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3:1-15
바닷가 관광지를 가면 으레 있는 관광 프로그램들
중 하나가 고래 보기(whale watching)입니다. 보스턴
근교에도 이런 여행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들이 몇몇 있습니다. 바다에 나아가 집채만한 야생 고래를 가까이
눈 앞에서 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는 일입니다. 저는 가본 적이 없지만 가까운 친구 부부가
두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고래를 보러 갔다 온 이야기를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배를 타고 약 1시간쯤 가면 고래가 자주 나타나는 곳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고래가 바닷물 위로 떠오르기를 기다립니다. 마침내 고래가 수면 위로 보이면 사람들은 환호를 지르며 사진을
찍고 즐거워합니다. 고래가 물 속으로 사라지면 뱃전은 다시 조용해지고 사람들은 또 고래가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이렇게 몇 번 고래를 구경한 후 다시 1시간
동안 항해를 해서 육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운이 나쁘면 고래들이 나타나지 않아서 허탕을 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친구는 제게 이 고래 보기 여행을 별로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겨우 “몇 초 동안” 바다
위로 떠오르는 고래를 보기 위해서 많은 돈을 쓰고, 또 더운 여름에 칭얼대는 아이들을 달래며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를 오가며 오랜 시간 배를 타고 고생한 것을 불만스럽게 말했습니다.
떠 있는 배 위에서 바다를 보면 그저 삭막하고 망망하지만, 사실 그 속안에는 신비로운 세계가 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는 고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크고 작은 신기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아예 물 속에 들어가서 그것들을 직접 보고 만지며 즐길 수만 있다면 “고래 보기”와 같은 지루한 여행 프로그램은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바리새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삭막한 바다와 같은 곳이며, 반면에 “하나님 나라”는 바다 속의 감추어진 신비롭고 풍요롭고 화려한 세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닷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에 빠지면 곧 죽기 때문에 사람들은 배 위에 머물러있으며 다만 간혹 고래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5절).
1절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란 유대인 종파들 중 “바리새파(Pharisees)”에 속한 사람으로서, 이들은 율법 특히 모세 오경에 기록된 관습이나 정결 예식, 전통들을 엄격하게 수행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또 유대인의 관원이었는데, 이는 70여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유대 사회의 최고통치기구인 산헤드린(Sanhedrin)의 멤버임을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또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불렸습니다 (10절). 아마도 인품과 지혜와 학식이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는 부자였습니다 (요한복음 19:39). 그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성공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이름 “니고데모”는 “사람의 승리 (the people’s victory)”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가장 성공적인 삶”을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나 그가 예수님께 한 말을 생각해보면 그의 절박함(desperateness)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많은 노력을 통해서 마침내 “성공”이라는 상자를 쟁취하였습니다. 이제 그것을 누리기 위해 뚜껑을 열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빈 상자”였습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고생 끝에 고래 보기 여행을 갔는데 바다 위로 떠오른 고래를 보고 “겨우 몇 초” 환호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놀랍게도 성공은 그에게 “행복의 길”이 아니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의 끝(dead end)”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는 결코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여러 중요한 질문들을 갖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계신가?” “이 세상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 후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등등……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우리의 삶은 “컴컴한 어두움”일 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누리고 있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여전히 깊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심지어 그 어둠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는 “가장 빛나는 사람의 성공”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니고데모 또한 그의 성공적인 삶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컴컴한 밤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어둠 속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를 이 어둠 속에서 꺼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이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답”을 주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니고데모가 갖고 있는 모든 의문들에 대한 “올인원 해답(all-in-one answer)”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들이 있습니다. 로마서 14:17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며, 마태복음 12:28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십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진리를 밝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래를 보기 위해 바다에 나간 사람들은 다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고래만 볼 수 있습니다. 고래를 보면서 바닷속 세계를 상상해보지만 그저 상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직접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을 눈으로 밝히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signs)”을 보고 주님 안에 무엇인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여러 기적들이란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표적(sign, mark)”이라고 부릅니다. 곧 이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어떠함을 “잠깐” 그리고 “약간” 보여주시기 위한 것들입니다. 이것은 마치 수초 동안 바다 위로 떠오른 고래와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것들을 행하신 것은 우리가 그것을 구경하고 즐기도록 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안에 들어가며, 그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계신가?” “나는 누구인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와 생명 안에 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야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다시 어머니의 태로 들어가야 합니까?” 하며 반문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람이 거듭나게 되는지를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특히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여러 다른 의견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회개의 물 세례를 들어 물은 “회개(repentance)”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물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5: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심으로 자신의 말씀을 사람을 깨끗하게 씻는 물로 비유하십니다. 이렇게 의견들이 달라 보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들이 결국 같은 생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죄를 드러내고, 그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죽게 함으로써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같이 우리 “육체의 본성들”을 거스르고 숨통을 막아 그 본성들을 죽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마태복음 19:21),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 …… 육체의 본성으로 죄인 된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물 속에 가라앉아있어서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에게 성령님께서 호흡을 주시고 그 생명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믿는 자의 거듭난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 말씀은 아마도 로마서 8장일 것입니다. 특히 8:10,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데 이로 인해 우리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이 됩니다. 우리 육체는 “죄의 몸”이며 그 동안 세상을 호흡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살아남고, 높아지고, 성공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세상의 죄악된 공기”를 호흡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곧 “우리 몸이 물 속에 가라앉음으로” 그 죄의 호흡이 끊겼습니다.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 하십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속으로 모셔 들인 자체가 우리의 “의(義)“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죄 없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처럼, 같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육체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살기 위해 세상을 호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이 영으로 사는 삶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로마서 8:2절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선언하며, 또 6절은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좇아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십니다 (6절). 이 말씀은 단순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가진 모든 “육체의 정욕과 자랑”을 십자가에 못박고, 이제 깨끗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성령 안에서 영적인 삶을 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배 위에서 고래가 물 위로 솟아오르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경계를 넘나들며 죽었다 살았다 하는 조마조마한 삶을 삽니다. 이런 삶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육체의 본성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주님의 말씀 속에 깊이 잠기며 성령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거듭남의 비밀을 깊이 묵상하고 이해하며,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의 깊은 곳까지 이르는 축복된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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