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요한복음 15:1-27)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8. 1. 8. 23:48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요한복음 15:1-27

 

파브르(Jean-Henri Fabre, 1823-1915)라는 프랑스 생물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파브르 곤충기라는 책으로 유명하지만, “파브르 식물기라는 책도 썼습니다. 파브르 식물기는 식물기이면서도 히드라(hydra)라는 동물로 그 첫 장을 시작합니다. 히드라는 물에 사는 약 2cm 길이의 생물인데 몸 끝에 입(배설구를 겸한)이 있고 그 주위로 팔처럼 생긴 긴 촉수들이 붙어있어서 이것들을 이용하여 먹이를 잡아먹습니다. 파브르는 마을에 있는 웅덩이에서 히드라를 잡아와서 물컵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가위를 이용하여 히드라의 몸통을 두 조각으로 잘랐습니다. 한 조각에는 촉수들이 달려있지만 몸통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다른 조각은 먹이를 잡을 촉수들도 그것을 먹을 입도 없습니다. 당연히 죽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파브르는 물 컵 속에 죽은 히드라 대신 두 마리의 온전한 모습을 갖춘 히드라들을 발견합니다. 이번에는 히드라 한 마리를 8조각으로 토막을 냅니다. 그러자 이것들 또한 8마리의 온전한 히드라들로 부활합니다. 파브르가 그의 식물기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히드라는 동물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이 괴물을 죽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는데 그 이유는 머리 하나를 자르면 곧 그 자리에서 머리 두 개가 새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영웅 헤라클레스는 이 괴물의 머리를 자른 후 그 자리를 불로 지져서 새 머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이 괴물을 퇴치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또 제자들을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하여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거하다 (remain)’라는 말이며, 다른 하나는 과실 (fruit)’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되는 제자들이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면그들이 많은 과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요지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말이 있습니다. ‘더 중요하다고 하기보다는, 오늘 말씀 전체를 의미 있게 만드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9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그리고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의 뜻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가 맺는 과실 또한 서로 사랑하는 것사랑의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무엇인가 그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십니다. 13절에서 예수님은 사랑을 이렇게 간명하게 정의하십니다: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과 또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을 깊이 알고 영접하지 않고서는 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실을 많이 맺는다는 것은 곧 성공적인 삶,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모두 과실을 많이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생애를 통해 맺기를 원하는 과실이 무엇인지, 또 그 과실을 맺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사람은 욕을 먹더라도 악착같이 을 모읍니다. 우리가 맺는 과실이 좋은지 나쁜지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8절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이 말씀에 비추어 생각하면, 우리가 맺어야 할 과실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야 저 사람은 진짜 예수님의 제자구나!” 하는 말이 나오도록 만드는 그런 열매입니다. 요한복음 13:35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실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사랑으로써만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좋은 과실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지만 이 말씀을 따라 좋은 과실을 맺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기보다는 로서 인정받으며,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좋은 과실을 맺기가 참 어렵습니다. 과실은 달리 말하자면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과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앞서서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이것을 하는지를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랑으로이것을 하는지를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과실을 맺는다는 것은 많은 노력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는 말할 것도 없고 무슨 일이든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겪어야 합니다. 심지어 이런 고생 후에도 과실이 맺힐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 익숙한 우리가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말씀을 읽고 묵상하노라면, 왠지 주님께서 세상을 너무 쉽고 단순하게" 보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5절 말씀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하십니다.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과실을 맺는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거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코웃음을 치며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시는군요. 그런 철없는 소리는 그만하세요!” 예수님의 이런 단순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의 모든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파괴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힘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매우 단순해지고 쉬워지는 것입니다. 마치 삽과 곡괭이로는 하기 어렵고 복잡한 일들을 불도저로 간단하게 해내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지난 날의 부조리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예로 최저 시급 인상이 있습니다. 과거에 6,470원이던 것이 새해부터 7,530원으로 인상된 것입니다. 이것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모두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최저 시급 인상으로 인해 다른 부조리들이 머리를 들고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임금을 아끼기 위해 직원을 해고하거나, 최저 시급을 편법적으로 계산하거나, 일자리를 아예 없애거나 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저는 앞에서 인용한 히드라가 생각이 납니다. 한 가지 문제를 죽여서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여러 다른 문제들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이는 세상 자체가 죄악되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하나 자르면 두 개가 새로 나오는 괴물 히드라처럼, 세상의 문제들은 참으로 끈질기고 두렵게 우리를 위협하고 공격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의 문제들을 이겨내고 자유롭고,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길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힘으로 괴물 히드라를 퇴치한 헤라클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다른 점은 헤라클레스는 힘으로그 일을 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그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너무 쉽게" 또는 낙관적으로들리는 것은 주님의 사랑의 능력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지만 우리가 그 능력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거한다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한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난 나라는 존재는 한 순간도 있을 수 없으며 그런 개념조차 불가능합니다. 영원히 그렇습니다. 거한다함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리는 주님과의 진실하고 적극적이고 계속적인 교제(single-hearted active continuous fellowship)”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끊임없이 그 줄기를 통해 수액을 빨아들여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그리고 오직 줄기로부터만이러한 공급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주님과의 진실하고 적극적이고 계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신령한 은혜들을 예수님께로부터 충분하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삶의 방식을 뜻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처럼 오직 사랑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능력입니다. 어른이 기어 다니지 않고 두 발로 서서 걷는 것처럼, 우리도 오직 사랑으로서서, 걷고,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많은 다른 능력이 갖고 계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예수님을 거절하는 자들을 혼내실 수도 있고 (누가복음 9:54),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호령하여자신을 잡으려는 폭도들을 진압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6:53).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직 사랑으로 일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으로 사셨습니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과실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우리도 이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른 무슨 좋은 방도를 찾기 위해 세상을 기웃거려서는 안됩니다.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만 사는 것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처럼 목숨을 주는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손발이 묶인 권투선수와 같습니다. 이제까지 평생 내 손과 발을 써서 싸우고, 경쟁하고, 더 많이 차지하는 삶을 살아왔었는데 이제 사랑으로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답답하고, 부자연스럽고, 좌절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으로살면 좋은 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가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11). 또 사랑으로 살면 예수님의 종이 되는 대신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나누는 은혜를 누립니다 (14,15). 더 나아가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됩니다 (7,16).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과실을 많이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세상을 사랑으로사는 것은 참으로 어려워 보입니다. 더구나 세상은 머리가 아홉 개나 달린 괴물 히드라처럼 늘 나를 위협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내 속에 묶여있던 육신의 팔과 다리도 함께 일어나 육체의 싸움을 하고 싶은 충동에 빠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꾸준히 그 사랑을 연습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며, 싸우며, 나아가야 합니다.

 

사단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막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살과 피가 제자들의 몸 속으로 들어가서 수 없이 많은 예수님들이 땅에 생겼습니다. 우리 각자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또 우리의 살과 피를 통해 이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세상의 괴물 히드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우리는 사랑의 능력에서 성장하며, 세상을 이기고, 사랑의 과실을 맺을 것입니다. 이 사랑을 폐할 법도 없으며, 이길 권세도 없습니다. 이렇게 축복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각자에게 이 놀라운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