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잠언 16:1-3
오늘은 ‘소원’에 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만사여의(萬事如意)’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마음의 원대로 된다”는 뜻을 가진 이 사자성어는 주로 축복을 비는 인사말로 사용됩니다. “만사여의하시길!” 하면서 순조로운 삶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된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는 것은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을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 (잠언 13:12).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이 말씀이 참으로 진리임을 절감합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속이 타고 상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반대로 간절히 원하던 것이 마침내 이루어졌을 때 우리 영혼은 마른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그렇게 시원하고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매일 이런 행복을 누리며 산다면 참 좋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소원대로 되는 일보다는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이런 어려움이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이유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소원이 이루어지는 삶”의 비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이 말씀에 의하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 곧 마음에 원하고 계획하는 것들이 이루어집니다. 사실 단순하게 들리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내 삶 속에 적용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 내 일을 여호와께 맡겨야 하는지,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또 여호와께 맡김으로써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 등등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비록 이런 질문들에 대해 100%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행복한 삶”에 깊이 관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설사 “만사여의” 곧 모든 일이 내 소원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미 불행하며 실패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삶을 추구하되, 오직 “하나님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여기서 “마음의 경영”이란 “마음의 소원” 또는 “이루기를 원하는 계획”을 말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사람이 어떤 소원을 가질 때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말의 응답”이란 어떤 일에 대한 가부간의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Yes” 라고 말씀하시는 그 때에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잠언서 16장에서는 1절 말씀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절들이 여럿 있습니다. 9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하고, 또 33절은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절대적으로”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세상에는 “우연”도 없으며 또 오직 사람의 뜻에 따라서 되는 일도 없습니다. 모든 일 뒤에는 그 일을 작정하시고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 눈에 보기에 “악한 일들”도 그렇습니다.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또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참새 한 마리조차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며 (누가복음 12:6)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0:29). 이와 같이 아주 사소한 것들을 포함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철저히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삶”의 첫 단계는 바로 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sovereignty)”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말의 응답”이 여호와께서 있으므로, 우리의 마음의 소원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기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곧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바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표현되지 않는 마음의 소원”은 위험하고 해롭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마음 속에 원하며 경영하는 것들이 많이 있으면서도 좀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잠언서 19: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며,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 잠언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1:7). 따라서 “지식 없는 소원”이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가운데 갖게 되는 욕심 또는 정욕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며 심지어 하나님께서 아실까 두려워서 마음의 소원을 숨기고 몰래 행합니다. 악합니다. 또 “발이 급한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금 당장 얻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대신 부지런히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세상적인 방법으로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실족합니다. 세상은 “지식 없는 소원을 가지고 바쁘게 달리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이 자체가 “생지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항상 “하나님께 대한 기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들고 나가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1절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우리의 소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나의 “심령”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령 곧 마음이 깨끗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야고보서 5:16절에도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시고 우리의 깊은 속을 정확하게 통찰하십니다. 요즘 “생얼”이라는 말이 흔히 쓰입니다. 화장으로 꾸미지 않은 본래의 얼굴을 말합니다. 좋은 화장품과 화장 기술로 얼굴을 잘 꾸밀 수가 있어서, 이제 “생얼”은 매우 사적인 비밀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겉을 꾸미는 화장품이라면 심령은 그 사람의 “생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얼굴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관통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심령을 따라 일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불행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17: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우리는 자주 “깨끗해 보이는 자신의 행위”에 속아서 그 속의 심히 부패한 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대신, 계속 같은 길을 걸어감으로 결국 실패하고 실족합니다. 본 장의 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현대그룹을 세운 고 정주영 회장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1952년 12월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부산에 있는 유엔군 묘지를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이에 미군은 묘지의 조경 (landscape) 공사를 할 계약자를 구하면서 푸른 잔디를 깔아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한 겨울에 푸른 잔디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현대건설의 정주영 사장은 이제 막 파란 싹이 나오고 있는 보리밭을 통째로 사들여 잔디대신 보리 새싹으로 유엔군 묘지를 푸르게 덮어버렸습니다. 대통령은 그것이 보리인줄도 모르고 묘역에 와서 헌화하고 돌아가고, 미군은 매우 만족해하며 계약한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의 “성공 신화들” 중 하나입니다. 이 일화에 나오는 “보리 새싹들”은 아마도 곧 말라 죽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푸르름” 곧 “생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푸르른 생명은 겨우 “한 시간의 보여주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뿌리가 뽑힌 채 무덤을 덮고 있는 싹들은 이미 추위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부패한” 우리가 세상에서 거두는 “성공”의 본 모습인 것입니다.
“만사여의”한 삶이 우리를 생명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사망으로 인도한다면 우리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모든 일에 있어서 성공의 비결은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은혜로 그것을 이루어주십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독일 신학자는 하나님의 은혜(Grace)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Grace is the royal sovereign power of God, the existential presentation of men to God for his disposal, and the real freedom of the will of God in men.” 한국말로 번역하면 “은혜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능력, 사람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행하실 실질적인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내 속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자유롭게 행하시며 이루시는 것이 곧 은혜입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를 수술할 때, 우선 환자를 마취를 시켜서 정신을 잃게 만듭니다. 비유적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사는 환자에게 하고 싶은 치료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의사가 의도했던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환자가 두려움이나 불신 때문에 자신을 의사에게 온전히 맡기지 못한다면 의사는 자신이 원하는 치료를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원하는 결과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으로 보면 행복의 길은 “만사여의(萬事如意)”가 아니라 “만사여신의(萬事如神意)” 곧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땅”이란 가장 먼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를 주님께 맡기고 내 안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주님께 부탁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에 예수님께서 그를 책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자 이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소리질러 말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하며 동시에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합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 없는 실존”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심지어 “불신”의 문제까지도 주님께서 해결해주실 것으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문제를 초월하는 해결책”입니다. 그래서 잠언서의 지혜자는 말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만사여의”와 함께 “만사휴의(萬事休矣)”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만사여의”와 음이 비슷하지만 전혀 반대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곧 “모든 일이 끝나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말이 생기게 된 유래가 흥미롭습니다. 옛날 중국에 ‘형남’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왕인 고종회는 그의 아들 고보욱을 분별없이 귀여워해서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무슨 짓을 하든 절대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고보욱은 “만사여의”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고보욱은 어느 사람의 말도 듣지 않을 정도로 버릇이 없어졌으며, 이를 본 사람들은 “만사휴의”라며 한탄했습니다. 결국 그가 왕이 되면서 나라는 망했습니다. “만사여의”의 결국은 “만사휴의(萬事休矣)”입니다. 결코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빌립보서 2:13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나의 소원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마음에 영접하고 이를 위한 새로운 소원을 갖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 소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이 행복한 삶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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