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 1:26-56)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12. 12. 01:00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 1:26-56

 

동화책들을 읽어보면 대개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이 납니다. 아이들은 한 편으로 행복한 결말에 안도하며 다른 한편으로 이야기가 끝난 것을 아쉬워하면서 책을 덮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동화책 속의 결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생을 통해서 행복을 얻고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치열한 싸움을 요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꿈꾸던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회한 속에 생을 마감합니다. 설혹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행복함은 오래잖아 사라지고, “내가 겨우 이것을 얻으려고 이 고생을 했나?” 하는 허탈함이 이어집니다. 스탕달(Stendhal)이라는 프랑스 작가가 쓴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줄리앙이라는 청년은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준수한 용모와 명석한 머리를 가졌습니다. 귀족이 아닌 그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군인이 되든가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도 없이 성직자의 길을 택한 줄리앙은 오로지 성공의 수단으로 신학교에 들어가고, 이를 통해서 한 귀족의 비서가 되고, 더 나아가 그의 딸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귀족의 칭호와 장교의 직위를 얻고, 또 귀족의 딸과 결혼을 앞두지만 옛 연인의 방해로 인해 그의 신분 상승의 꿈이 좌절됩니다. 분노한 줄리앙은 옛 연인에게 총을 쏘고 이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 이 소설을 읽었는데, 너무 깊이 감정이입을 한 나머지 책을 읽은 후 며칠 동안 가슴앓이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청년 줄리앙은 진심으로행복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행복을 얻기 위해 걸어간 길은 위선이라는 매우 위험한 줄타기였으며 결국은 그 줄에서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아픔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행복을 원하지만 정작 이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길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평생 행복이 있을 것처럼 보이는 건너편을 향하여 위험하고 가슴 졸이는 줄타기를 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다가, 참된 행복을 맛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처녀 마리아로, 그녀는 청년 줄리앙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흔히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ciation)”라고 부르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천사가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그녀가 구원자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을 것을 전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한 인사말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천사는 마리아를 가리켜 은혜를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30절에서는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말합니다. 성경에서는 행복이라는 말 대신에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축복하실 때, 그 사람은 이미 행복한 것입니다. 이 행복은 참된 행복이며 영원한 행복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참되시고 영원하시며, 그가 베푸시는 은혜와 평강은 결코 변하거나 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탕달의 소설 제목 적과 흑은 당시 프랑스 군인들의 제복 색깔인 빨간색과 성직자들의 예복 색깔인 검은 색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과 흑지위와 부와 사랑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청년 줄리앙이 따라간 행복으로의 길을 상징합니다. 사실 그에게는 성직자나 군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행복을 찾아서 거짓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은 행복이 아니라 죄와 죽음이었습니다. 자신이 행복을 찾아 거짓된 길을 걸었을 뿐 아니라, 그가 바라보고 좇아온 것들 또한 거짓된 소망들이었던 것입니다. 행복은 오직 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가짜이며 망상(illusion)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느니라말했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전한 말은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은혜로운 소식이 아니라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31-33절 말씀입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의 메시지의 요점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나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귀에는 아마도 오직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이 말만 들렸을 것입니다. 당시 마리아는 남자를 모르는처녀였으며 더구나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사이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갖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설사 이것이 가능하여 임신을 하게 된다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18-19절에 따르면, 약혼자 마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아기를 가진 것을 알게 된 요셉은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고자 합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갈릴리의 조그만 시골 마을인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시골 마을 사람들은 이웃집의 숟가락 개수까지 서로 알고 지낸다고 합니다. 제 어릴 적 고향이 정말 그랬습니다. 이런 동네에서 처녀가 애기를 뱄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마리아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닙니다.” 설령 천사의 말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더라도, 마리아가 이 은혜를 받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과 고통이 너무나 커 보였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아이를 갖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든 면에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들어올 길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반문했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How) 이 일이 있으리이까?” 성경에는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천사와 사람이 나누는 대화들이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는데, 이 대화들에서 자주 관찰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무엇(what)”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사람은 어떻게(how)”에 대해서 의심하고 질문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8:10-1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장차 하나님께서 하실 일(what)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아브라함)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how) 낙이 있으리요?” 우리가 지난 주에 공부한 성경 본문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주리니 그 이름은 요한이라 하라하자, 사가랴는 이 소식(what)을 기뻐하는 대신 내가 이것을 어떻게 (how)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하며 의심합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how) 이 일이 있으리요?” 이들이 어떻게(how)?”라고 질문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자신들의 육적인 형편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일(what)은 전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질문에 대해 천사 가브리엘은 그녀가 어떻게 아기를 수태할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35절 말씀입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처녀 마리아의 몸에 아기가 잉태케 되는 이 일은 성령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 일에 대한 마리아의 믿음을 돕기 위해 천사는 늙어서 친족 엘리사벳이 어떻게 아들을 배게 되었는가를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의심을 쫓아내는 진리를 선언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7).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Davis라는 조직신학 교수님이 오늘날의 학교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요즘 학교에서는 무엇(what)을 생각할 것인가?”는 가르치지 않고 어떻게(how) 생각할 것인가?”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용은 가르치지 않고 방법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적과 흑의 주인공 줄리앙은 지위와 부와 사랑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진리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의 내용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문제는 어떻게이것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영리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열정적으로 여자들의 사랑과 높은 지위를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무엇(what)” 곧 여자들의 사랑과 높은 지위는 그를 행복하게 할 만큼 고상하거나 아름답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의 영리한 방법들도 실패로 끝났습니다. 죄와 불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평생 눈 앞에 보이는 거짓된 소망(false what)”을 좇아서 불의한 길(wicked how)”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믿음 안에서의 삶은 전혀 다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전한 소식은 참된 소망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소망은 죽음 너머에있습니다. “How”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은 선언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 때 어떻게(how)”라는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에 아무리 그것이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말씀자체입니다. 말씀이 전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영광입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계집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겸손한 헌신입니다. 마리아는 요셉의 약혼녀였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고집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주인들을 내보내고, “주의 계집종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자신을 주의 계집종으로 낮출 뿐 아니라 말씀대로 내게 (to me) 이루어지이다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지 않고, “말씀대로 내게 (to me) 이루어지이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을 쓰셔서 원하시는 일을 하시도록 맡겼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어떻게요?” 하며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멘!” 하며 믿었습니다. 이런 마리아를 가리켜 엘리사벳은 믿은 여자라고 부릅니다. 마리아는 믿은 여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John of Damascus라는 7세기 수도사는 마리아가 귀를 통해 잉태하였다(Mary conceived through the ear)”고 말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을 때, 그녀의 귀에 성령께서 하신 말씀 (Word) 곧 예수님이 그녀의 몸 속에 육신으로 잉태되고 태어나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수태하는 과정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는 과정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곧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듣고 이를 겸손이 믿고 영접하며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할 때 말씀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육체 가운데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가 전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The LORD Saves)”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십니다. 32,33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 말씀들은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의 머리로는 가늠할 수 없이 크고 영광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은 크고, 높으시고, 능하시며, 영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이시며 나의 행복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의 영원한 복으로 내게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우리가 사모하고 생각하고 받아야 할 절대적인 무엇(Absolute What)”이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 불가능한 행복이 내 삶에 임하게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어떻게(Absolute How)"이십니다. 우리 각자가 마리아처럼 겸손히 주님 앞에 자신을 드려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받는 행복한 성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