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0-58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과 불신자들 사이에 다른 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보기에는 같은 세상에서 살며, 같은 것을 먹고 마시며, 함께 일하다가, 때가 되어 죽고 묻히는 것까지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불신자들은 세상에 속하였고,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며, 신자들은 말씀과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얘기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불신자는 죽음에 삼켜지는 삶을 살지만, 신자는 죽음을 삼키는 삶을 삽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자는 죽음에 먹히지만 신자는 죽음을 먹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신자는 일생 죽음의 두려움에 쫓기며 살다가 결국에 죽음에 삼키우고 더 나아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반면 신자는 믿음으로 죽음을 먹어버리고 더 나아가 부활과 영생의 영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믿는 자의 이렇게 특별한 삶의 방식은 물론 예수님으로 대표됩니다. 주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죽음을 마셨습니다. 요한복음 10:17,1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또 주님께서 겪으실 죽음의 고난을 말리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요한복음 18:11).
오늘 말씀의 주제는 “부활”이지만, 사실 부활은 “죽음”과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이단들은 자주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으심을 부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마르시오니즘(Marcionism)이나 도세티즘(Docetism)같은 이단 사상들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과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신 것을 부인하고 다만 “영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단 사상들에 대해 사도 요한은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1서 4:1-3).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약한 육체를 가지셨으며 또 이 육체로 죽음의 잔을 마셨습니다. 이 진리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비밀들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을 이야기할 때는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함께 이것을 생각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50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혈과 육”은 썩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는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만 놓고 보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격이 없는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혈과 육”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 그것이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42-44절). 사도 바울은 “죽는다”는 말 대신 “심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약하고 욕된 “혈과 육”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강하고 영광스러운 열매를 얻기 위해 우리가 심어야 하는 “씨앗”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씨앗을 심지 않고는 결코 열매를 거둘 수 없듯이, “혈과 육”이 죽지 않고서는 결코 부활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영광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셔서 우리와 같이 “육체”가 되신 것은, 우리를 높이사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혈과 육”인 우리가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복음”입니다.
51-54절에서 바울은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부활의 사건을 설명합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리면 잠자던 자들 곧 죽은 자들은 썩지 않는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며, 또 그 때까지 살아있던 자들 또한 새로운 몸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 일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때를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마지막 때에 “이김(victory)”이 사망을 삼킬 것이며,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썩지 않음을 입을 것” 곧 영원한 새 몸으로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됩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이김” 곧 “최후의 승리”로 끝나며, 이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립니다. 성경 속에서 나타나는 바, 하나님께 있어서 “이긴다”는 말은 거의 항상 “압제자로부터 약한 자를 구원하심”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하나님의 “의로운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하나님의 심판을 맞아 우리를 준비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역은 마태복음 12:18-21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입에 올리기에도 두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갈대”는 얼마나 약한 존재입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갈대가 상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커녕, 작은 인생의 풍파도 견디지 못하고 금방 꺾이고 부러질 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이렇게 연약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 안에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최후의 심판을 견뎌낼 뿐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후사(co-heir)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집니까? 사도 바울은 다시 예수님의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사람이 죽는 것은 나이가 들어 몸이 늙고 쇠하여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그리고 이 죄 문제가 해결될 때 자연스럽게 죽음의 문제도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과 불신자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가지 차이점들은 간단히 “예수님 안에서의 삶”과 “예수님 밖에서의 삶” 또는 “복음 안에서의 삶”과 “복음 밖에서의 삶”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서로 다른 삶은 아래와 같이 전혀 다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밖에서의 삶: 죄 – 죽음 – 율법
예수님 안에서의 삶: 의 – 생명 – 성령
예수님 밖에서의 삶은 “죄와 죽음과 율법”입니다. 죽음은 마치 무서운 주인과 같으며, 사람들은 이 주인의 압제 아래 고통 받는 노예와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주인은 늘 어둠 속에 도사리고 앉아서 감시의 눈을 번득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무서운 주인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죽음이라는 주인이 결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주인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대신 늘 “선한 율법”을 앞세워 사람들을 다스립니다. “율법”은 보기에는 선해 보이지만 사실은 날카로운 가시와 같아서 사람들의 약한 양심을 아프게 찌릅니다. 사람들은 이 율법의 가시에 찔려 고통을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찔러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죽음은 이렇게 “선한 율법”을 앞세워 사람들을 죄 안에 가두고 끝내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서의 삶을 비유로 말하자면 마치 초보운전자가 한밤중에 맨해튼의 번화가를 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리에는 수없이 많은 사인들이 서있고 신호등은 가로등과 네온사인에 뒤섞여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사방으로 복잡하게 연결된 도로 위에서 길을 찾기가 어렵고, 언제 어디서 사람들이나 차가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게다가 뒤에 따라오는 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길을 재촉합니다. 어쩌다 신호를 위반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습니다. 왠지 저쪽 컴컴한 골목 안에서 험상궂은 경찰관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삶을 어떨까요? 앞의 비유와 대조를 시키자면, 예수님 안에서의 삶은 밝은 햇살이 비추는 봄날 곧게 뻗은 외길을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길은 좁고, 같이 달리는 차들도 많지 않습니다. 사인이나 신호등도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어버릴 일은 전혀 없습니다. 외길인데다가 밝은 빛이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달릴 때 지켜야 할 규칙은 겨우 세 가지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길을 벗어나지 말고 (믿음), 목적지를 향하여 (소망), 열심히 달리는 (사랑) 것입니다. 58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믿음),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사랑).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소망).”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새 길을 달리는 삶입니다. 이 길을 잘 달리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죽음”을 삼켜야 합니다. 하지만 이 죽음은 사단 마귀가 주는 “두려운 죽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 드신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나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 이 죽음은 나의 뜻을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또 이 죽음은 세상을 향한 정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에 대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왕노릇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담대히 외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사망”은 불못에 던져집니다 (요한계시록 20:14). 말 그대로 이김에 삼킨 바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믿는 자들은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새 하늘 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요한계시록 21:7).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 안에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빌고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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