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비유 – 스스로 자라는 씨
마가복음 4:26-29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여러가지 비유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이 장에는 특히 씨에 관한 세 가지 비유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마태, 마가 및 누가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바 잘 알려진 ‘씨 뿌리는 자의 비유’(1-20)이며, 다른 하나는 오직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26-29)입니다. 마지막으로 ‘겨자씨 한 알의 비유’(30-32)가 있습니다. 이 비유 또한 위 세 복음서들에 모두 나오는 말씀입니다. 씨와 관련된 이 세 가지 비유들은 공통적으로 ‘땅에 뿌려진 씨’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합니다. 각 비유들이 강조하고 있는 요점은 다르지만 씨가 땅에 뿌려지고, 자라서, 어떤 “궁극적인 결국”에 이른다는 점은 모두 같습니다. 이 비유들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말하는 ‘씨’와 ‘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씨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4:14절에서 예수님은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면 땅은 무엇일까요? 땅은 ‘사람’ 또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6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나니” 하고 또 9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라……” 합니다. 이 말씀들에 비추어보면,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땅(또는 흙이나 밭)은 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결실을 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씨가 밭에 뿌려지지 않으면 그냥 씨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씨가 뿌려지지 않은 땅은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습니다.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더라도 ‘사막’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땅이 무엇인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씨가 뿌려져야 합니다. 씨가 없는 한, 흙은 그저 흙일뿐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경에서 사람은 은유적으로 (metaphorically) ‘밭’ 또는 ‘흙’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실상 본질적으로 ‘흙’입니다. 창세기 2: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합니다. 또 3:19절에서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육체로서의 사람은 ‘흙’으로부터 나와서, 평생 땀을 흘리며 땅을 경작하여 음식을 생산하여 먹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흙으로부터 왔으며 그 본질이 ‘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 자신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문명’ 또한 흙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사람들은 “자, 벽돌을 만들고 견고히 굽자” 하고 또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며 바벨탑을 쌓습니다. 사람들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위해 높은 탑을 쌓았습니다. 사람이 흙으로부터 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문명 또한 이렇게 흙으로부터 일어났다가 무너지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합니다. 이는 고대의 바벨탑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보고 누리며 자랑하는 이 눈부신 고도의 기술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서 2:7-9절은 이렇게 화려한 ‘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놀랍게도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참 모습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세상은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온갖 좋은 것들로 가득 차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흙덩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흙덩이”에게 이 말씀은 참으로 광명의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씨는 이 땅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곧 말씀이 이 땅에 뿌려짐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이 땅에 임하시는 천국은 한 알의 씨앗처럼 겸손하고 평화롭게 옵니다. 사람들은 늘 ‘흙으로’ 더욱 단단한 벽돌을 만들어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 쌓기를 쉬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한 알의 밀처럼 땅에 떨어져, 묻히고, 죽습니다 (요한복음 12:24). 그래서 심지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입니다. 오직 겸손한 자만이 말씀이 이 땅에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알아챕니다. 그리고 회개함으로, 곧, 자신의 마음을 갈아서 곱고 부드러운 흙이 되어 이 씨앗을 받고 그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흙과 그 흙 속에 뿌려진 씨앗!” 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망스러운 모습입니까? 이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우리가 흙이 됨은 단단한 벽돌이 되어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흙이 됨은 그 속에 씨앗 곧 하나님 말씀을 받아 품고 그 말씀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씨앗이 그 속에 없으면 흙은 그저 흙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서 곧 부서질 흙덩이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세상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씨앗을 품은 부드러운 흙”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흙으로 만드신 참되고 영원한 의미입니다.
27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에 뿌려진 씨는 스스로 자랍니다. 씨를 뿌린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며, 성장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하루하루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자라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서 스스로 자라며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심겨진 말씀을 뽑아내거나 이리 저리 옮기지 않고 그 심겨진 자리에 지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 12:2) 하시고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5)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는 달리 그에게는 “하늘의 뭇 별”은커녕 대를 이을 아들 하나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벌써 수십 년이 지났는데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고 심지어 더 어려운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저 “오래된 약속”을 뽑아버릴 때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을 더욱 굳게 붙들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로마서 4:19-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는 것입니다.
씨앗은 그 안에 생명이 있어서 “스스로” 자랍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기 위해서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씨는 하나님께서 키우십니다. 한 인터넷 기사를 보니 요즘 학생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의 학업 부진을 “부모님의 탓”으로 돌린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뒷받침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서 경쟁에서 뒤쳐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성공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부모님의 뒷받침뿐 아니라 많은 주위의 도움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이 없을 때, 또 주위 환경이 불우할 때 이를 슬퍼하고, 좌절하며, 포기합니다. 자연인으로서의 사람이 이렇게 약하고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그가 ‘흙’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연약함은 참으로 비참하고 절망적입니다. 게다가 흙더미가 홍수에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사람들이 일생을 들여 힘겹게 쌓아놓은 ‘업적들’은 곧 먼지처럼 흩어지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씨가 자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른 봄 아직 언 땅을 뚫고 두 팔을 벌리며 기지개를 켜는 연두색의 싹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무거운 바위를 깨뜨리고 그 사이를 솟아오르는 나무들도 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 안에 임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이 어마어마한 능력을 그 안에 품고 있습니다. 우리 내면의 죄도, 사람들의 연약함도, 세상의 풍랑도, 죽음의 두려움도, 사단의 훼방도 결코 이 씨가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모든 바위들을 밀쳐내고 “스스로” 자랍니다. 이는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키우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믿는 자의 신앙 생활에서도 우리는 자주 “사람의 도움”이나 “더 나은 형편”을 구하며 불안해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서 2: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우리가 의지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자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잠언 16:20절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며 내 앞서 행하면서 나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어려움을 이겨낼 지혜와 힘을 주며, 또 앞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줍니다. 이를 통해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알차고 풍성하게 임합니다.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람들은 각자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지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의 열매를 거두며 그 열매를 먹게 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의지하며 기회를 잡는데 있어서 지혜로운 (영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맺는 열매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당장은 좋아 보일 수 있지만 곧 썩고 없어지는 “쭉정이” 열매들입니다. 오직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만이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29절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의 결론입니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추수 때가 되면 농부는 밭에서 자란 식물들을 추수합니다. “이삭에 충실한 곡식”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풀무 불에 던져집니다. 이것은 장차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을 말씀합니다. 이 날이 되면 우리는 지금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을 떠나게 됩니다. 또 흙으로 된 우리의 육체도 벗게 됩니다. 새 하늘 새 땅에서 새 몸을 입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지금 우리 속에 말씀으로 임하고 또 자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지혜의 말씀을 받고 지켜 열매를 맺음으로 추수 때에 주님의 영원한 나라로 거두어지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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