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 (누가복음 19:1-1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11. 20. 04:51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

 

누가복음 19:1-10

 

정체성(identity)라는 말이 있습니다. 청소년들과 관련된 심리학이나 사회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정체성이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한 개인의 주관적 생각이나 신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은 그 개인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고 있는 한국인은 나는 여전히 한국인이다라는 정체성을 고수하거나, 아니면 이제 나는 미국인이다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의 삶이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갖는 것이 바람직한가?”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은 내가 여전히 한국인으로 남아있기를 원하실 것이지만, 내가 미국 사회 속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 미국인들은 내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언어를 익히며 미국인으로 변화되고 적응하기를 충고할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사회적 요구들 속에서 이민자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정체성의 충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이며 부자인 삭개오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7).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 (9)라고 하시며, 잃어버린 자라고 부르십니다 (10).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을 여러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 구원이 무엇인지를 정의한다면 정체성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구원이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체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실 정체성의 회복은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요 자유인이며,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임을 선포합니다. 갈라디아서 4:3-7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는 여리고 성에 사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세리란 오늘날의 세무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들은 압제자인 로마인들을 대신하여 동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었으며, 자주 정해진 액수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걷어 자신의 배를 채웠다고 합니다. 삭개오는 세리장곧 이런 세리들 중 우두머리(chief tax collector)였으며, 더구나 당시 상업적으로 가장 번성한 도시인 여리고 성의 세무소장이었습니다. 그는 또 부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세리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불법을 행하여 재산을 모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삭개오를 그의 이름 대신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삭개오는 한편으로는 세리장이라는 높은 사회적 지위와 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죄인으로 사람들의 멸시를 받았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이거나 천대 받는 죄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며 예수님을 직접 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또 삭개오의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길을 앞서 달려가서 그 길목에 서 있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를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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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에게 다가오셔서 삭개오야!’ 하고 부르십니다. 제 기억 속에 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와 오버랩이 되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의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사운드오브뮤직 (The Sound of Music)’에 나오는 장면으로, 왼쪽의 중간에 있는 사진입니다.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고 재잘거리며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비역 해군 대령 본 트랩(Von Trapp)의 일곱 자녀들인데, 새로 들어온 가정교사 마리아(Maria)와 함께 들로, 산으로, 강으로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비역 대령 본 트랩은 자녀들을 엄격한 군대식 규율로 양육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에서와 같이, 늘 군인처럼 제복(uniform)을 입히고, 아이들을 부를 때도 이름을 부르는 대신 각자에게 정해진 신호로 호각을 불러 호출했습니다. 수녀원에서 온 마리아는 이런 대령의 행동에 경악하며, 아이들을 호각으로 부르는 것은 개나 고양이나 다른 동물들에게나 할 짓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제복을 벗기고, 대신 커튼 천으로 만든 활동복을 지어 입힙니다. 이제 아이들은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Liesl Liesl이 되고, FriedrichFriedrich가 되고, BrigittaBrigitta가 되고, Gretl Gretl이 되었습니다. 제복을 벗고 활동복을 입은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또 산으로, 들로, 강으로 다니며 자연을 만끽하며 즐겁게 노래하고 자유롭게 지절댑니다. 사진에서처럼 나무에도 올라갑니다. 여행을 갔다가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대령은 나무에 매달려있는 아이들이 자신의 자녀들임을 알아채지만, 자신의 동행들 앞에서 그들을 모른 체 합니다. 그냥 동네 개구쟁이들(local urchins)’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주님께서 를 깊이 아시고, 그런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이며, 오직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Who Jesus is)”를 보기 원했으며, 이를 위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의 세리장이요 부자라는 사회적 지위를 생각할 때, 또 사람들 사이에 죄인으로 취급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거리에서 눈에 띄게 홀로 나무에 오른다는 것은 매우 거북한 일입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가 힘겹게 나무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그런 사람들의 비웃는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에 높이 올라갔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삭개오의 마음을 아시고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를 우러러 보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체성 회복의 시작점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앞에 두고, 우리는 늘 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나의 출신 배경, 나의 경력과 능력, 나의 성공과 실패 등을 고민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정체성 회복의 시작점이 아닙니다. “정체성 회복의 시작점은 바로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아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할 때, 주님은 우리의 소원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도, 죄의 더러움이 나를 덮어도, 세상이 나를 누구라 부르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을 정확히 아시고, 이에 응답하십니다.

 

개인이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는데, 그 중 중요한 한가지는 사회적 정체성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족이나 지역사회나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이,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내가 한국인으로 보전되기를 원하시는 반면, 미국 친구들은 내가 미국인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본 트랩 대령은 자녀들에게 규율을 따르는 군인의 삶을 강요했습니다. 또 민족적이며 율법적인 유대인들은 단일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많은 법들과 규례들을 지키며, 이러한 규칙들을 위반하는 개인들에게는 죄인이라는 악의 정체성 (evil identity)”를 부여했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은 이렇게 여러가지 방식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지시하고, 요구하며, 단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시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수군거렸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이들도 예수님을 따르며 보기를 원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죄인삭개오를 영접하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자, 주님께 대한 태도를 돌변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삭개오는 물론 예수님도 그들이 정한 규칙들 아래있을 뿐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규칙을 위반하고 벗어나는 자는 죄인으로 낙인 찍었습니다. 이러한 비난과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그의 집에 유하신 것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삭개오가 주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간 것처럼 주님께서도 삭개오와 함께 하시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를 위해 십자가에도 올라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삭개오를 죄인이라 부르며 수군거릴 때,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삭개오에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줍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는 잃어버린 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부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잃어버린 자라고 하십니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소중함을 나타냅니다. 또 이 말은 도로 찾을 회복의 소망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잃어버린 자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란 말씀입니다. 삭개오는 하나님께 지극히 소중한 영혼이며, 주께서 잃어버린 자요 그를 도로 찾기 위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유자가 되었음을 말씀합니다.

 

주님을 만난 기쁨에 삭개오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는 삭개오의 내면이 새 사람으로 온전히 변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사운드오브뮤직의 두 주인공인 본 트랩 대령과 가정교사 마리아는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대령은 마리아에게 언제 자신을 처음으로 좋아하게 되었는가?’를 물어봅니다. 영화 속에는 이 두 사람이 서로의 감정을 느끼는 장면들이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이 시작된 때는 대령이 아이들 앞에서 호각을 불 때, 곧 마리아가 처음으로 대령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아마도 그때 마리아가 만난 사람은 제복을 입은 엄격한 해군 대령도, 부유한 대저택의 주인도, 기타를 치며 에델바이스를 아름답게 부르는 신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만난 이는 한 사람 게오르그 본 트랩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의 눈을 보고 그리고 그 눈을 통해 그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사랑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직업을 보고, 그의 재산을 보고, 그의 죄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눈을 보시고, 그의 마음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 속에, 그리고 그의 집에 구원으로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삭개오가 아버지와 아들, “나와 너로 다시 사랑의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정체성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발견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할 때, 우리는 참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삭개오는 자유자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자유자의 삶은 사랑기쁨입니다. 이 사람의 사랑과 기쁨을 막을 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발견하고 또 주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이 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