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구원의 뿔 예수님 (누가복음 1:57-8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12. 19. 13:06

구원의 뿔 예수님

 

누가복음 1:57-80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은 사가랴의 찬송시입니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가 들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잉태하였으며 때가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과 친지들은 아이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보이신 긍휼을 인해서 즐거워했습니다. 아기를 낳은 지 8일이 되어서 아기에게 할례를 행하며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아기의 이름을 사가랴로 짓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이름은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그의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면서 준 것입니다 (1:13). 노년에 얻은 외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럽겠습니까?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는 이 아기를 사가랴 Jr.’로 키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마음을 부인하고 순종하여 아이를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 요한으로 불렀습니다. 그러자 사가랴의 혀가 풀렸습니다. 이것은 이 아이에 관해 천사가 전한 모든 말씀들이 장차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나타냅니다. 입이 풀린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언했습니다. 사가랴의 찬송시는 예수님의 복음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에 관한 중요한 진리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언약을 인함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도록 하는 두 동력(driving forces)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가랴의 찬송시는 반복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68절은 주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합니다. 72절은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셨다고 하며, 78절에서는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긍휼(mercy)”이란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마음입니다. 시편 25:6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은 모두 주님 자신의 긍휼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야말로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origin)이며, 그것이 서 있는 기초(foundation)이며, 그 속을 흘러 생명과 온기를 주는 피(blood)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신 말씀들과 일들을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의 긍휼안에서 그것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나 같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사가랴의 찬송시는 예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것임을 강조합니다. 70절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라고 하며, 7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가리켜 맹세하신 맹세라고 합니다. 창세기 22:16-18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그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이며 또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말씀을 그냥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하시면서 맹세로 주셨습니다. 언약(covenant)이란 대개 두 당사자 (two parties) 사이에 맺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을 맺을 때 맹세로 하지 않고, “당신이 OOO 하면……” 식의 조건으로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심으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상관없이 반드시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성에 관하여 히브리서 6: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일방적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또한 이렇게 일방적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열심과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따라서 반드시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구원의 뿔이 되십니다. 사가랴는 노래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여기서 구원의 뿔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뿔이 되십니다. 성경에서 은 힘을 상징하며 이에 더하여 영광이나 위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에는 세상의 힘 있는 나라들이나 권세자들을 로 표현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또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시편 92:10). “구원의 뿔이 되시는 예수님은 구원의 능력자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십니다. 세상에는 이라 불릴만한 권세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권세자들은 구원자이기보다는 압제자입니다. 약한 자들을 죽이고, 빼앗고, 군림하고, 괴롭히는데 그들의 힘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원의 뿔이십니다. 오직 생명을 살리시며, 그 생명을 풍요롭고 자유롭고 하시는데 그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하였습니다 (마태복음 4:3). 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사람들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내려오라하며 조롱했습니다 (마태복음 27:40).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구원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데 쓰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지만, 실상 주님은 구원에 있어서 전능자이십니다. 복음서에는 수없이 많은 구원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치병에 걸린 자들, 불구자들, 귀신들린 자들, 죽은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사람들의 정죄에서 구원하시고, 율법의 멍에로부터 구원하십니다. 풍랑에서 구원하시고, 허무와 어둠에서 구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절정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구원을 능력을 생각할 때,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구원또는 구원자를 찾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뿔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을 가장 진노케 하는 죄라고 할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구원은 원수로부터의 구원이며 하나님께로의 구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항상 이중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OO로부터의 구원(salvation from)이며, 다른 하나는 OO로의 구원(salvation unto)입니다. 출애굽기에 하나님께서 종 모세를 애굽 왕 바로에게 보내셔서 끈질기고 집요하게 명령하십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출애굽기 7:16, 8:1, 8:20, 9:1, 9:13, 10:10). 이 말씀은 바로의 압제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바로의 압제를 벗어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구원의 의미는 이렇게 명료하지만 우리가 이 구원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주 우리는 원수를 친구로 생각하며 가까이 하고, 반대로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심지어 싫어하며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원수 사단이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략입니다. 모세의 인도 아래 애굽을 떠나 바로의 압제를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친 광야 길을 지나면서 곧 이 시험에 빠졌습니다. 이들은 애굽에 있을 때 먹던 생선과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이 났습니다 (민수기 11:5).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다가 죽기보다 애굽으로 돌아가 노예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수기 14:3). 시험에 빠진 이들에게, 원수인 애굽 왕 바로는 친구가 되고, 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들의 미워하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영적 문제들 중 하나는 유혹자 원수 사단이 매력적인 친구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은혜로 누리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원수 사단을 미워하고 그에게서 완전히 돌아서며, 전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7:2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또 마가복음 10:4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섬김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시며 도리어 사람이야말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숨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섬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약하고 죄인 된 우리가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며 엄두가 나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회에서 봉사하며, 십일조를 드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착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가랴의 찬송시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섬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섬긴다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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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만화 영화인 The Lion King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낯설지 않은 장면입니다. 삼촌이지만 원수인 스카(Scar)의 음흉한 계략으로 인해 사자왕 무파사(Mufasa)는 위험에 빠진 아들 심바(Simba)를 구하려다 죽습니다.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죄책감으로 심바는 왕국을 떠나 객지에서 무기력한 삶을 삽니다. 이때 지혜로운 원숭이 라피기(Rafiki)는 심바에게 아버지 무파사를 보여주겠다며 그를 깊은 동굴 속의 잔잔한 연못으로 데려갑니다. 심바는 물 속에 비친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더 자세히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을 때 그 속에서 아버지 곧 사자왕 무파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대화를 나눕니다. 다음은 아들 심바가 아버지 무파사와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무파사:    심바

심바:       아빠?

무파사:    심바, 네가 나를 잊어버렸구나.

심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나요?

무파사:    너는 네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렸으며, 따라서 나를 잊어버렸다. 심바,

네 안을 들여다보거라. 너는 지금의 너보다 훨씬 위대한 존재다.

심바:       제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나요? 저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닌걸요.

무파사:    네가 누구인지를 기억하거라. 너는 내 아들이며, 진정한 왕이다.

             네가 누구인지를 기억하거라.

 

(영어 원문)

Mufasa:   Simba

Simba:    Father?

Mufasa:   Simba, you have forgotten me.

Simba:    No! How could I?

Mufasa:   You have forgotten who you are, and so forgotten me. Look inside
             yourself, Simba? You are more than what you have become.

Simba:    How can I go back? I’m not who I used to be.

Mufasa:   Remember who you are. You are my son, and the one true king.

Remember who you are.

 

아버지 무파사는 아들 심바에게 용기를 내라,” “마음을 넓혀라,” “왕국을 회복하라등과 같은 조언이나 지시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들 심바 속에 있는 아버지 곧 위대한 사자왕 무파사를 일깨웁니다. 그리고 심바 또한 그 사자왕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했을 때, 이와 함께 사자왕 무파사의 모든 위대한 성품들이 심바 속에 그대로 살아납니다. 사자왕의 용기와 위엄과 넓은 마음이 심바의 가슴을 가득 채웁니다. 이제 심바는 도망자가 아니라 의 삶을 시작합니다. 원수 스카를 물리치고 왕국을 회복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들 심바는 아버지 무파사와 그의 왕국을 섬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What should I do)?”의 문제이기보다 먼저 나는 누구인가(Who am I)?”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심바가 자기 속에 있는 아버지 사자왕 무파사를 통해서 자신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속에 계신 바 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과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성결과 의는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서 그 아들의 피와 그의 거룩한 영으로 우리 속에 이식하신 하나님의 본질(essence)입니다. 따라서 성결과 의는 우리 각자를 하나님의 왕자와 공주가 되게 하는 하나님 자신이며 동시에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위엄 있고 담대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의 모든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품들이 내 속에 그대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또 자연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행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가랴의 찬송시는 짧지만 구원의 진리를 매우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깊이 음미하며 읽는 가운데, 구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주로 오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헤아리고 우리 입에서 찬송이 흘러 넘치는 귀한 성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