람들과 전문가들의 의견들, 최악의 시나리오, 예상되는 결말 등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컨텍스트를 우리에게 강요하며, 이런 컨텍스트는 우리를 어둠으로 뒤덮고, 두려움으로 숨막히게 합니다. 그러면 그 문제는 매우 강력한 실재로 우리를 압도합니다. 우리에게 힘을 과시하며, 우리는 그 문제 앞에서 조용해지고, 얼어버리며, 심지어 경건한태도를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 문제의 심각한 컨텍스트 속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녀는 이 문제가 예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야말로 이 문제의 진정한 컨텍스트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 되십니다 (요한계시록 22:13). 이 믿음으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문제는 그것의 컨텍스트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는 최소한 그 문제를 이해하고 견뎌내기 위해서 이 컨텍스트를 자세히 연구하고 순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택하십니다. 문제를 풀기 전에 먼저 그것의 컨텍스트를 무너뜨리시며, 우리를 위해 새로운 컨텍스트를 세우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이며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여기 베드로는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자신의 컨텍스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 사실은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이 호수에는 고기가 없습니다,” “난 지금 매우 피곤합니다,” “나는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목수인 당신이 고기잡이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요?” 하지만 베드로는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깔아놓으신 새로운 터 위에 섰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오직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그는 다시 깊은 곳으로 배를 저어 나아가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우리는 자주 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컨텍스트를 고집하며, 단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쓸만한 조언들과 기도로 이곳 저곳을 누덕누덕 기워나갑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생 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마태복음 9:16). 우리는 우리의 낡은 옷을 고집하며 그것을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좀더 낫게 만들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옷, 곧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잔치가 열리는 곳에는 씻는 물을 담아두는 커다란 돌항아리들이 여섯 개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마리아가 시킨 대로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항아리들을 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욱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놀랍게도 하인들은 이마저 순종했습니다. 연회장은 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후 그 놀라운 맛에 감탄해서 신랑을 칭찬했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마리아의 믿음과 하인들의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님은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불가능한 가운데,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신비로운 역사로 최고의 포도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몇몇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님으로 예배되고 순종되었기 때문입니다.

 

11절은 오늘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결론은 왜 혼인 잔치에서 이 문제가 생겼는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주님 되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제자들로 그를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것은 모든 이야기와 역사의 결론입니다. 영광 중에 계신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의 눈이 문제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그 너머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문제 중심의 삶을 산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문제가 해결되는 데서 끝나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연회장과 신랑은 좋은 포도주를 즐기며 좋은 말들을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그렇게 맛난 포도주로 혼인 잔치를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포도주가 어디에서 왔는지 몰랐습니다. 비록 문제는 놀라운 방식으로 해결되었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데 실패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얻은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문제들이야말로 주 되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우리로 주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진짜 문제는 우리가 주 되신 예수님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시련들을 통해서 그의 영원한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그의 영광을 소망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