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2:1-20)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7. 12. 26. 02:33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2:1-20

 

섭리(攝理: providen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려 나가는 하나님의 의지 또는 은혜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라는 한자어는 잡다,’ ‘쥐다,’ ‘굳건하게 유지하다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세상을 붙들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섭리의 영어 단어인 ‘providence’는 그 자체로 하나님 (P-)’을 의미하기도 하며,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도록 다스리는 힘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의미들에 비추어보면, 섭리란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세상을 붙들고 계시며 그 은혜로우신 뜻대로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섭리는 그 속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하나님의 신비롭고 오묘한 지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긍휼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사는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신기하며, 또한 평안하고 즐겁습니다. 비유하자면 아래 왼쪽 그림과 같은 모습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보일까요? 아마도 달 표면과 같이 될 것입니다. 아래 오른쪽 그림과 같은 모습입니다. 물도 빛도 생명도 없이 적막하며 운석에 깊이 패인 상처들만 널려있을 뿐입니다. 또 언제 어디에 또 다른 운석이 떨어질지 모르는 두려움과 불안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불운.png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나심과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의 섭리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깊이 묵상하면 세상의 역사를 친히 뜻대로 운행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숨쉴 수 있습니다. 본문의 1-3절 말씀은 오늘 이야기 곧 예수님 탄생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가 천하를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아구스도존엄자라는 뜻인데, 그 이전까지 공화정이던 로마에서 그는 절대권력자로 부상하여 황제가 되었습니다. 가이사의 로마제국은 유럽 전역은 물론 소아시아와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통치했습니다. 가히 천하라고 부를 만 했습니다. 이렇게 넓은 땅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고 또 군인징집과 세금징수를 위해 위해서 로마제국은 5년마다 인구조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가이사의 호적 명령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요셉과 그의 정혼자 마리아도 그들이 살고 있던 마을인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셉의 고향인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긴 여행을 했습니다. 나사렛으로부터 베들레헴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105마일(170km)이며 실제 여행 거리는 143마일(230km) 정도였다고 합니다. 걸어서 가면 일주일도 더 걸리는 먼 거리입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아기를 가진 몸이었습니다. 만삭이 된 몸을 이끌고 힘겹게 걸어가는 정혼자 마리아를 보면서 요셉은 하필 이런 시기에 호적 명령을 내린 가이사를 욕하며, 또 자신의 불운함과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처지를 인해 불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 이 일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 따르면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께서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미가서 5:2절 말씀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니라.” 하나님께서 가이사의 호적명령을 쓰셔서 요셉과 마리아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가이사도 하나님께서 그 섭리를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 하나님의 친절하신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있는 동안 아기를 낳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서 마리아는 맏아들을 낳아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아마도 베들레헴 동네에는 요셉과 마리아 외에 호적을 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방을 잡을 돈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태어난 아기는 요람 대신 가축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뉘였습니다. 7절 말씀은 마리아가 맏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맏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2-23절 말씀입니다.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사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은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3:2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하셨습니다. 또 신명기 15:19,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의 우양(소와 양)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는 털은 깍지 말고 너와 네 가족이 매년에 여호와의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 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처음 난 수컷 (맏아들)”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려지고 그 고기는 온 가족이 함께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맏아들이시기도 하지만, 사실은 모든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십니다. 로마서 8:2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맏아들 되신 예수님을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희생제물로 받으시고 그 살과 피를 우리 주님의 형제들에게 신령한 떡과 음료로 주셔서 먹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베들레헴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 5마일/8km)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주변에는 성전에 희생 제물로 드리기 위해 길러지는 양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초태생(firstborn)의 수컷 양은 흠이 생기지 않도록 (신명기 15:21) 특별히 관리되었으며, 하나님께 드려지기 전에는 구유에 눕혀놓고 온 몸을 자세히 검사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이신 것은 단순히 여관에 묵을 방이 없었기 때문이거나 요셉에게 방 구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섭리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이신 때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들 곁에 하나님의 사자가 서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둘러쌌습니다. 천사는 두려워하는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무서워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가 전한 것은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 구주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천사는 이 소식을 가리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합니다. 구주 예수님의 탄생은 참으로 모든 사람들이 크게 기뻐할 좋은 소식입니다. 성경에서 좋은(good)”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매우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에 한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여(Good teacher)!” 하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18:18-19).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좋은또는 선한이란 수식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만 쓰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좋은 소식이란 정말 좋은 소식(absolutely good news)”입니다. 세상에서 좋은 소식이란 모두 상대적(relative)입니다. 그것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좋거나, 잠깐 동안 좋거나, 아니면 실상 좋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사가 전한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저는 한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깊은 밤 어둠 속에 혼자 누워있는데 절망과 두려움이 마치 태산처럼 무겁게 제 가슴을 내리눌렀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서 제게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낙무야 내가 너한테 내 아들을 주고 또 영원한 생명을 주었는데 기쁘지 아니하냐?” 이 음성을 듣자 갑자기 가슴이 가벼워지고 마음 속이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깨어나 밖을 보니 밤새 세상이 아름답게 변해있었습니다. 저는 제게 일어났던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주 탄생의 소식을 전한 천사는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베들레헴 마을에는 최근에 태어난 아기들이 여러 명 있었을 것입니다. 천사는 목자들이 구주로 태어나신 아기를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표적(sign)’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였습니다. 이것이 그 아이가 이 땅에 구주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실 때 머리에 기름을 붓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란 왕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아기가 구유에 누인 것을 그리스도 되신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겸손하신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1:5절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참 왕이 되심을 보여주는 표적은 화려한 궁궐이나 높이 솟은 보좌가 아닙니다. 그것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목자는 가장 천대받는 직업들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는 추운 밤에 들에서 양을 지켜야 하는 것 자체가 고단한 일입니다. 양 똥 냄새가 진동하는 낡은 옷을 입고 있는 이 시골 양치기들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들은 왕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집에서도 환영 받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이 시골 목자들에게 매우 익숙하고 편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주님께 나아가 경배하는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들의 발 아래 있는 구유에까지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온유와 겸손이 우리의 왕 예수님의 왕 되신 표적입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구주 탄생의 큰 기쁨을 좋은 소식을 전했을 때 갑자기 수없이 많은 천사들이 나타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이십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화는 오직 그 사랑을 영접한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두 그림을 보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사랑을 누리며 그 생애를 통해 많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결국 영생의 열매를 거둡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오직 어둠 속에서 매일 운석처럼 떨어지는 불운들을 두려워하다가 죽고 영벌에 떨어지는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깊이 깨닫고 천사들처럼 주님을 찬송하는 성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