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4-15
구약 성경의 앞 부분에 위치한 역사서들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띕니다. 대부분의 책들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는 그 서론에서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1:6)라고 하며, 이어지는 여호수아서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1:1)로, 그리고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1:1)로 그 책을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무엘상에서는 제사장 엘리가, 그리고 사무엘하에서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죽고, 열왕기상의 시작 부분은 다윗왕의 마지막 날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독립 국가의 역사로는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열왕기하 또한 “아합의 죽은 후에”로 시작하며, 결국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에 의해 (열왕기하 18:11), 그리고 남쪽의 유다 왕국은 바벨론에 의해 (열왕기하 25:21) 무너지고 백성들은 죽거나, 먼 타국으로 사로잡혀가거나, 뿔뿔이 흩어집니다. 생명의 책으로 불리는 성경 속의 역사가 대부분 이렇게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된다는 점이 뜻밖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은 모세나 다윗과 같이 뛰어난 지도자들, 그리고 엘리야나 이사야와 같이 영적인 선지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악된 삶을 떠나지 못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기 위해 피와 눈물과 땀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생명을 삼키듯 ‘땅’은 이 모든 수고의 열매들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이러한 구약의 역사와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를 가리켜 “요한이 잡힌 후”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푼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왔습니다. 온 땅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그 구원자”가 아닌가 생각하며 조심스러운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요한이 잡혀서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불의한 왕 헤롯과 그의 음란한 아내 헤로디아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사람들의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삼키는 구약의 어두운 역사가 세례 요한에게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어떤 점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세례 요한과 비슷합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왔느니라” 전파한 것처럼 (마태복음 3:2),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시며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또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께서도 불의한 권세자들에게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다르시며, 세상이 있어온 어떤 왕들이나 선지자들과도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다르심”은 세례 요한의 증거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사람들에게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11,12). 이 증거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며 또한 세상을 심판하시는 재판장이 되십니다. 이런 예수님에 비하여 세례 요한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을 들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가리켜 예수님 자신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고 너희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3:16,17). 여기서 “너희”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에 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이 모든 말씀들을 예수님과 또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그 전까지 곧 “요한의 때까지” 있었던 모든 사람들과 그들이 했던 일들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왔다”고 하십니다. 성경에 “때(time)”를 가리키는 단어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Chronos”라는 말로 이것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때”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날 것이 예측 가능한 일들의 시점 또는 기간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마태복음 2:7),” “엘리사벳이 해산할 때가 차서”(누가복음 1:57) 등에 사용된 “때”가 Chronos입니다. 이 “Chronos”의 때는 어떤 사건의 “시간적 배경”을 서술하는 부수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일”과도 같은 것이겠지요. 성경에서 때를 나타내는 또 다른 말은 “Kairos”입니다. 이 말은 그냥 어떤 사건에 부속된 시간이 아니고, 말 그대로 “때”입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Chronos를 “일어난 때”라고 한다면, Kairos는 “이루어지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Chronos가 연속되는 시간 위에 흩어져 존재하는 시점들이나 기간들이라고 한다면, Kairos는 긴 시간의 여정이 끝나고, 마무리되며, 그 결국에 도달하는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Chronos가 우리가 겪는 “과정”이라면, Kairos는 우리가 맞이하는 “최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수 없이 많은 왕들과 선지자들이 태어나서, 활동하고, 죽었습니다. 이것들은 다 Chronos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Kairos입니다. 곧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계획하시고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들이 다 이루어지고 이제 세상이 그 결국을 맞이하는 사건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때가 찼다”고 하시는 말씀은 매우 절박하고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 지체하거나 망설이거나 기다릴 시간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찼다”고 하심은 이제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는 때가 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때가 찬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십니다. “회개와 믿음”이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 응답하여 요구되는 행동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하고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때가 찼음을 깨닫고 회개와 믿음의 결단을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Kairos 곧 “최후의 때”가 우리에게 조용히 임하며 또 그 결과가 눈에 보이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말하자면 “끝의 시작(the beginning of the end)”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작은 씨앗”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은 자주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씨”에 비유하곤 합니다. 마치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농부는 땅을 갈아엎고 밭에 씨를 뿌립니다. 이는 가을에 추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봄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가을에 곡식을 추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별개의 두 사건이 아닙니다. 비록 시간 상으로는 떨어져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 사건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고서는 가을에 곡식을 추수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봄에 단단한 땅을 갈고 씨를 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힘들여 땅에 씨를 심었어도 당장 먹을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또 전혀 수고한 표시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봄의 파종과 가을의 추수가 하나의 사건임을 생각할 때, 씨를 심는 것이야말로 “추수의 시작”입니다. 씨를 심는 것과 동시에 이미 열매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심은 마음의 밭을 갈아엎고 복음의 씨를 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때”를 맞이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영생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Kairos 곧 세상의 끝을 “복음”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예수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 곧 주님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사람들을 위해 하신 일들과 그들에게 전해주신 말씀들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간단히 “예수님”을 복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 땅에 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 마음 속에 천국의 씨를 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씨 안에는 모든 좋은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죄사함이 있으며, 영생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가 있으며 사랑과 화평과 희락이 있습니다. 죄와 죽음과 사단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있으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는 빛과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알고,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모든 좋은 것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이라는 복음의 씨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봄에 씨를 심는 것과 가을에 곡식을 추수하는 것은 하나의 연속되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추수 때에 무엇을 거둘 것인지는 봄에 무엇을 심는가에 의해 "이미"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말하기를 "추수 때가 아직 멀었으니 좀 더 쉬고 좀 더 놀자" 하며 씨 뿌릴 때를 놓치면 그 농부는 한 해의 농사를 망치게 되고 추수 때에 거둘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Kairos는 주님께서 마지막 날 오시는 그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복음의 씨로 이 땅에 처음 임하신 그 때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진정한 Kairos는 바로 오늘 지금입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날이며 또한 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1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려운 사실은 이제 때가 찼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으로 끝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늘 문이 닫히고 우리 각자가 지금 심은 대로 혹은 영생으로 혹은 영벌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천국의 복음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님을 듣고 믿고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부지런히 천국의 씨를 뿌려 영생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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