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0:46-52)

전낙무 목사 성경공부 방 2018. 5. 28. 01:22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0:46-52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라는 한 소경 거지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과 소경 바디매오입니다. 사실 바디매오는 성경에 기록될만한존재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소경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며 겨우 연명을 하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outsider”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길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미미한 사람이 예수님의 천국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 치료하신 여러 사람들 중 맨 마지막 사람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마가복음의 기록 내에서는 이 사건 이후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기록이 없습니다. 또 놀랍게도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치료하신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이름이 언급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사막의 먼지처럼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그는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항상 밝게 빛나며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또 많은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라는 도시를 나가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지고,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33, 34).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15마일(24km) 정도 떨어져 있는 요단강 서쪽 편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이 도시에 들르신 예수님께서 이제 막 그곳을 떠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때 성문 밖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던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크게 소리를 질러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해!” 하며 그를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저를 부르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바디매오와 예수님의 만남은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이 만남은 가장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 앉아있는 바디매오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예수님의 찾아오심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가 살고 있는 여리고로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여리고는 바다 표면보다도 250m나 낮아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한 사람 바디매오를 찾아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여리고는 기온이 따뜻하고 또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여 여러 농산물들의 주산지였습니다. 헤롯 대왕은 이곳에 자신의 겨울 궁전을 지어놓고 이용했으며 죽을 때도 그곳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살기가 좋은 곳이었겠지요? 아름다운 요단강가에, 종려나무 가지가 우거지고, 상인들로 붐비는 이 도시의 시끄럽고 활기찬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여리고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실 필요가 없는, 풍요롭고 안락한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46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여리고 방문은 매우 짧습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하고는 곧 예수께서 ……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라고 합니다. 마치 아무 볼 일이 없이 그냥 지나가는 길인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여리고를 들르신 것일까요? 이는 필시 바디매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를 만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앉아있는 그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바디매오는 특별히 구원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앞을 볼 수도 없고, 또 다른 사람들의 동정을 의지해 사는 거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특별히 구원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바디매오처럼 어둠 가운데 있으며,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하며, 모든 사람이 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쳐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0:10,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흑암 중에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종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횃불을 켜고 자신이 켜 놓은 그 불을 의지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바디매오는 전자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 있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반면 여리고 성내의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로 볼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켜 놓은 횃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면서 자신들이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했으며 이로 인해 세상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방문하신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한복음 9:41)” 정말 불쌍한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아닙니다. 정말 불쌍한 자는 사람들이 켜놓은 세상의 거짓 빛에 속아서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세상의 빛 예수님께서 지금 그의 앞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바디매오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말렸지만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매우 절박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놓치면 끝장이라는 그의 간절함은 아무도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순간에 바디매오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들으시도록 온 힘을 다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바디매오에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오직 자신과 예수님 딱 둘만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회복하는데 기초가 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무엇인가?”가 결정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둘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바디매오에게는 그에게 익숙한 소경 거지로서의 삶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도시 여리고의 부유하고 낙천적인 사람들은 이 불쌍한 걸인에게 너그러웠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성문 앞의 목이 좋은 자리를 잘 지키기만 한다면 바디매오는 사람들의 자비심에 의지하여 평생 앉아서편하게 먹고 마시는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냥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며 조용히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본래 송충이도, 거지도, 소경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 모든 고상함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어둠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이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인생 문제의 유일한 당사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소서!”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긍휼이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비참한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며, 이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붙들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전혀 다른 점이 여기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나의 선함을 의지하여 신에게 나아가지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타락해서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선하셔서 이런 죄인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 타락한 사람과 선하신 하나님을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끈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다른 방도는 전혀 없으며 있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붙들지 않고, 다른 것들, 나의 자랑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시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일으킬 뿐입니다. 로마서 11:32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 말씀은 참으로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은 내가 은혜를 받을만한 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불순종의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통한 마음으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외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만이 내가 의지할 유일한 끈임을 믿고 생명을 다해서 그 끈을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앞에 나온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이 말씀은 참으로 생명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 단 한 번도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의 앞에 놓인 그릇에 동전 몇 개를 던지는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원하는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연한 듯 동전을 던지지 않으시고, 대신 그의 눈을 바라보시며 그에게 진지하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에게 앞을 보는 것처럼 더 절실한 소원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디매오는 이 간절히 원하지만 불가능한 마음의 소원을 예수님께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의 믿음이 그의 눈을 뜨게 하였으며 그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물론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예수님의 그에 대한 긍휼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한없는 사랑이 내 삶에 임하시도록 하는 것은 바로 내 믿음입니다. 곧 우리는 믿는 만큼 주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해보면 왜 여리고 성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진리의 빛 가운데 예수님을 보고 또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바디매오만이 예수님께서 만나신 진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매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인사를 나눕니다. “How are you?” 묻고 “I am fine, thank you!” 하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의미 없는 만남들과 대화들을 이어가며, 심지어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 마음이 참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fine”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생명처럼 빛처럼 간절히 필요한 자들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저기 서 계십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다리십니다. 내 마음의 깊은 소원을 들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동전 세 닢이 아니라,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아무리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간절함과 담대함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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