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하나님을 믿으라 (마가복음 11:12-25)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8. 3. 9. 09:15

하나님을 믿으라

 

마가복음 11:12-2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 우리는 또 다시 믿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이 질문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성경적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배우고 깨달은 바로는, “믿음은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실재(reality)”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실재에 대한 나의 확신과 참여(confidence and participation)”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한 편으로는 우주적인(universal)”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개인적인(personal)”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출간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고문과 화형의 위협 속에서 이 주장을 철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Yet the earth does move)”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실재(universal reality)가 있고, 마음 속에 이것을 부인할 수 없는 확신(personal confidence)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갈릴레오의 심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세상의 어떤 권세도 그것을 깨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실재가 아닌 것을 믿는 것은 망상이나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재를 인정하지만 내가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몸소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하고 비겁한 행동입니다. 갈릴레오의 이야기를 비유로 하자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하실 때 그 믿음이란 우리가 모든 불리한상황에서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Yet God is living)”라고 중얼거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살면서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들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베이스(base - fundamental principle or underlying concept of a system or theor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은 승리(victory)”가 그 삶의 베이스가 될 것입니다. 적을 이기는 승리야말로 그의 삶을 명예롭고 가치 있게 만들 것입니다. 굳이 이기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어떻게 하면 싸움을 이길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것이며, 그것과 상관이 없는 일들은 이 사람에게 별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베이스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돈이야 말로 가치의 근본이며 믿을만한 의지가 됩니다. 그래서 돈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얘기합니다. “결국은 돈이야!”라고 실토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회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 이 회사는 주식을 공개했습니다. 회사의 주식을 일반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입니다. 주식을 공개하면서 회사 직원들에게도 일정 수의 자사 주식을 비교적 싼 값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줍니다. 당시 주식시장은 활황이었고 더구나 회사에서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었기 때문에, 그냥 서류에 서명만 하면 수백 주의 주식을 받고 적지 않은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직원들이 흔쾌히 서류에 서명을 하고 회사 돈을 빌려 주식을 샀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당시 막 크리스천이 되어 예수님처럼 살겠다는 열정이 하늘을 찌르고 있던 저는 매일 주가의 등락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나 주식으로 불로소득을 올리는 것이 불편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회사 주식을 사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런 저의 행동을 이상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주식이 공개된 지 얼마 후 한국의 주식시장이 급격히 침체되고 저희 회사 주식의 값도 처음 공개시의 가격보다도 더 낮게 떨어졌습니다. 결국 주식을 산 사람들은 모두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의 이상했던 행동을 이제 매우 유의미한 (significant) 행동으로 달리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 직원들은 제게 질문했습니다: “전낙무씨, 주가가 떨어질 것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저는 어이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손을 내둘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이 되는 두 가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좀 특이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이어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 다음날 아침에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이 발견됩니다. 한 사건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또 다른 사건을 샌드위치처럼 감싸고 있는 모양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두 사건이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열매 없는 거짓 신앙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 멀리 서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본문에는 이 나무를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나무에서 먹을만한 열매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가까이 가셨을 때 그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보기에만 좋은그런 나무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은 잎사귀는 무성하지만 열매는 없는 이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유별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종교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었고,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전한 율법이 있었고, 또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바 선민의 표시인 할례가 있었습니다. 성전과 율법과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옷과 같았습니다. 무화과나무로 치자면 아름답게 보이는 무성한 잎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서 보신 모습은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곳은 성전이 아니라 물건을 매매하고, 돈을 바꾸고, 동물을 거래하는 장사꾼들로 붐비는 시장바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을 내어쫓으시고 그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책망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한 예로, 본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희생으로 드릴 짐승을 직접 갖고 오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성전의 제사장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갖고 오는 짐승들을 흠이 있다고 하며 퇴짜를 놓고 대신 성전에서 파는 짐승들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사도록 했다고 합니다. 또 모든 사람들이 내야 하는 성전세를 시중에서는 유통되지 않는 특정한 화폐로만 내도록 하면서 엄청 높은 환전수수료를 부과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성전은 실상 강도들의 소굴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올바른 삶()과 행복한 삶()입니다. 이 둘은 모두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 앞에 나아오는 자들에게 이 은혜를 주십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는 대신,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고집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잎으로 열매 없는 자신을 치장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과 할례로 꾸민 종교생활로 자신들의 죄를 가리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인 양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겉을 자기의로 치장함과 동시에 그들의 내면은 돈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살지 않고, 성전을 찾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신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여 이런 유대인들의 거짓된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가복음 7:6). 갈릴레오는 비록 위협에 굴복하여 입으로 자신이 믿는 지동설을 철회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존경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기의를 자랑하고 돈이 최고야!” 속삭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말씀하시자 곧 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랐습니다 (20). 뿌리가 말랐다는 것은 이 나무가 근본부터 잘못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계명들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뿌리(베이스)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뿌리는 위선적인 종교 생활로 세워진 자기의세속적인 축복()”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신 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었습니다. 이 뿌리가 너무 깊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과 같이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성전 곧 그들이 도적의 소굴로 더럽힌 성전은 후에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의 공격으로 인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않은 삶은 그것이 아무리 푸르고 무성하더라도 이미 죽은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열매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베이스가 되시며, 우리의 삶은 이 하나님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의 의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나의 복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첫째,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놀라워하며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이 나무는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계절을 따라 무성한 잎을 내고 있습니다. 자연 속에 살아있는 나무는 절대로 마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이 모든 자연의 조화들이 중단되고 나무는 뿌리로부터 말라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건축되고 있었던 당대 최고의 건물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보고 감탄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제자들처럼 우리도 자주 세상 속에서 (in the context of the world)” 세상과 자신을 보고 이해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문명을 감탄하며, 매일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날을 계속해서 이렇게 평안히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이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속에서태평하게 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경고의 말씀 안에서 (in the context of the Word) 깨어있는 삶을 살며, 우리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의 눈으로 보고, 깨닫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완전한 긍정 (Absolute Yes)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keyword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주님께 대한 어떤 의심 곧 부정적인 생각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의심하다가 (시험하다가) 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열왕기 6-7장에 보면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포위되어 성 내의 사람들은 심지어 자식까지 삶아먹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서 내일까지그들에게 먹을 양식이 흔해빠질 정도로 넘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한 왕의 장관이 비웃었습니다.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러자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람 군대가 쫓겨가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버리고 간 식량들을 마음껏 노략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왕의 장관은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처럼 절망적인 문제(Absolute No)에 가로막힌 자신을 봅니다. “처럼 그 문제는 당연히 그리고 영원히 거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 “Absolute No”는 없습니다. 심지어 아주 희미한 의심의 그림자조차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Absolute Yes”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믿음이란 오직 기도와 감사로만 사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즉시받는다면, 우리는 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또 감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즉시들어주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때에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이 시간의 갭(time gap)을 믿음의 기다림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물 없는 광야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받은 줄로 믿으라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잘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면 끊임없이 불평하며, 성내며, 방황합니다. 믿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기다림의 시간을 오직 기도와 감사로 채웁니다. 그리하면 마침내 기도하고 구한 것이 그대로 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이란 쓴 뿌리를 품지 않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원망하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너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미움이나 원망은 우리 영혼에 해로운 독한 기운을 뿜어냅니다. 그리고 이 쓴 뿌리를 없애는 유일한 길은 용서입니다. 에베소서 4:31,3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용서한다는 말의 원어는 보낸다 (let go, send away),’ ‘포기한다 (give up)’ 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용서가 조건 없이베풀어져야 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나의 허물을 조건 없이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 길은 형제의 허물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대신에 나의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부터 온갖 향기로운 생명의 기운들이 흘러나옵니다.

 

갈릴레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진리는 일단 발견하기만 하면 그것을 이해하기는 쉽다; 다만 그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All truths are easy to understand once they are discovered; the point is to discover them).”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에 따라 하늘을 관찰하면 모든 천체의 움직임들이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기까지는 수천 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그간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무한하신 능력과 사랑을 일단 발견하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하!” 하는 탄성이 나오게 됩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우리 속에 깊이 내려진 자기의탐욕의 뿌리를 뽑아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